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민사에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들: 안수산여 이광덕 목사

이 뉴스를 공유하기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도산의 딸은 도산이 걸어간 길을 가고자 했다. 도산의 유산을 이어 받아 인종차별이 극심한 사회에서 남성 보다 더 강인한 정신으로 미해군과 국가안보 분야에서 기여해 미국정부가 “아메리카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고인의 별세 5년만에 영예이다. 한편 7월 8일에는 지난 50여년간  LA한인타운에서 한국문화회관을 통해 문화 선교로 일생을 헌신한 이광덕 목사가 소천했다. 후손들에게 우리의 훌륭한 문화를 전해 정체성을 심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몸소 실천한 목자였다.
————————————————————————————————————————————–

안수산 여사

미 국무부, 안수산 여사 ‘미국의 영웅’ 선정

‘ShareAmerica’에서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수잔 안 커디’(Susan Ahn Cuddy,한국명 안수산)가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쉐어 아메리카’(ShareAmerica)에서 7월 2일 ‘미국의 영웅’(American Hero)으로 소개됐다. 재미한국인이 국무부 웹사이트 ‘쉐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영웅”(American Hero)로 소개되기는 아마도 안수산 여사가 처음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안 여사의 생애가 미국 역사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 국방부 역사에 자랑스런 소수민족이 바로 코리안이다.

미군 내 최초의 여성 포격술 해군 장교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포격술 여성 장교가 바로 안수산 여사다. 그는 아시안인으로 미해군에 최초로 입대한 여성이었다. 그가 복무한 시절이 1942년부터 1946년까지는 아직도 미국내에서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할 때였는데 미해군에서 여성 장교로 백인 남자 장교들에게 공중전 포격술을 가르첬다.안 여사는 해군 복무를 마치고 당시 냉전이 시작됐을 때 백악관 NSA(국가안전국)에서 러시아 담당 암호 해독 분야에서 300여명의 요원들을 총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소수민족 여성으로 해군에서 안 여사를 능가할 소수민족계는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영옥 대령은 미육군에서 일본계로만 구성된 100 대대를 이끌고 유럽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프랑스, 이태리에서 최고훈장을 수여받았고 한국전쟁에서 전공으로 한국에 서도 최고 훈장을 받았다. 미공군에는 프레드 오가 있었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 비행기를 6대를 격추시켜 에이스로 떠올랐다. 이처럼 미군에 소수민족계로 최고의 에이스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중 안 여사는 여성이었기에 더욱 돋보인 존재였다. 쉐어아메리카는 이달 초 ‘아시아계 미국인의 선구자’라고 칭하며 안 여사를 소개하는 동영상을 게시했다. 동영상에는 도산 안창호의 모습도 소개했다. 이 웹사이트는 국무부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해 전 세계적으로 소통하고자 만든 플랫폼으로, ‘미국의 영웅’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미국 사회에 기여한 인물을 소개하는 작업도 해왔다. 쉐어아메리카는 안 여사를 한국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과 헬렌 안의 장녀라고 전안수산하면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이었다고 설명했다. 안 여사가 미군 내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이자 해군에서 중위 계급을 단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이라는 소개도 곁들였다. 쉐어아메리카는 안 여사가 수십 년 군 복무를 하고 은퇴한 후에는 미국의 한인사회를 위한 옹호자로서 활동했다고 밝혔다.한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4월 발표한 포고문에서 아시아‧태평양 미국인의 삶을 조명하면서 안 여사의 삶을 비중있게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이민한 첫 한국인 부부의 딸인 수전 안 커디는 큰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도 강한 노동 윤리와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소명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통해 나라를 드높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미해군 “전설의 아시안 우먼 오피서”

191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안 여사는 최초 미주 한인 2세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불과 11살이던 때 1926년 집을 떠난 아버지 도산과 생이별했다. 도산은 1938년 3월 10일 일제강압 시절 서울에서 옥중에서 받은 고문으로 순국했다. 이 소식을 당시 USC 캠퍼스 옆 교회에서 들었다. 안 여사는 당시 “훌륭한 미국인이 돼라.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를 생각하며 평생 가슴에 간직해 왔다. 그녀는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주립대(CSU샌디에이고)를 졸업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동양인 여성가운데 처음으로 미 해군에 입대했으며, 미해군 역사상 백인계를 제치고 첫 여성 포격술 장교로 복무했다. 안 여사는 해군 정보장교로 재직할 때 사귄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랜시스 커디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필립 커디와 크리스틴 커디이다.

