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정권 탈취를 위해 ‘이리 떼 같은 전두환의 극악무도한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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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선데이저널은 85년 최초로
‘피바다의 광주…참상을 알렸다’

모두가 전두환의 잔악무도한 폭거에 침묵하던 시절 ‘그 때 그 기사’
동아일보 기자의 생생한 광주참상 현장기사 검열로 삭제된 채 발행

올해로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항쟁이 일어난 지 40주년. 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선데이저널>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85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모든 언론들이 침묵하고 있을 당시 선데이저널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신문 발행을 막으려는 LA총영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조직적인 위협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신문이 발행되자 총영사관은 신문을 수거했고 급기야 재판을 찍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1985년 5월 18일자 선데이저널에 ‘아…무등산이여! 피바다의 광주여’ 제하의 기사는 광주의거가 발발한지 나흘째 되던 날인 5월22일 당시 동아일보 특별취재반이 현지에서 취재한 광주학살 체험 기사다. 그러나 계엄 당국의 검열과정에서 기사 전체가 삭제되어 사장되어버린 기사를 용기 있는 동아일보 한 기자의 기사제보로 <선데이저널>에서 전문을 게재했었다.
이 기사로 인해 동아일보는 광주 참상 현장기사가 삭제된 채로 5시간이나 지연되어 발행되었고 이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본보는 올해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여 전두환 군부독재의 극악무도한 잔악상을 알리고 광주 영령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1985년 본지 원문 그대로를 게재했다. <편집자 주>

▲ 선데이저널 80호(1985년 5월 19일자) 표지

▲ 선데이저널 80호(1985년 5월 19일자) 표지

계엄군의 무차별 융단폭력

비상계엄 확대이후 격화해 지기 시작한 전남 광주일대의 학생시위는 시민들이 가세, 집단화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18일과 19일 오전 시가 중심지에 투입된 계엄군이 시위군중과 행인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시민들이 군과 적대감정을 가지고 방화, 파괴 등으로 맞서는 바람에 중심지에서만 이루어졌던 시위가 광주시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시는 공포의 시로 변했다.

19일 하루 동안 광주시 곳곳에서 30여 차례의 군중시위가 잇달아 시가지 곳곳에서 방화로 치솟는 검은 연기와 자욱한 최루탄 가스가 범벅이 된 채 유혈사태가 계속 일어났다.
이날 군중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른 아침부터 군경의 삼엄한 경비가 펴지고 차량통행이 일체 금지된 금남로에서 6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오전 10시반경 기동경찰이 확성기와 군 헬리콥터를 동원, 중심지에 집합한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했으나 군중의 숫자가 자꾸 불어 10시 40분경부터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도청 앞 금남로 입구와 광남로 네거리를 완전 차단한 500여명의 경찰 병력에 맞선 시민과 학생들은 광주관광호텔 앞과 금남로 4가 서울 신탁은행 앞에 교통 철책과 길가의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애국가, 홀라송그 노래 등을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삽시에 시위군중은 5천여 명(경찰추산 3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군중은 페퍼포그, 최류탄 가스 등을 마구 쏘며 진압하려는 경찰에 화염병, 돌, 각목 등으로 맞섰다. 경찰이 흥분된 시위 군중을 진압시키자 10시 5분경 군용트럭 30여대에 분승한 특전단 계엄군이 도청 앞에 광남로 네거리에 진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군중을 포위, 압축하기 시작했다.

이때 군중들은 금남로 3가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각목과 철근, 쇠파이프 등을 들어내 놓고 군과 전면 충돌했고 군의 무차별 폭력에 흥분한 인도주변 시민들도 합세했다. 금남로에 투입한 1천여명의 특전단 병력은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사위 군중의 어깨와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지켜보는 시민들의 비명으로 아비규환의 유혈사태를 빚었다.

시위군중들은 군의 무차비한 폭력에 의해 충장로 등 골목으로 피하거나 건물 안으로 뛰어 들었으나 군인들은 건물 안이나 골목 안까지 이들을 추적, 시민들을 붙들어 내 길가에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들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겨 길가 곳곳에 2열로 머리를 처박은 자세로 꿇어앉히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특히 젊은 청년들의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겨 마구 때린 뒤 거꾸로 뒤 묶고 겁에 질린 여학생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해 건물 옥상 등에서 내려다보는 시민들은 매를 맞고 피를 튀기는 이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군인들은 이후 장갑차로 시를 샅샅이 돌며 시민들을 붙잡아 구타, 연행했고 일개분대나 소대로 나뉜 군인들은 도보로 중심가의 건물안, 주택가 등을 샅샅이 뒤지며 폭력을 휘둘렀다.

