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특집 최종편 아직도 동토의 땅에 8만명의 국군포로의 원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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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포로문제에 대하여 아주 간단 명료하게 입장을 밝힙니다. 우리 미국 군인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 어떠환 상황이더라도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이 군통수권자 로서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합중국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버락 오마바 미국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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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특집 최종편
아직도 동토의 땅에 8만명의 국군포로의 원한이

생사조차 모르는데 국립묘지엔 위패까지…

‘역사의 조난자’가 된 ‘6‧25 영웅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됐는데 3년 전쟁이 1953년 7월 포로27일 휴전협정으로 일단 총성이 멎었다. 양측의 포로교환도 끝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1994년 10월 23일 서해바다 쪽선에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가 탈북자로 나타났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북쪽에서 탈출한 최초의 국군 포로였던 것이다. 포로가 된지 43년만에 탈출한 그는 “북한에 아직도 나와같은 국군 포로들이 많이 있다”라고 폭로했다. 모두가 잊고 있었던 6‧25 전쟁의 국군 포로의 문제가 처음 조명을 받게됐다. 그때까지 그는 대한민국 국방부 기록에는 ‘전사자’로 적혔으며, 국립묘지에는 그의 이름으로 위패까지 있었다. 이처럼 국군 포로는 ‘역사의 조난자’가 된 것이다. 한국의 역대 정권은 국군 포로 송환에 대하여 방치 내지 유기시킨 상태로 일관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올해 대한민국 법정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소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백두혈통’의 불법행위가 대한민국 법정에서 심판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국군포로들이 전쟁이 끝나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 땅에서 불법적인 강제노역에 대해 손해배상하라는 한국 법원 판결이 지난 7일 처음 나왔다. 이 재판은 탈북 국군 포로에 의해서 제기된 소송에 대하여 대한민국 사법부가 북한 정권과 최고 통치자를 대한민국 법정에서 죄과를 물은 최초의 판결이었다. 국내에서 김정은을 상대로 열린 역사상 첫 재판이었는데 향후 유사한 소송(납북자, 천안함 피해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중앙지법 민사47 단독 김영아 부장판사는 지난 7일 오후 2시 국군포로 출신 노사홍(91)씨와 한재복(86)씨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원(미화 약 15,000 달러)씩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판결에 승소를 가져오게 만든 8명의 변호인단은 대한민국 법정에서 논의된 적이 없는 법이론을 개발했으며, 국제법 원리를 도입하여 정의를 실현한 최초의 판결이란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WSJ)을 포함해 AP, AFP통신 BBC방송 등 주요 외신들도 즉각 주요 뉴스로 국군포로 승소 내용을 보도했다. 휴전 협정으로 국군 포로들이 다 돌아온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사에서 포로들이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하고 가혹한 학대와 온갖 차별로 수십년간 적국(북한)에 억류당하다가 고향을 그리며 죽어간 포로들이 바로 수만여명의 한국 전쟁 국군 포로였다. 한국전쟁에서 휴전협상 때 가장 논란을 벌인 사항이 포로에 관한 것이었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면 양측 포로들은 전원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고, 포로에 대하여는 인도적 조치를 취하고 강제노역 등은 국제법상 금지된 사안이었다. 남북한 모두 제네바 협정을 준수한다고 국제적으로 비준한 나라들이다. 북한은 휴전협정 직전에 회담장에 내논 보고서에서 자신들이 UN군 포로(한국군 포함)수를 92,070명을 수용 중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협정 체결후 송환시킨 UN군 포로는 13,444명으로 미군이 3,746명, 영국 및 기타 국 1,377명 그리고 국군포로 8,321명으로 돌아오지 못한 포로가 78,633명으로 대부분이 국군 포로들이다. 그러면 이들 약 8만 여명의 국군포로들은 왜 못돌아 왔는가?

94년 북한 탈출 조창호 소위 참상 폭로

1994년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탈출 경위를 발표하는 TV 중계 프로가 당시 미국 동포사회에서도 방영됐다. 미국에서 이 프로를 시청하고 있던 참전용사 정용봉 박사(뱅크 오브 호프의 전신 BBCN뱅크 이사장)는 그의 저서 “메아리 없는 종소리”(2015년 출간, 부제: 국군 포로들은 왜 못돌아 오는가?) 머릿말에 이런 글을 적었다. <1994년 어느날, 늘 바쁘기만한 미국생활 속에서 한국어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  ‘국군포로는 돌려보내지 말라’ 는 구소련 외교문서들.