안 여사는 국가 봉사직을 마치고 LA로 돌아와 영화배우로 이름난 오빠 필립 안 등 가족들과 밸리 지역에서 고급 레스토랑 ‘문게이트’를 운영한 안 여사는 1960∼1970년대 도산공원 건립계획이 진행되면서 아버지의 나라 한국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그리고 소장하고 있던 도산 관련 자료들을 기증해 조국의 독립기념 사업을 도왔고, 미국 동포사회 에서도 동포 신문인 신한민보, 흥사단, 3·1 여성동지회 등의 단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해군과 NSA 복무, 동포사회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센터’에서 수여하는 ‘미국용기상’을 한인 최초로 수상했고, 2015년 3월10일에는 LA 카운티가 도산 선생의 순국 77주기를 맞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안 여사는 지난 2015년 6월 24일 100세 일기로 별세했다. 안 여사의 생애는 ‘11살에 헤어진 아버지 도산을 찾아 나선 미국인 딸의 여행’이라고 한국계 전기 작가 존 차는 평가했다. 안 여사는 자신의 저서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한글판 저서를 2003년에 출판해 기념회 등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 “내가 미국에서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던 것은 ‘한국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는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라며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남북이 분단됐는데 너도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여사의 아들 필립 커디 씨는 “어머니는 아시아계로서 자부심을 늘 가져왔고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세계에 뛰어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

이광덕 목사

미국에 ‘한국문화’ 정착시킨 심은 성직자

‘한국문화회관 광장’ (Korean Culture Center Inc. Square) 설립

미주 한인사회에서 1970년대부터 한국문화를 주류사회에 전파시키고, 북한과 중국과의 문화교류에 힘써온 한국문화회관(Korean Cultural Service)의 창설자이자 회장인 이광덕 목사가 지난 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문화회관은 지난 1972년 4월 22일 LA 한인타운에서 우리문화 전통 보급과 민족화합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연방정부인가를 받아 개관했다. 한국문화회관은 한국문화를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비영리단체로 초창기 한때 청와대등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었지만 정치적으로 박해도 받아 한때 잠정 폐쇄 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 으나, 창립자 이광덕 목사와 지지자들의 헌신으로 지난 80-90년대는 미주사회와 중국과 북한 과의 선교 문화교류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 했었다.

72년부터 한국 문화 주류사회 전파 선구자

코리아타운의 태동에 도움이 된 한국문화 회관은 1972년 설립 당시 LA 한인사회에 최초의 문화 회관이었다. 당시 회관에는 5백여명을 수용할 강당과 도서실 오락실 등을 만들어 문화 시설을 개설하여 한인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초창기 중요 사업은 1973년 LA시 주최 아시아 문화축제, 태극기 보급, 74년 한국 소년태권도 시범단 초청 순회, 이방자 여사 초청 한국전통의상 전시, 80년대 해외동포 민족화합 운동, 1985년 연변 조선족 가무단초청, 1890년 연변조선족 소년 예술단 초청 순회공연 등 미주동포사회에 ‘한민족은 하나’라는 감동을 주었다. 그 후 중국 연변대에 도서기증, 하르빈역 안중근 동상건립운동, 안의사 업적연구를 위한 국제 심포지엄 등 사업을 벌였으며, 이어 북한을 방문해 이산가족 만남의 계기 마련하고, 북한 예술품 전시 주선, 사랑의 쌀 보내기 등 사업을 펼쳐왔다.

이광덕 목사는 북한 선교활동 중 지난 1998년 5월말부터 8월말까지 3개월간 북한에서 억류당해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이 목사의 억류 사건은 국내외로 주목을 받았으며, LA타임스 등 미 주류 언론으로부터 집중조명을 받기도 했다. 북측은 이광덕 목사를 3개월간 억류하면서 간첩 혐의 등을 입증하기위해 취조하기는 했으나 고문 등 가혹행위는 없었다

▲ 고 이광덕목사가 생전에 해리슨 도슨 시의원으로부터 광장기념패를 받고 있다.

▲ 고 이광덕목사가 생전에 해리슨 도슨 시의원으로부터 광장기념패를 받고 있다.