▲ 올해로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항쟁이 일어난 지 40주년. 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85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모든 언론들이 침묵하고 있을 당시 선데이저널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 올해로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항쟁이 일어난 지 40주년. 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선데이저널>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85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모든 언론들이 침묵하고 있을 당시 선데이저널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군인들은 또 오전 11시 15분경부터 군 지프차에 장치한 확성기나 헤드폰 등으로 각 옥상이나 건물 안에서 내다보는 시민들에게 ⌈문을 닫고 커튼을 쳐라⌋고 소리쳤다. 이 때문에 금남로 , 광남로, 충장로 일대에는 한때에 문을 열거나 업무를 보고 있던 관공서와 공공건물이 낮 12시를 전후해서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은 외곽도로로 피신했다.

이후 시위 군중들이 일단 해산해 버리자 군인들은 골목과 건물 안을 계속 뒤져 30대 이하의 남녀 시민들을 집단 구타하면서 길가로 끄집어 내오는 한편 금남로에서는 5백여 명의 무장 특전단 병력이 우렁찬 구령과 함께 총검술 비슷한 진압구령을 펴 시민들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 군인들에게 쫓겨나는 20대 종업원도 발길질로 쓰러뜨린 뒤 마구 짓이기고 무등교시 학원 교실 안에 있던 학생들까지 덮치기도 했다.

또 군인들은 머리가 깨져 길가에 쓰러져 있는 시민들을 후송하는 경찰에까지 곤봉을 휘둘렀고 부대를 지휘하던 안수택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부상시민을 빼돌리거나 학생들을 피신시키면 당신들도 동조자들로 취급하겠다는 등의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 충돌에서 군인 5명도 돌팔매에 맞아 부상했고 군폭력에 부상한 시민들은 수백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 경찰의 간부 격은 헤드폰으로 충장로 등 골목길에 서성이는 시민들에게 ⌈제발 돌아가라. 군인들에게 걸리면 죽는다⌋고 외치며 안타까워 울먹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군인들은 시내중심지 뿐만 아니라 중앙로, 계봉로 등시 외곽지대 주요 도로변과 골목 어귀마다 군을 배치했고 군대 병력이 상점 앞 골목길을 누비며 마치 사냥을 하듯 20대 청년들을 찾아 마구 두들겼다. 군인들은 무릎을 꿇고 비는 시민들마저 치고, 달아나는 청년은 발로 걷어 넘어뜨리고 5,6명이 달려들어 마구 짓밟는 바람에 군인들의 눈에 띤 젊은 시민들은 어찌해 볼 도리조차 없었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저럴 수가 있느냐⌋고 발을 굴렀다.

오후에 다시 금남로에서 시작된 군중시위는 오전의 것과는 양상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오전의 시민과 학생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군인들의 행위에 흥분된 시민들이 모두 가담했고 군중들도 흥분, 화염병을 마구 나르며 손에 각목을 들고 시민들은 군에 대항했다.

군인들에게 쫓겨 해산한 시민들은 광남로, 충장로 등에서도 산발적인 대모를 벌였고, 동구 대인동 시외버스 주차장도 1천여 명의 군중이 검거, 군과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4시 40분경에는 동구 학동 철도변등 변두리 주변까지 시위 군중들이 확산되었고 또 많은 시민들이 시위 전역에서 산발적인 투석, 방화와 진압군과 유혈비극이 이루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 증강된 군 병력과 목포 여수지역을 제외한 도내 8개 경찰서에서 1천 8백여 명이 집결했으나 시 전역에 확산된 데모는 진압시키지 못하고 겨우 관선도로와 주요지점 등 선과 점만 확보할 수 있을뿐, 속수무책인 상태가 되었다. 오후 5시 10분경 중앙로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위군중 5백여 명이 투석, 각목 등으로 맹렬적으로 특수 진압대에 맞서는 바람에 도보병력이 접근치 못하는 가운데 장갑차를 포위, 지푸라기를 쌓아 불을 지피고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때마침 본사 취재자가 이 광경을 취재하기 시작하자 장갑차 위에서 포위되었던 특전단 대위가 ⌈완전 포위됐으니, 우리가 무기로 증원 병력을 보내도록 조치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취재차가 군중 근처를 지날 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시민들은 발길질을 하며 ⌈사람이 죽어 가는데 왜 동아일보는 가만히 있느냐⌋고 외쳤고, 길가에 시민들이 취재차를 포위 투석을 퍼붓기도 했다. 오후 5시 20분경에 금남로에 다시 1천여 명이 모여들어 특전단 병력이 변두리 지역 진압에 빠져 나간 사이에 방화, 파괴로 시위를 벌이다가 군과 충돌했고 오후 6시 50분경 공공 주차장과 광주고속터미널을 검거한 시민들이 31사단 병력과 충돌하면서 택시를 붙잡아 불을 지르는 바람에 검은 연기가 마치 대형화재를 방불케 했다.

