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하게 이죽거리며 두 손을 양주머니에 넣고서
뒷목을 무릎으로 8분 10초동안 짓눌려 죽었는데
‘만약에 그가 백인이였더라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요!”(I can’t breathe) 미네아폴리스에서 지난 5월 25일 발생한 백인 경찰 데릭 쇼빈(44, Derek Chauvin)의 가혹수사 행위로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46, George Floyd)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만약 플로이드가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다면 그 백인 경찰이 백인을 땅 바닥에 꼬라박고 무릎으로 목을 8분10초간이나 짓누룰 수가 있었을까? ‘숨을 쉴수가 없어요’는 아메리카 땅에서 백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리고 온 이래, 흑인들이 지금까지 느끼며 살아온 심정과도 같다. ‘플로이드’ 사건은 당연히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시위는 미네아폴리스를 넘어 LA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정당한 시위가 폭동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정의’(Justice)가 실종되고 말았다. LA에서의 시위가 방화, 약탈로 이어지면서 28년 전 4‧29 폭동 이후 처음으로 지난 31일 주방위군이 출동하고 통금령도 실시됐다. 한인들은 코로나 19 와중에 4‧29 폭동의 악몽이 또다시 닥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워싱턴포스트(WP)의 ‘치명적인 공권력(fatal force)’이란 데이터 베이스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년 약 1,000명 정도가 경찰에 의해 살해된다. 2015년 부터 2019년 현재까지 5년간 경찰에 의해 총 4,388명이 살해됐다. 이 중에서 여성이 204명이며, 남성이 4,184명이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2019년에 1,014명, 2018년엔 992명, 2017년엔 980명, 2016년 962명, 2015년 994명 등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숫자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찰에 의한 사망 사고가 매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인종분포를 보면 백인이 61%, 히스패닉 18%, 흑인 13%, 기타 9%인데, 경찰에 의해 살해된 인종을 보면 백인이 50%, 흑인이 26%, 히스패닉 19%, 기타 5%로 흑인이 다른 인종에 비해 거의 갑절이나 높았다. 비무장 시민이 경찰에 살해되는 경우는 백인 42%, 흑인이 36%, 히스패닉 18%, 기타 4%로 흑인이 월등히 높다.
이는 흑인이 가장 많이 표적이 됐다는 의미다. WP가 확보한 총격 사망 사건을 일으킨 경찰 453명의 근무 연수를 보면, 만 2년 미만의 ‘신참’은 19%에 그쳤으나, 3∼10년차와 11년차 이상이 각각 40%와 41%에 달해, 대체로 ‘베테랑’ 경찰의 총기사고가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LAPD경찰들이 몰고 다니는 순찰차에는 “To Protect and to Serve”(시민을 보호하고 시민들을 도와준다.)라는 표어가 있다. LAPD의 그 표어처럼, 미국에서 경찰은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한다는 사명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으며, 심지어 청소년들은 경찰을 ‘롤 모델’로 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같은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가 날이 갈 수록 퇴색되어 가고 있다. 미국에서 경찰 공권력에 적법성을 판단할 때 미국 법원은 ‘상황의 위험성에 관한 경찰의 주관적 판단’을 최우선 적으로 고려한다. 미국인들에게 총기 소유가 법적으로 허용된 사회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은 있을지도 모를 총기에 의한 공격 위험에 노출돼 있는 특수한 상황을 사법기관이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1000명 주민이 경찰 손에 사망
미국에선 경찰이 혹여 범법자를 검거하다 사망케 하든가, 다치게 해도 책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경찰이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판단하면 면책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나, 법정에서 배심원들도 경찰편을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바람에 미국의 경찰 공권력은 무소불위로 변했다. 이처럼 너무나 과도한 권력때문에 경찰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게 미국 경찰 공권력의 현주소다. 최근들어 경찰의 공권력이나 정부의 공권력에 대하여 시민들이 크게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유난히 경찰 손에 사망하는 흑인이 많다. 지난 2014년 미국을 뒤흔들 정도로 극심한 인종 갈등을 불러온 ‘퍼거슨’ 사태의 주인공 마이클 브라운, 경찰 목조르기로 사망한 에릭 가너, 장난감 총을 들고 있다 출동한 경찰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12살 흑인 소년 타미 라이스 등. 지난 2014년 한해 동안에만도 경찰관 손에 죽임을 당한 숫자가 1100명으로 하루에 3명 꼴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처럼 경찰과 흑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데는 이유가 있다. 경찰들이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제로 톨로런스(Zero Tolerance)와 프라버블 코즈(Probable Cause‧상당한 근거) 정책 때문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루디 줄리아니와 그의 뒤를 이은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범죄에 대한 무관용을 강조한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s)’ 정책을 통해 범죄율을 크게 낮췄다. 빌딩 유리창 하나만 깨져도 그 빌딩 앞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유리창을 깨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되고 결국 다른 유리창도 모두 깨진다는 것이 깨진 유리창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범죄에 적용해 아무리 경미한 범죄라도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됐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게 무관용 정책의 골자다. 때문에 노상방뇨, 무단승차 등 미미한 범죄를 저질러도 전과자가 되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더 나아가 아예 범죄 예방을 위해 범죄 혐의에 대한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주관적 판단만으로 경찰이 불심검문 (stop & frisk)을 하고 인신구속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더 큰 문제는 경찰들이 상당한 근거와 무관용 원칙 적용대상을 흑인 등 유색인종에 집중하고 있다 는 점이다. 여기에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범죄가 많고 그래서 흑인 범죄 성향이 높다는 편견이 자리한다. 흑인이라는 것만으로 중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백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빈한한 흑인 밀집지역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흑인을 낙인찍고 표적단속에 나서는 것은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4~54세 흑인 6명 중 1명 이상은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강압적 국가공권력 인정으로 인간성 상실
