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흑인 노예제도 참회록…미국 가톨릭의 뒤늦은 양심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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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조지타운 대학은

흑인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최근 미국사회는 인종편견을 타파하는 물결이 새로 일어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상상을 초월한 학대 사례인 노예제도가 미국에서 일상적인 사회제도 처럼 횡행했던 것은 200여년 전 미국 건국 초기의 일이다. 그 후 수 많은 흑인 자신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에 흑백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백인들이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 사죄, 솔직한 역사의 청산을 하지 않아서 일어 나는 현상이다. 이럴 때 미국 가톨릭계가 지난 과거의 노예제를 참회하는 운동을 벌여 주목이 되고 있다.<성진 취재부 기자>

미국 노예제도 2뉴욕 타임스를 포함해 주류 언론들이 지난 15일 “미국 가톨릭이 과거 저질렀던 역사를 참회하는 화해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과거 흑인 노예에 대한 속죄하려는 가장 큰 노력 중 하나이다” 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조지타운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는 워싱턴 D.C.에 있는 최상위권 사립 대학이다. 이 대학은 1789년 가톨릭의 수도단체인 예수회(Jesuit Order)에서 설립한 교육기관 이다. 그런데 200년전 예수회 사제들이 이 학교의 재정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272명의 노예를 팔아 학교 재정에 보탠 것이다. 예수회와 조지타운 대학측은 지난동안 다각적인 연구활동을 통해 272명의 노예 후손들을 추적해 약 5천명의 후손들을 찾아 냈다. 예수회와 조지 타운대는 현재 1500만 달러 기금을 모았는데 앞으로 5년동안 8,500만 달러를 더 모아 1억 달러 기금을 마련해 50%는 인종화합 캠페인에 투자 하고, ¼은 흑인노예 후손들의 교육기금 장학기금 그리고 나머지는 직접 후손들에게 보상비로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예수회 사제들이 272명의 노예들을 팔아 넘긴 것은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인 1838년의 일이다. 예수회 신부들이 조지타운 대학을 설립했을 당시에는 대학의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이 매릴랜드 주에 있는 예수회 농장 수익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농장 운영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 하기 위해 부자 신자들이 자주 노예들을 기증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838년에 일어난 노예 매각 사건은 예수회 사제들인 이 대학 초기의 두 명의 총장들이 저질른 것이었다. 조지타운 대학이 운영 자금을 의존해 오던 매릴랜드주 농장은 경영이 부실해지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대학의 운영 자금을 조달해 줄 수가 없게 되었고, 당시 총장이었던 뮬러디 신부 (Fr.Mulledy)는 이러다가 대학이 대규모의 현금 자본을 투입하지 않으면 존립조차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여 새로운 자금원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헨리 존슨 (Henry Johnson) 하원의원 및 루이지아나주에 있는 지주 제시 베티(Jesse Batey)와 협상에 들어갔고, 1838년 노예들을 루이지 아나주 농장으로 팔기로 타결을 본 것이다. 이 때 뮬러디 총장 신부는 노예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고, 가족들이 흩어지지 않게 해 줄 것이고, 매각 대전은 빚을 갚거나, 운용 경비로 써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 관계자의 말로는 이런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뮬러디 총장 신부는 노예 매도 선수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자기 임기 중에 진 빚을 갚는데 썼고,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으로 소환되어 사임했다. 이로 인해, 이듬 해에는 당시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어떤 이유 에서도 흑인 노예들의 거래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된다.

교황청, 어떤 이유도 노예 거래 연루 금지

▲  미국 노예제도

▲ 미국 노예제도

당시 예수회 사제들에 의한 노예 매매는 보통 노예 매매와 다른 것이었다. 이 노예들은 미국에서도 저명한 가톨릭 예수회 사제들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에 훌륭한 가톨릭 고등 교육 기관이었고, 나중에 조지타운 대학이 된 이 대학의 장래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노예들과 함께 팔려 나간 것이다. 이 노예 매각 대금의 일부가 당시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대학의 빚을 상환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조지타운 대학 역사학자이며 지금 이 대학이 과거에 노예 제도에 연루되어 응어리진 비극적인 역사의 뿌리를 알리고 진사하는 방도를 연구하고 있는 실무 작업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담 로스맨(Adam Rothman) 박사는 “대학의 존재 자체가 이런 역사에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 말한다. 당시의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연구에 참가하고 있는 팀원들은 곳곳의 문서 기록을 열람하고, 매릴랜드주 예수회 농장에서 뉴올린즈 부두까지 노예들이 팔려 나간 족적을 따라가 보기도 하면서 루이지아나 3개 농장으로 흩어진 노예들의 행방을 찾기도 했다. 지금까지 결과는, 사제들에 의해 강제되어 그들이 갇혀 있던 삶의 일면을 보는 정도에 그친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요하고, 때로는 채찍질 당하고, 때로는 팔려 나가기도 한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도망과 농장의 거친 작업 환경 그리고 강제 노역에 대한 참여를 둘러싸고 일부 예수회 사제들의 두려움의 목소리 등 기록들이다.