임산부 배를 대검으로 찌르기도

이날 전시가지에 확산된 군중데모는 8시 20분까지 계속되었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7시경 동구 자산동 뒷산에서 환성과 함께 봉화불이 타올랐으며 불은 5~6분간 계속되었다. 한편 이날 시민 데모가 격화되고 군의 무력진압의 비참상이 소문으로 퍼져 나가자 광주일고, 중앙여고 등 3개 학교에서는 오후 4시경 한때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 교정에 나와 시가 행진을 벌일 기세를 보이다가 오후 5시 30분경 교사들의 설득으로 다시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등 일부 고교생들의 술렁임도 심상치 않았다. 전남 도 교육위원회는 이같은 고교생의 움직임과 시민 소요사태의 심각성을 고려, 20일 하루 동안 가정 학습의 날로 정하고 수업을 하지 않도록 조처했다.

광주 시내는 저녁 7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어둠이 깔리면서 시내는 차량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 시는 삽시에 불빛마저 없는 암흑세계로 바뀌어 고요 속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군경은 7시부터 시가지를 돌며 확성기로 시민들의 귀가와 변두리 일부 상점 등에 철시를 종용, 특전단 병력은 또 광주 관선도로와 광남로, 중앙로, 계봉로 증 도심지로 이어지는 중요 관선도로를 점령했다. 군중의 노래도 홀라송그, 선구자 등에서 오후에는 애국가, 아리랑, 봉화선화 등으로 바뀌었다. 오후에 시민과 학생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금남로에 진주했던 특전단 병력이 조선대학 캠퍼스로 식사를 하기 위해서 빠져 나가기 시작한 오후 1시 반경부터 서서히 운집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군중들은 오후 7시 30분경 7천 여명(경찰은 3천으로 추정함)모두가 몽둥이, 쇠파이프 등을 들고 흥분해 있었다. 이들은 금남로 양쪽을 차단한 경찰을 향해 화염병과 돌들을 던지기도 했고 승용차를 끌고 나오기도 했다. 40대 장년자들과 부녀자들까지도 합세한 시위 군중들은 케룩 세터에서 전남 145236포니 승용차 등 차 4대를 끌고나와 불을 붙인 뒤 경찰 저지선을 향해 밀어붙였고 드럼통을 굴리기도 했다. 시위 군중들은 또 택시정류장 철책가드 등을 뜯어 경찰에게 밀어붙여 바리케이트를 쳤고 방망이와 각목을 들고 ⌈와-와-⌋흥분의 절정에 달했다.

선데이2

오후 3시부터 경찰은 휴대한 진압화기가 바닥이 나자 저지선을 지키고 대응없이 지켜보기만 했고, 군 헬기 2대가 건물 옥상 위에서 저공비행을 하며 ⌈시민과 학생여러분, 이성을 잃으면 혼란이 가중된다. 주저 말고 즉각 해산하라. 시민들이 합세하면 가정과 개인에 중대한 불행사가 온다⌋고 반 위협조로 귀가 종용했으나 시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군중들은 각목을 더 높이 쳐들고 이를 향해 고함을 치며 야유를 했고, 충정로 중앙로에서 가담 일대에는 경찰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몰려 들었다. 오후 3시경 시위군중 등 3백여명은 금남로 3가에 있는 카톨릭센터 기독교 방송에 몰려들어 건물을 막고 있던 계엄군 1개 중대를 완전포위, 강제로 무단해체 시키고 방송국 안에서 인질극을 벌리려다 총연표 방송국장의 간곡한 설득으로 30여분 만에 풀어졌다. 방송국을 검거한 시위 군중들은 주조정실 등의 기물을 파괴하는 바람에 방송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3시 176분경 다시 점심을 먹은 병력이 도청 앞과 광남로 네거리에서 포위 압축해 오자 시민들은 계속 돌을 던지며 각목을 휘둘러 한때 특전단 병력과 혼전을 이루었고 케리바 60을 거총한 장갑차가 시위군중들을 밀어 닥치자 군중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고 숨었고 군인들은 또 이들을 추적하며 마구 두들겼다. 3시25분경 군인들에게 밀려 도망가던 1백여명의 군중들은 동구 조동 MBC건물의 2층에 마구 들어와 화염병을 던지는 바람에 방송국 직원들이 일시 대피하기도 했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문화방송 차고에서 승용차 5대를 불질렀고 MBC사장이 직영하는 전자제품 문화상회에 불을 질렀다.