고 이 목사는 기독신문에서 밝혔다. “내 잘못을 조목조목 기록한「고백서」를 미리 작성해 가지고 와서 자꾸 읽으라고 해서 여러번 읽어야 했죠. 사진기자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북측은 내가 스스로 죄를 자인하도록 선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이광덕 목사가 3개월간 억류된 곳은 라진시 한 호텔. 이곳의 한 객실에서 이 목사는 하루 3끼와 잠자리를 해결 했다. 밥과 반찬은 소위 이밥(쌀밥)과 고깃국 감자국 등. 이른바 북측의 최고 대접인 셈이다. 그러나 이 목사는 석방된 후 3개월간의 호텔비 식사비 병원비로 무려 4000불을 지불하게 되어 그 댓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 목사가 묵은 호텔은 시설은 좋았지만 더운 물은 없었다. 이 목사는 호텔에서 평상시 파자마 차림으로 생활했다. 북측은 억류 한달 반이 지나자 이발사를 불러 이발을 시키기도 했다. “이발한지 얼마 안돼서 스웨덴 대사와의 면담이 있더군요. 또 석방 10일전쯤 호텔옥상에서 하루 2시간의 일광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염색까지 해 주데요. 저는 싫다고 했는데 북측은 들어 올 때 까만 머리가 하얀 상태가 돼서 나가게 되면 안된다구 하더군요” 북측이 3개월 억류기간 중 이 목사의 건강상태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 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일광욕을 너무해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다. 한편 석방되어 미국에 돌아온 이광덕 목사는 비롯 3개월간 억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선교적 차원에서 북한에 들어간 것”이라며 앞으로도 하나님 뜻이면 “다시 북한에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덕 목사는 라진고려식품합영회사 대표자격으로 북한의 경제특구인 라진선봉에 위치한 국수공장의 노후설비 교체 및 장공장 설립 등을 목적으로 방북 했었다.

북의 동포 아우르는 성직자로서의 삶

한국문화회관은 2000년 이후로는 주로 미 주류사회와의 연결로 커뮤니티 발전 사업에 관심을 두었다. LA시의회는 지난 2015년 10월 24일 한국문화회관이 자리잡은 버몬트 애비뉴와 24가 교차로에서 ‘한국문화회관 광장’(Korean Cu-lture Center Inc. Square) 현판식을 거행했다. 이는 LA시 165년 역사에서, 그리고 미주한인 이민 135년 역사에서 한인단체 이름으로 기념 광장이 선포 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현판식에서 LA시의회 제8지구 마키스 해리스-도슨(CD-8 Marqueece Harris-Dawson) 시의원이 LA시를 대표해 현판식을 주재했다. LA시의회는 2015년 9월11일 한국문화 회관 (Korean Culture Center,Inc. 1359 W. 24 th Street Los Angeles, CA)이 소재한 버몬트 애비뉴와 24가 일대를 ‘한국문화회관 광장’ (Korean Culture Center Square)으로 명명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다. 이는 1972년에 이 지역에서 창설된 한국문화회관이 초창기 ‘코리아타운’ 태동에 산파역은 물론, 한인사회와 LA시에서 역사 문화 예술 발전에 공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인 ‘한국문화회관 광장’ 탄생에는 6명의 전현직 LA시의원들이 나섰다. 우선 현재 8지구 마키스 해리스-도슨 시의원이 정식으로 동의안을 제안했으며 이에 6지구 누리 마티네즈 시의원 (CD-6, Nury Martinez)이 제청으로 안건이 상정되어,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 안건 심의 담당 분과위원장으로 조 부스카이노 시의원(CD-15, Joe Bu-scaino)이 지지를 표명했다. ‘한국문화회관 광장’ 제안은 원래 전임 8지구 버나드 팍스 시의원(Bernard C. Parks )이 제의를 했으며, 그 이전에 8지구 시의원을 지냈던 마크 리들리-토마스 수퍼바이저(Supervisor Mark Ridley-Thomas)가 깊은 관심으로 논의를 해왔으며, 여기에 에드 레이에스 시의원(CD-1, Ed P. Reyes)이 적극 지지를 보냈다. 미주한인 이민135년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 광장’이나 ‘세미 리 기념 광장’ 등은 선포됐으나, 한인 단체에 대하여 기념광장을 LA시의회가 제정한 것은 이민 역사상 최초의 기념비적일이다.이 목사는 평양출신으로 한국 전쟁 때 단신 월남한 뒤 60년대 초 도미,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한국문화회관, 아주문화중심, 고려문화센터 등 단체를 만들고 수십차례 북한을 오가면서 이산 가족 상봉과 대북 구호, 투자, 문화교류 사업을 벌여왔다. 그는 미주 땅에 한국 전통 문화 전파로 동포들의 정체성 확립과 선교를 통해 이웃사랑으로 북의 동포를 아우르는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최신기사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