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6‧25 전쟁 70주년 ‘참전용사 아들의 꿈이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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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에서…기억하는 전쟁으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합니다”

조각상2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

“우리국가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라는 부름에 응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우리는 경의를 표합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The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관은 링컨 기념관의 남동쪽에 있는 웨스트 포토 맥공원(West Potomac Park)에 있으며 한국전에서의 희생 군인을 기리기 위해 총 1700만 달러를 들여 1995년 7월 27일에 건립되었다. 가장 먼저 보이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덤불 사이에 서 있는 19개의 미군 동상이다. 한국의 거친 지형을 상징하는 화강암과 향나무 수풀 사이에 전투 장비를 갖추고 있는 미군의 모습인데,육군(14명), 해병(3명), 해군(1명), 공군(1명) 19명으로 소대 병력을 대표하고 있다. 동상이 서 있는 삼각형 모양의 지대는 직경 9m ‘기억의 연못’ (The Pool of Remembrance)이 있고, 풀장을 가로지르는 대리석에는 참전용사의 희생이 새겨져 있다. 전사자 54,246명, 부상자 103,284명, 포로 7,140명, 실종자 8,177명이다. 한국을 도왔던 유엔의 22개 회원국의 희생 또한 함께 새겨져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Freedom Is Not Free)로 상징된 ‘한국전쟁 참전 용사기념관’이 탄생한 배경을 아는 이는 아주 드물다. 한국전은 오랜동안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으로 알려져 왔는데, “기억하는 전쟁”(Memorial War)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한 참전용사의 아들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조각상한국전에 참전해 실종이 된 미해병 조종사 아서 도널드 드레이시(Arthur Donald DeLacy)는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기억은 1995년 7월 27일 워싱턴 DC에 건립된 ‘한국전참전용사기념관’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아서 드레이시는 어린 시절부터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꿈이었다. 시카고의 레인테크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때가 1948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3년이 지났을 때다. 해병대에서 전투기 조종사가 된 드레이시 중위는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1951년 가을, 그는 한국 전선에 배치됐다. 그가 도착했을 때 한국전쟁의 막바지 대전투의 하나로 알려진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고지전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휴전 회담에 응하지 않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연합군과 국군은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의 험란한 고지들은 하나 하나 점령해 나갈 때였다. 51년 10월 7일, 드레이시 중위가 속한 해병대 323 항공 중대의 임무 중 하나는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었다.

미F-4U 코르세르 전투기 4대가 목표 지역 상공에 접근하자 드레이시의 전투기가 피격되면서, 그는 UN 연합군과 공산군 사이의 구릉지역에 낙하산과 함께 추락했다. 당시 해병대 헬기 조종사인 에드워드 바커 소령이 드레이시 중위 구출작전에 자원해 15분 만에 현장에 출동했다. 그는 추락한 동료 드레이시 중위가 적진에서 날라오는 사격으로 꼼짝없이 여우굴에 갇힌 모습을 발견했다. 헬기가 근처 상공에서 구조선을 내렸으나 수없이 날라오는 적들의 사격에 추락한 드레이시는 구조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구조 헬기 조종사 바커 소령은 끊임없는 적군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드레이시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 두번이나 더 선회 비행을 감행했으나 허사였다. 다시 바커 소령이 네번째 구조 비행에 나섰으나 여우굴은 텅 비었다. 이후 지상에 있던 미육군 1사단 소속 병력이 추락한 조종사 드레이시 수색에 나섰으나 적의 포화에 밀려 후퇴했다. 그리고 드레이시 조종사는 영원히 사라졌다.

‘비운의 구출작전’에 사라진 조종사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지 몇 달 뒤인 1954년 3월 8일에 시카고의 드레이시 중위의 집에 한 장의 전보가 날라 들었다. 드레이시의 여동생 바바라 하인리히는 그날 어머니가 오빠의 전사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오빠가 한국전선에서 실종된 지 2년 반이나 지난 다음에 날라든 고통의 소식이었다.(보통 실종자(MIA)로 된 군인이 2년 이상 확인에 결과가 없으면 잠정 전사로 추정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전보를 받은 어머니는 그후 딸 바바라에게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은채 1979년 사망했다. 이렇게 드레이시는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8,000명 이상의 미군 중 한 명이 되었다. 드레이시 조종사의 사촌 여동생인 오메라의 아들 마크는 자라면서 가족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삼촌에 대해서 가끔 듣게 됐다. 그리고 자신의 집안의 족보에 대해서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오랫 동안 자신의 삼촌 드레이시 중위의 존재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한국전쟁에서 구조 헬기의 조종사였던 에드워드 바커 소령은 전쟁에서 살아 남았고 은성무공 훈장을 받고 중령으로 예편했다. 많은 참전용사들처럼, 그도 한국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결코 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과도 전쟁 경험에 대하여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내 아들 할 바커(Hal Barker)는 유독 가족사에 관심이 많고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전쟁에 대해서 알려고 했다. 한사코 한국전쟁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더이상 듣기가 힘들어, 아들 할 바커는 1979년에 미해병대 사령부에 편지를 써서 “우리 아버지가 받은 은성무공 훈장의 공적서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가 받아본 아버지의 훈장 내용에서 추락한 동료 조종사 아트 드레이시 중위의 존재와 4차례 구조활동의 실패 그리고 구조 당시 적의 총탄이 아버지의 헬리콥터를 강타한 것 등 등을 읽었다.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을 기억하기 싫어해

3년 후, 할 바커는 어렵게 아버지에게 추락한 조종사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한국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런 표정의 예비역 조종사는 추락한 드레이시가 누워있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딱 네 마디로 요약했다. “나는 그를 구조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추락해 실종당한 드레이시 중위에 관심을 보인 할 바커는 당시 “단장의 능선” 고지전에 참가한 미육군 제 2사단 소속 제 23보병연대에 연락했다. 한국전 당시 23보병연대는 8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단장의 능선’을 점령했던 부대이다. 할 바커는 1982년에 뉴욕 포트워싱턴에서 열린 제 23보병연대 전우회 모임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는 군대에 가고 싶었으나 두번이나 시력 검사에서 떨어져 입대를 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전공은 역사학이었고 카펜터로 노동도 하고 글도 쓰고 기자로도 활동했다.