흥분한 데모 군중과 진압군경 공방전

연 사흘째 계속되고 있는 광주시민 소요사태는 20일 오후를 지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도청을 제외한 전시가의 관공서, 공공건물, 경찰서가 방화·파괴되었고 방송국이 불탔으며 광주시의 행정과 경찰 정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의 피를 보고 분노와 흥분의 절정에 다 달았다. 군중들의 구호도 이제는 정치차원을 떠나 「사망자를 살려내라」, 「우리 모두 죽여라」는 식의 극렬한 감정적 구호로 바뀌었고 시가지에는 화염병 공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내의 버스가 모둔 데모 군중들에 점거, 탈취되어서 동원되었고 주유소마저 점거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민학생 경찰의 쌍방에서 사상자는 속출하고 있었고, 도청을 중심으로 한 데모 군중과 진압군경의 공방전도 20일 자정을 넘어 밤새 계속되고 있다.

이날 데모군중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오후 2시 반부터 광주시내 중심지인 금남로 3가 수미다방 주위에 5백여명 시민, 학생이 모여 들면서 부터였다.
사복차림의 고교생과, 아낙네 50대 장년까지 포함된 군중들은 이날 새벽6시 김안부씨(35세, 노동, 광주시 서구 월남동 132-32)의 시체가 전남 서구 학동 앞길에서 온 몸이 찢기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피해사실 등 전날의 시민 피해상황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흥분의 열기는 더해갔다.

시민들은 제각기 여기모인 우리는 다 한마음이라면서 서로 결전의 결의를 다졌고 특전군인이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지시를 받고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더욱 시민들을 자극하는 상황이었다.
같은 시간 동구 대인동 대인시계 앞길에는 이미 6백여명의 데모대가 군경과 대치,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3시를 전후해 동구 동명동에서는 하교하던 중학생 300여명이 길거리에 직총하고 서 있는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며 대치, 최류탄과 페퍼포그 세례에 물러나기도 했다.

오후 3시반경에는 이미 금남로에 시위군중 5천여명이 길을 메웠고, 이들은 경찰이 페퍼 포그와 최류탄으로 저지선을 압축해 오자 길바닥에 그대로 연좌, 태극기를 흔들며 연좌농성에 들어간 시민들은 군인들이 밀어붙이자 충장로와 현대극장 쪽으로 물러났다가 「모이자, 모이자」라는 구호에 따라 수천명이 운집, 군경과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오후 4시50분 경 데모데가 도청으로 통하는 모두 6개 방향으로 물밀 듯 밀어닥쳤고 이들은 제각기 대형 화병과 드럼통을 굴리며 다가 왔고 일부 데모대는 쇠파이프와 식칼을 들고 같이 죽자고 외치기도 했다. 이 이후 도청으로 이어지는 모두 6개 방향의 도로에는 3중 4중의 경찰 저지선이 쳐졌고 그 후방에 군인병력이 진주, 데모대와 긴장의 순간을 거듭했다. 오후 5시20분경 충장로 입구부근의 데모군중들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육탄 돌격을 시도, 경찰과 충돌했다.
이들은 대도호텔 앞에서 연좌한 뒤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고 대표자를 뽑아 경찰저지선 앞으로 내보내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할 테니 경찰은 비껴달라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데모군중들은 길바닥에 연좌한 채 애국가, 진짜사나이 우리의 소원 등을 노래 부르며 태극기를 휘둘렀다. 6시 50분경 금남로를 중심으로 한 1만명의 데모군중이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든 것은 무등 경기장에 모여 19일 군의 진압과정을 규탄하고 나선 광주시내 영업용 택시 운전사 2백여명이 「군의 저지선 돌파에 앞장서라」 하고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맨먼저 금남로쪽에 나타난 30여 대의 택시들은 운전사만 탄채 헤드라이트를 뒤따라 데모군중 맨 앞에 도열했곻 7, 8대의 대형버스와 3, 4애의 트럭이 뒤따랐다. 이때 군중 속의 한 청년은 버스위에 뛰어올라 「고대생 3천여명이 광주시민 봉기에 합세하기 위해 출발했다」고 외쳐 데모대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후 6시 55분 광전교통 소속 전남 5아 3706호 버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데모대의 투석엄호를 받으며 군 저지선을 질주하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에 시야가 가린 차는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이때 1백여명의 군 병력이 소총 개머리판, 곤봉 등으로 차창을 부셔 운전대에 앉아 있는 20대 청년을 구타하고 차안에서는 20대 청년 8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군인들과 맞부딪쳤다.