▲ ‘국군포로는 돌려보내지 말라’ 는 구소련 외교문서들.

데 조금 기이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40여년만에 조국의 땅 대한민국으로 탈출한 조창호씨의 이야기였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필자는 정전협정에서 양측이 수용했던 포로들을 각자의 의사에 딸 모두 돌려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북한에 아직도 많은 국군 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다니 이것이 무슨 기괴한 소리인가!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많은 국군 포로들 중에는 나와 함께 전투하다 실종된 내 부하들, 특히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었던 연락병, 그리고 친형제 보다 더 아꼈던 고향 친구들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떠올랐다.>

참전 용사인 정 박사 자신도 휴전협정으로 6‧25 전쟁 포로들이 다 해결된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정 박사는 2004년 사재를 털어 LA에 ‘국군포로 송환위원회’를 조직하고 국군 포로들의 진상과 실상을 추적하고 미국과 한국에서 국군 포로 문제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무엇보다 2004년 4월 22일 그는 탈북 국군 포로 조창호씨를 미국에 초청하여 워싱턴 DC 연방 의사당에서 수잔 솔티 여사(제1회 서울 평화상 수상자)가 이끄는 미국의 디펜스포럼 재단의 후원을 받아 ‘한국전쟁 국군 포로의 증언’ 포럼을 개최하여 역사상 최초로 미국 조야에 한국전쟁 포로의 실태에 대하여 고발 증언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 자리에는 나중에 연방하원의 외교위원장이 되어 국군포로 송환, 납북자 송환, 워안부 결의안을 도운 에드 로이스 전의원을 비롯해 한국전 유엔 참전국 주미대사관 무관 등이 참석 했는데 이들은 “어떻게 포로들을 수십년간 억류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는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같은 국군포로 포럼을 계기로 미의회에서 국군포로 문제와 납북자 문제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고,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결의안도 두 건이나 통과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정 박사는 ‘국군포로 송환위원회’의 명의로 2011년 4월 7일자로 한국전쟁 국군포로 송환을 위한 UN인권위원회에 장문의 보고서와 함께 건의서를 제출했으며, 또한 국군포로를 송환하지 않고 강제 억류하여 불법적인 학대와 차별을 가한 북한 정권과 통치자를 국제형사법정(ICC)에 최초로 고발했다. 지난 7일 한국 법정에서의 국군포로 소송에 정 박사가 유엔과 ICC에 제소한 문건을 국제법 상 포로 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참고케 하는데 자료로 사용토록 물망초와 서울 국군포로 송환위원회에 제공됐다.

국군포로송환 문제 미의회에서 제기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한국전 휴전협정에 포로 송환 조건은 ‘자발적인 의사’(Voluntary Repatriation)이었다. 말하자면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시킨다는 것이다. 원래 휴전회담에서 북한과 중공측은 양측 포로 전원을 송환시키자고 조건을 걸었는데 UN 측은 이를 포로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맡기자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군은 서울 등 점령지역에서 남성들을 잡아 그들의 인민군에 편입시켰고, 또 일부 국군 포로를 초기에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이 나중 UN군에 의해 포로가 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됐다. 이들은 원래 북한군이 아니기에 포로교환으로 북한으로 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UN군이 관할하던 포로 수용소에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가 서로 나뉘어 그 안에서 서로간에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 이같은 사정을 알고 있는 유엔군은 포로 협상에서 휴전감시 위원회(인도, 체코, 폴란드, 네델란드, 스위스)에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타진케 하자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발적인 의사’ 조건이 포로교환 조건이 됐지만 북한은 이를 역이용 했고, 유엔 측은 역이용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남쪽에 있던 반공포로들은 북쪽으로 끌려가지 않게 되었으나, 북쪽에 있던 국군포로들은 ‘돌아 오지 못하는 포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중립국 위원들이 북쪽에 가서 국군포로들의 의사를 타진하려 했으나 북쪽 대표단의 이상