전우회 모임에서 당시 ‘단장의 능선’ 전투에 참가한 참전용사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그는 당시 추락한 조종사와 헬리콥터 구조 활동을 본 기억이 있는 용사들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그당시 기억을 알려주었다. 몇몇은 추락한 조종사와 단지 200야드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당시 머리 위로 급히 달려온 구조 헬기에 대해서 떠올렸고, 또 다른 사람은 적군이 쏜 총탄이 헬기 에 맞아 파편이 날아가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헬리콥터가 기지로 날아 갔을 때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고 했다. 당시 현장에서 전투 중인 수백명의 미군들은 그때 구조 작전이 성공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 해 1982년 말부터, 할 바커는 추락한 드레이시 중위의 가족이나 친척을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그는 드레이시의 모교 레인 테크 고교를 위시하여 시카고 역사학회, 일간신문 시카고 트리뷴지, 시카고 천주교 대교구(드레이시 가족이 천주교 신자)는 물론 상담 코너 ‘디어 애비’까지 모든 사람들과 접촉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돕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정보를 알으켜 주었다.

아버지가 구출 못한 조종사에게 관심

이런 과정을 통해 할 바커는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잊으려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어버린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깊히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할 바커는 참전용사들의 모임을 통해서 얻은 결론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해 워싱턴 DC에다 한국전쟁참전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추락한 조종사 드레이시를 한국전쟁을 기억해야하는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우려는 할 바커에게 드레이시는 아이콘이 되었다. 할 바커는 “미해병대에서 그에 관하여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는 사실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된 한 생명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영원히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구축한 Korean War Project 웹사이트를 ‘아트 도널드 드레이시 중위를 추모하는’ 사이트라고 밝혔다. 할 바커는 1984년 12월 연방기관인 미국전사기념물위원회(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의 지지를 받아 한국전참전기념관신탁기금(Korean War Memorial Trust Fund)을 설립 했다. 그와 필라델피아 출신의 친구이자 참전용사인 빌 템플과 함께 첫 번째 기부를 했으며, 할 바커는 드레이시의 이름으로 10달러를 기부했다. 이것이 나중 1995년 7월 27일 건립된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관의 총 건립 기금 1,700만 달러의 모태가 된 것이다.

▲ 인기배우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기념비 건립에 의회 중진들에게 협조 서신을 띄웠다.

▲ 인기배우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기념비 건립에 의회 중진들에게 협조 서신을 띄웠다.

기념관 건립은 정부 당국의 인가 사항이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국회의 의결을 받아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30년 이상 지나서 기념관을 건립하는 사항에 당시 의회, 특히 연방 상원에서는 기념관 건립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법안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1986년 영화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의 감독과 주연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운명적으로 나타났다. 그 영화에서 클린트는 노해병 용사를 맡았다. 인기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명칭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에 할 바커는 영화에서 해병 용사로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연락해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 즉, ‘단장의 능선’은 영화 타이틀에 해병대 보다는 미육군 2사단의 노력이 더 컸다고 설명했다. 이를 계기로 할 바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 각본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는 픽션이고 한국전쟁과는 관련이 없고 단지 노해병의 무용담을 담는 코미디 물”이라면서 “도대체 당신이 왜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에 관심을 두는가?”라고 하여 할 바커는 해병 조종사 드레이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고, 이어 한국전쟁을 알리기 위해 기념관 건립법안을 냈는데 의회에서 협조를 안한다는 점을 상기 시켰다. 그랬더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내가 상원 담당 위원장에 협조를 구하겠다. 대통령에게도 부탁하겠다”고했으며 실제로 상원의 월롭 의원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보내왔다. 놀랍게도 불과 며칠 후 이 한국전참전기념관 건립 법안은 월롭 상원 소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일사천리 법안 통과와 대통령의 서명

이어 1986년 10월 28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관 건립법안에 서명했다. 기념관이 건립이 진행되는 1989년 2월 할 바커는 한국 정부로부터 비무장 지대에 깊숙이 자리 잡은 ‘단장의 능선’을 방문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그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931 고지에 서서 조종사 드레이시가 격추된 곳을 바라 보았다. 그를 안내하던 한국군 장교 한 명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순직한 미군 조종사 드레이시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이나 감동하면서 할 바커 에게 불교 염주를 주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드레이시 가족에게 명복을 빈다며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1995년 7월 27일 한국전휴전기념일에 워싱턴 DC 링컨 대통령 좌상이 굽어 보는 정원 자리에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관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빌 클리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 수만여명의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됐다. 이 제막식에 비록 VIP석에는 초청을 받지 못했으나, 할 바커는 수많은 참전용사들과 함께 서서 먼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드레이시 중위의 모습을 그리며 주머니 속의 염주를 굴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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