10여분간 계속된 충돌이 끝나자 차 안에 쓰러진 청년 9명이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채 피를 흘리며 군인들에게 끌려 나와 바로 옆 허바허바 사진관 건물 옆에 내려졌다. 이들은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진 상태였지만, 10여 명이 구두 발길질을 하고 계속 곤봉을 휘두르자 골목 어귀에서 계속 지켜보던 군중 5백여명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와 폭행군인들을 뜯어 말렸다. 군인들은 바로 옆 런던약국에서 3명의 시민이 나와 약을 바르고 치료하려 하자 약품과 물수건만 보내 줄 것을 요구한 뒤 시민들의 흥분에 대비, 접근을 일체 막았다.

그러나 40대 한 부인은 저지도 뿌리친 채 미친 듯이 부상자들에게 달려들다 길바닥에 흥건히 괴여있는 피를 보고는 「이 피를 보라, 당신들이 국군이냐」하며 까무러치기도 했다.
5백여명의 시민들은 곤봉세례에도 물러서지 않고 부상자들을 우리에게 인계하라고 요구, 상처가 심하지 않은 5명을 인수했고 나머지 5명을 뒤에 도착한 앰뷸런스에 실어갔다. 저녁 7시 26분 충장로 쪽에서 대치하던 데모군중들은 천일여객 소속 전남 5자1051호 버스를 몰아 경찰 저지선을 뚫고 도청 앞 분수대를 들이받은 뒤 멈춰 섰으나 경찰은 재빨리 피신, 인명피해는 없었고 버스 안에 탄 두 청년만 연행되었다.

비명과 함성의 도가니 참혹한 유혈전

저녁 7시 반을 넘기면서 금남고 데모군중을 시외버슬 공용 주차장을 점거, 버스를 탈취해온 또 다른 데모대와 합류, 대형버스 5대씩을 2열로 앞세우고 아리랑 등을 부르며 군경 저지선을 향해 다가왔다. 군인들은 데모대의 기세에 눌려 일단 저지선을 전일 방송 앞까지 후진시킨 뒤, 교통신호대 가드레일을 뜯어 바리케이트를 쳤고 최류탄, 퍼페포그를 마구 쏘아 데모대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길가 건물 안에서 나온 아낙네들은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나와 길바닥에 던지며 합세했고, 데모대는 군경 저지선 10미터 전방까지 압축해 왔다.

광주저녁 7시 45분경 데모대 속에서 호남농장 소속 전남 7가 5259호 픽업이 돌진해 와 분수대 앞에 멈춰섰고 같은 시간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사방에서 데모대가 부르는 애국가의 물결이 최류탄 투석소리와 함성과 비명까지 뒤섞여 경찰 저지선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최류탄 속에 버스를 앞세운 데모대들은 군경과 육박전을 벌여 저녁 8시를 전후한 전일방송 부근의 금남로엔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20여분간 계속된 이 충돌이 끝나자 시동이 걸린 수십대의 벗, 트럭, 택시 사이엔 머리가 깨지거나 어깨가 내려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실신한 부상자 20여 명이 곳곳에 즐비했다.

안내양 차림의 20대 처녀 2명이 운전사 차림의 머리가 깨진 30대 청년을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쓰러진 환자를 후송하며 환자가 위독하니 앰뷸런스를 빨리 보내라는 목 메인 경찰무전 소리가 유혈전의 참혹성을 말해 주었다.
저녁 8시 20분부터 일단 소강상태에 빠진 데모대들은 10여분 뒤 도청을 향한 모두 6개 방향으로 소방차를 탈취, 탑승하거나 시내, 시외버스 주차장을 점거, 버스를 빼앗아 탄 데모들이 경적과 사이렌을 울리며 합세하자 더욱 격렬해 졌다.
8시 30분경 소방차 3대를 앞세운 금남로의 데모대는 소방호스의 물을 뿜어 최류탄 가스를 제거하면서 다시 군 장갑차로 밀어닥쳐 데모대가 모은 소방차와 군 장갑차는 머리를 맞댄 채 밀고 당기는 씨름을 벌였다.

