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는 ‘정의로운 생각과 감사’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
2021년의 부활절(4월 4일)은 지난해 코로나 19 재앙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의미도 담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오랜만에 본향을 찾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며 성령과 함께 세 분이 삼위일체가 되어 담소를 나누게 됐다고 한다. 하느님이 성령에게 다시한번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성령은 순식간에 비둘기도 되고, 불 꽃으로도 변했다. 하느님이 박수를 치며 좋아 하셨다. 이에 다시 하느님이 예수를 보고 ‘어디 한번 멋지게 물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 주세요’라고 했다. 예수는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요”라며 물 위를 걸었다.하지만 이내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예수는 다시 한번 솟구쳐 나와 물 위를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빠져들고 말았다. 원인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생긴 발에 큰 못 구멍 때문에 물이 그리로 솟아 올라 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를 선택한 무리들
누가 예수에게 못을 박았는가? 부활은 십자가에서 못 박여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생명을 찾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과연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부활의 참된 의미를 한국의 김웅렬 신부가 지난 수난 성지 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심각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이다. 이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지닌 자들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예수를 ‘신성모독제’로 올가미를 씨웠다. 오늘 날에도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남을 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둘째는 ‘은전 30량’을 받고 스승인 예수를 팔아 넘긴 제자 유다이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은전 30량’은 당시 노예 한명의 가격이라고 한다. 지금도 돈 때문에 밀고도 하고 배신 하고 심지어 청부 살인도 마다 안한다. 셋째는 스승을 지키지 못한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라는 ‘왕’이 곧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가 될 것을 믿고 따랐는데, 어이없게 십자가 상에서 못 박여 죽자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모두 도주했다. 배신의 도주였다. 십자가 밑에는 오직 가장 나이 어린 제자 요한만이 있었다. 대표적인 배신자는 바로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였다. 그는 “나는 그 사람을 모릅 니다”라고 세번씩이나 강조했다. 바로 나는 그 사람과 한 패가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군중들이다. 선동자에 구호에 맞추어 옳고 그름을 아랑곳 않고 맞장구를 친 것이다. 여론 재판이나 다름없다. 지금 이 시대에도 진실을 왜곡하고 가짜 뉴스에 희희낙낙하고 있다. 그리고 한 두사람이 작당해 다른 한 사람을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다섯째는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다. 그는 예수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 발라바라는 강도를 석방시키고,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성난 군중에게 내어 주었다. 그 군중들은 바로 얼마 전 나귀타고 에루살렘으로 들어 오는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이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를 선택한 것이다.
부활은 믿음의 시작이자 종착점
예수 그리스도가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그 시대 일로만 생각할 것인가. 나와 우리는 그때의 십자가 죽음에 전혀 자유로운가? 역사적으로 2천년 전의 그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스승을 배반하는 일, 내가 아니고 남 탓으로 여기는 일, 정치적 야심을 위해 상대방을 여지없이 숙청하는 일, 내 가정의 이익을 위해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무고하는 일 등등 양심의 구멍을 뚫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예수는 오늘날 ‘세상을 위해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련다’고 말한다. 한국 천주교 역사는 2만여 명의 순교자들의 피로 쓰여져 있다. 그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에는 주위 밀고자들의 중언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부활은 그래서 회개를 하고 새로 삶을 살아가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나 때문이 아니고 너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는데서 새로운 삶은 생겨난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파스카의 신비는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가장 큰 희소식이자 기쁨이 아닐 없다. 교회는 그래서 “축일중의 축일”인 부활절을 초대 교회때부터 성대하게 지내왔고, 세계 각국 에선 지역마다 고유한 풍속으로 경축행사를 마련한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온갖 비참과 수모가 무효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주었고, 죽음까지도 부활을 통해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의 대상은 바로 이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 우리도 장차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당장 현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사건은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진면목이 부활을 기점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강력한 메시지를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사도들은 부활한 예수를 보고 만지고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1고린도15.17)이라고, 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현세에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 일 것”(1고린도 15.19). 부활은 이렇듯 신앙의 기초이며, 믿음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다”는 것도, 현세에 살면서도 이미 천상영복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40일간 사순절을 지내왔다. 사순절의 명칭 자체가 ‘40일 (라틴어 Quadragesima)’이라는 뜻이다. ‘40일’은 크리스천들에게 상징적인 숫자이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40일을 상징하기도 한다. 모세는 40일 금식으로 기도했고, 예수님도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했다. 부활은 새로 태어남이다. 부활을 기쁘게 맞이 하려면 ‘정의’로운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