▲ 탈북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소위

▲ 탈북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소위

조 부대표가 ‘정전협상을 안하면 안했지 간첩질 하러 들어오는 중립국 휴전감시단의 북한내 국군포로 면담을 한사코 반대해 ‘자발적 의사’ 타진이 되지 못했다. 사실 북한으로서 포로들을 재교육시켜 인민군에 재입대 시킨 것을 비롯, 전체 국군포로들을 북한 각지에 흩어저 있는 광산 등지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던 차라 이 모든 것이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휴전감시 중립국 위원회가 구성한 국제적십자위원(ICRC)들에게 직접 국군포로 당사자들과 면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국군 포로들이 ‘자발적인 의사’로 남쪽으로 가기 원치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8만여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들을 송환시키지 않고 불과 10% 정도인 8,321명만 다른 유엔군 포로들과 함께 남쪽으로 송환시켰다. 정용봉 박사의 ‘메아리 없는 종소리’에는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씨와 그 이후로 탈북한 십여명의 국군포로들과 직접 만난 증언을 수록했는데 이들 국군포로들은 ‘북한에 억류 당시 휴전회담이 진행됐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고 더더구나 포로 교환 조건으로 ‘자발적인 의사’를 타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소련이 2차대전때 독일군 포로를 억류해 전후시설 복구에 부려먹다가 나중에 돌려 보냈고, 극동에서는 일본군 포로를 시베리야 개발에 강제 노역 시켰다가 5년 후에야 생존자들을 돌려보낸 것처럼, 국군 포로를 전후 복구를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시켰고 나중에는 공민권 부여라는 명분으로 강제결혼으로 아예 ‘우리에게는 국군포로가 없다’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 ‘우리에게는 국군포로가 없다’ 거짓말

국군 포로에 대한 북한의 거짓행위는 조창호 탈북사건 이후로 80여 명의 탈북 국군 포로들이 북한의 야만적인 포로 학대 사실을 폭로해도 계속 부인하고 있는데 결정적으로 그들의 국군포로 학대라는 인권유린은 구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되면서 공개되기 시작한 구소련 기밀문서들에 의해 북한의 김일성이 어떻게 국군포로들을 송환시키지 않은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러시아가 공개한 구소련 외교문서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지원한 소련 당국의 외교관, 군사 관계자들이 본국 정부에 보고한 내용 중 북한과 중공군이 많은 국군 포로를 송환시키지 않고 억류했다는 자료가 그대로 남겨져 있다. 정용봉 박사는 국군포로 송환위원회의 부회장인 민병수 변호사와 위원회 특별 법률고문 김한회 변호사 그리고 노현정 인턴 등으로 구성된 팀을 통해 구소련 외교문서를 분석 연구해 자신의 저서 ‘메아리 없는 종소리’에 수록했다. 국군포로 억류에 대한 자료는 1953년 12월 2일자 소련 외무성 특명전권 대사 니콜라이 페도렌코 (Nikolai Fedo-renko)로부터 외상 모로토브 (Vya-cheslav Molotov)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잘 나타났다. 이 비망록은 수즈달레브(su-zdaleva )북한주재 소련대사로부터 보고서에 기초하여 입안된 것으로, <남한으로 송환되어야 하는 이승만 군대(남한군) 포로 13,904명과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었다가 포로가 된 6,430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으며, 그 이외에도, 많은 포로들이 내무성과 철도부내 여러 부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군대에서 복무하지 않았던 남한에서 징발된 42,262명의 노역자(납북자)들도 북한에 수용되어 있었다.>

한편 북한의 김일성은 베이징에 체류하는 동안, 중공 주석 마오 쩌 둥(모택동)과 전쟁포로 처리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마오 쩌 둥은 국군포로들을 남한으로 보내져서는 않된다고 말하였으며, 그러한 포로 이송의 지연이 미국 측에게 북한-중공 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고 비난할 수 있는 구실을 줄 수 있었지만, 김일성도 마오 쩌 둥 의견에 동의 하였다. 김일성은 수즈달레브 소련 대사에게 북한정부는 수용하고 있는 포로들을 북한 전 지역에 걸쳐서 분산시킨 것이며, 남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포로들을 정전협정 중립국 감시위원단과 접촉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페도렌코는 그의 비망록의 결론에서 “우리들은 이 상황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조치라도 채택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국군포로 억류는 제네바 협정위반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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