같은 시간 동구 공동의 MBC 건물에서는 데모대가 건물에 방화하는 바람에 불길이 치솟았고 광주 KBS 방송도 데모대의 난입과 기물들의 파괴로 방송이 중단되는 한편 시청 저지선이 무너져 시청이 데모대에 의해 완전 점거되었다.
광주시의 각 지역에 데모대들은 주유소를 점거, 깡통에 휘발류를 퍼와 곳곳에 불을 지르거나 화염병을 만들어 던지기도 해 시내 곳곳에는 검은 연기나 불길이 치솟는 곳이 많았다. MAC 불은 바로 옆 박종각 외과에 옮겨 붙어 입원환자들이 탈출소동을 벌여 수라장이 됐고 오후 5시부터 전화선이 모두 끊겨 행정이 완전 마비된 시청건물은 6천여명의 데모군중의 총 공세에 군경의 저지선도 손쓸 여유 없이 무너졌다.

저녁 9시 10분경에 노동청 앞 5거리의 데모군중이 버스에 불을 질러 경찰서 저지선을 위협했고 20분경엔 광주고속 버스 10여대를 들고 나온 데모대가 노동청 앞 경찰 저지선을 돌진하는 바람에 함평경찰서 소속 정홍길경장, 이세홍, 강정동, 박기웅 순경 등 경찰관 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5명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한편 저녁 8시반을 넘기면서 변두리지역의 데모대들은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 등을 차례로 공격해 파괴가 잇달았다. 밤 10시경엔 외곽지를 경비하고 있던 군 저지선 곳곳에서 쏘아대는 예광탄과 신호탄이 불빛마저 없는 광주 시가의 밤하늘을 밝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 주었다. 밤 10시 10분경부터는 도청을 에워싼 시위 군중이 시시각각으로 군경 저지선을 압축해 왔고, 일부 데모대는 산발적으로 도청 뒷담의 월담을 시도하기도 했다.
도청건물 3층의 도지사 실은 이때 폐쇄돼 장형태 전남지사는 1층 서무과로 피신하고 도내 인접 소방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방관 지원을 요청했다.

밤 10시 30분경 동구 동명동 앞길에서는 특전단 병력과 데모단이 충돌,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외곽지대의 군 저지선이 허물어지는 곳도 많았다. 동명동 충돌에서 최루탄 가스에 실신했다가 군인들에게 잡혀 집단폭행을 당한 노랑색 작업복 차림의 30대 청년 한 명은 숨진 채로 경찰가스차로 도청으로 옮겨진 뒤 정문안 방공호 안에 안치된 채 밤을 세웠다.

밤 10시 30분을 넘기면서 도청에선 곳곳에서 부상당한 학생, 시민, 경찰들이 밀어닥쳐 수라장이 되었고 경찰관 중에서 과로로 쓰러져 들어오는 사람도 속출 되었다. 이들 부상자들은 앰뷸런스에 실린 뒤 군인인지의 여부를 데모대에 확인해 준 뒤 데모대의 도움으로 경찰들과 시민들은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밤 10시 50분경 서구 임동 후쪽에서 버스 1대와 트럭 5대를 몰고 나온 데모대들은 곡괭이, 각목 등으로 무장 금남로 쪽으로 접근했고 이들 데모대가 지나는 골목 곳곳에서 총성과 비명이 길을 메웠다.
밤 11시 5분경 데모대의 포위 압축으로 도청건물이 위태롭게 되자 외곽지역에서는 다시 한번 공포탄, 신호탄 소리와 M16 총성이 콩 볶듯 울려 퍼졌고 도청 분수대 앞에는 2개 대대 병력의 특전단이 투입돼 최후의 저지선을 폈다. 자정이 넘어서도 데모대의 함성과 치솟는 불길이 시내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으며 도청에는 동성동 파출소 등 데모대들에게 점거당한 관광서 등에서 걸려오는 마지막 전화가 계속되었다. 이날 밤새 계속된 시 전역의 시민 시위로 광주시 전역은 교통 행정의 활동이 모두 중지되어 행정마비 상태의 무정부상태로 빠져 들었다. 사망자수는 확인되지 않으나 수십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참가한 군중들은 7만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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