미국은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투쟁을 벌리면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당시 흑인노예제도는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그후 100여년 간 아메리카 땅에서 존재하였다. 1868년에야 미국 의회는 수정헌법 제14조를 신설하여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고 “어떠한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한 수정헌법이 나온지도 150여년이 흘렀다. 오늘날 흑인이 진정 ‘법의 평등 한 보호’를 받고 있는가? 이번 미네아폴리스에서 발생한 비무장 흑인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야기된 시위 사태는 한 인간의 생명이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 당했다는 점에 대한 분노와 함께, 오늘날 미국이 처한 환경이 과연 타당한 공권력이 행사되고 있느냐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인종 문제는 흑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번 플로이드의 죽음이 흑인에게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경찰이라는 국가 공권력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상실하고 이런 강압적 폭력을 사용하도록 국가 사법적 체계에서 제재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도재체 미국이 왜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세계 최강의 나라인 미국이 코로나 19로 최악의 사태를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도 함께 분출된 것이다.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에서 완전 실패로 무능력한 정부를 보여주어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경찰이 시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이 경찰의 폭력에 두려워 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경찰의 잘못된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 4년의 외교는 대외적으로 미국이 더이상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특히 UN이나 국제사회에서 최강의 리더십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로 추락하는 현실이다. 이제는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중국에게 밀리는 처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으로는 빈부 격차는 역사적으로 최악인 현실에서, 코로나 19의 재난이 닥치면서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을 기록하는 지경에서, 경찰에 의해 무방비 시민 플로이드가 정당한 권리를 박탈 당한채 죽음이라는 결과에 그동안 시민들이 불만으로 쌓였던 정부의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라는 화약고에 기름을 부은 것이 이번 사태의 발단이다.
트럼프, ‘시위대는 폭도’ 규정에 시위 확산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게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면서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등 인종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또 이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의시위에 대해 “수천명의 중무장한 군인, 경찰, 법 집행관들을 배치해 질서를 잡겠다”면서 대통령의 특권을 총동원해 무법적인 시위를 종식시키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전국의 주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 시위에 강경 대응을 하라고 주문하며 연방정부가 ‘군대동원’ 등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같은 입장은 코로나바이러스 19 사태 때는 의료장비 부족사태 등에 대한 주지사들의 지원 요청에 대해선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편 미네아폴리스에서 발생한 백인 경찰 데릭 쇼빈 등 소속 경찰 4명이 한 명의 흑인 용의자 플로이드를 과잉단속하는 과정이 비디오에 찍혀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한 것은, 1992년 LA 폭동의 도화선이 된 백인 경찰 4명이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을 과도하게 다루는 과정이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게 한 것을 연상케 하고 있다.
당시 4‧29 폭동에서는 한인사회가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1세기가 넘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최대 수난으로 기록되는 4‧29 폭동은,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한인이면 한 번쯤 생각하는 주제 이다. 4‧29폭동 당시 부시 대통령이 LA를 방문했다. 당시 한인들은 다운타운 부시 대통령 숙소인 보나벤추어 호텔에 달려가 데모를 벌였다. 시위대의 한 여성은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나라 전쟁에도 즉각 출동하면서 왜 우리 코리아타운 보호에는 늑장을 부렸는가?”라고 항변했다. 4‧29 폭동 후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은 미국 정치인들이나 한국의 정치인들이 부리나케 찾아온 지역이 되어버렸다. 마치 관광지로 된 것 같은 지역이었다. 4‧29 폭동때 폭도들에 의해 불타버리고 파괴된 한인 업소만도 2천개가 넘었다. 그당시 LA 카운티 세리프 셔만 블록(Sherman Block)국장과 LA지역 FBI 국장은 한인사회에 대하여 한인 업소를 공격한 폭도들을 인권 위반 혐의로 전원 기소하겠다고 공언하고서는 한 명도 기소하지 않았다. 왜 이런 수모를 한인사회가 당해야만 했는지 그 진상을 알아야 하고, 용서는 하되 그 교훈은 절대로 잊지는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다. 100여년 전 이땅의 한인 선조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던 그 정체성을 우리가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폭동에서도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4‧29 폭동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