아담 로스맨 박사는 “미국 노예 제도의 축소판입니다” 고 말한다. 노예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목수 들, 대장간 일하는 사람들, 임신한 부인들, 건장한 아버지들, 아이들, 갓난 아기들이었다. 이들은 1838년에 다른 곳으로 팔려가면서 가족 및 공동 사회가 찢어지는 두려움과, 좌절과, 슬픔을 겪었던 것이다. 이전에 예수회와 노예제도에 관해 저술한 적이 있는 시애틀 대학 역사학 교수 토마스 머피(Thomas R, Murphy )신부는, 당시는 가톨릭 교회에서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비도덕적(immoral)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로스맨 박사의 연구 결과로는, 이전에 예수회 사제들은 개인 노예들을 팔아 넘기기도 했었다. 1780년대에는 자신들이 소유할 노예들의 구성을 고르는 것에 대해 공공연 하게 논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예수회 사제들에게는 그들이 소유했던 노예들을 전부 팔아 넘긴다는 결정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노예들이 남쪽의 깊은 오지로  팔려 가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 악명 높은 남부 농장의 무자비한 노예 취급으로 고난을 겪을 것, 그리고 노예 가족들이 다시 제각기 팔려 나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역사에 빚

▲  조지타운 대학교

▲ 조지타운 대학교

흑인 노예의 역사를 알게된 조지타운 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에 의해 인종 차별에 대한 항거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항거를 위한 연대를 조직했고 팔려간 272명의 노예들을 상징하는 ‘#GU 272’ 라는 띠를 두르고 데모를 하면서 항거했다. 드디어, 대학 측은 이 대학 건물에서 노예를 팔아 넘긴 초기의 2 명의 총장들의 이름을 떼어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대학 졸업생인 사업가 쎌린니( Cellini )씨는 조지타운 메모리 프로젝트(Georgetown Memory Project)라는 비영리 단체를 결성하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펼치면서 8명의 가보학자들을 고용하여 진상을 밝혀내는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대학 교수, 학생, 졸업생 및 가보학자들로 이례적인 단체가 결성되어 당시 팔려간 남녀 노예들,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일이 있었다면, 대학 이 살아남기 위해서 팔려 갔던 노예들의 후손들에게 무슨 빚을 지고 있는지를 밝혀내려고 노력 하고 있다. 사실, 브라운(Brown), 콜럼비아(Columbia), 하버드(Harvard) 및 버지니아 대(University of Virginia) 등을 포함하여 미국의 많은 대학들은 그들 대학들이 노예 제도 및 노예 매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1838년에 조지타운 대학을 운영했던 예수 회 사제들마저 노예를 매도하려고 획책했다는 것은 당시의 노예 매매 제도의 규모가 실로 엄청 났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이 대학 졸업생이자 사업가인 쎌리니Cellini 씨는 여태까지 이 대학이나 예수회 (Jesuit)도 이들 노예들의 고난의 삶을 추적하거나 그들의 후예들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 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미국의 노예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조지타운 대학 기록에 오랜 동안 남겨져 온 노예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고 말한다. 그는 “이들은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꾸며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름을 가진 실제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실제 후손들입니다” 고 말한다. 가보학자들 및 조력자들의 노력으로, 코르네리우스 허킨스(Cornelius Hawkins )라는 이름의 한 노예 소년의 가족 역사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에 대한 사진, 편지, 보도 내용 등 아무 것도 그가 매릴랜드 주 예수회 농장에서 겪은 마지막 시절에 대해 전해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으로, 항구에서 노예들이 실려 나간 기록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가 노예들을 싣고 뉴올린즈 항구로 떠났던 화물선 에 태워져 팔려간 때는 키가 겨우 5피트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 어린 노예의 이름은 한 검사관이 1838년 12월 6일에, ‘화물’(노예)을 검사하고 나서 “검사필, 틀림없음” 이라는 기록에 남아 있었다. 이 배에는 129명의 다른 노예들도 태워져 있었다.

흑인노예는 인간이 아닌 ‘화물’로 취급

당시 로마 예수회 국제기구 책임을 맡고 있던 젠 루스탄(Jan Roothaan) 사제는, 당초에는 노예를 파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던 듯, “노예를 팔아 넘겨 우리의 영혼을 잃느니 차라리 재정적 곤란을 겪는 편이 더 낳을 것” 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 조지타운 대학 총장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가톨릭 전통 체계에 따라” 워싱턴 교구와 미국 예수회 의 파트너십을 위한 ‘화해의 미사(Mass of reconciliation)’ 를 거행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노예의 후손들이 이 대학 가스톤 홀(Gaston Hall)에 운집한 자리 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 공동체(예수회)는 노예 제도에 참여했습니다. 이 원죄의 악행(original evil)은 이 나라의 처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나타났습니다. 우리들은 진실의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었고, 이런 진실을 묻어 버렸고, 이런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 왔습니다“ 고 말했다. “우리는 개인으로써 그리고 공동체로써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의 소유자라는 것을 거절하면서는 최상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 말했다. 연설을 마치고 좌중의 의견을 구하자, 한 남자가 마이크를 받았다. “내 이름은조 스트워트( Joe Stewart )입니다. 나는 272 명 노예 중 한 사람의 후손입니다” 고 자신을 소개하고 지금 이 대학이 기울이고 있는 진상 규명 노력에 후의를 표했다. 그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고 선언하여 다른 후예들의 찬동을 받았다. 그 후 대학 총장은 실무 그룹, 학생들, 학자들, 행정가들 및 졸업생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놓고 이러한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 갈 것인가에 대해 숙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 후 New York Times에서 팔려 간 노예 중 한 사람인  코르네리우스 허킨스의 일생을 추적 하고, 오늘날 후예를 찾아 낸 것이다.

위원회의 보고서는 조지타운 대학의 노예 제도에 대한 의존도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하고 깊은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대학이 1789년 개방되기 훨씬 전부터 노예들의 노동 및 노예 매도에 의한 수익은 대학 운용 자금의 수익 모델이었고, 노예들은 예수회 소유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것 외에도 캠퍼스 내에서도 노역을 했고, 심지어는 학생들이나 다른 부자들에 의해 고용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위원회는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밝혀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밝혀진 진실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길로 가자는 것이다. 조지 타운 대학의 표어는 “둘을 하나로”(Utraque Unu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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