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주년 특집1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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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터에서 생생한 역사를 보도한 특파원들’

그들이 세계에 6.25를 알렸다

6.25 한국전쟁 중 유엔(UN)은 16개국의 전투병과 41개국의 의료와 병참 지원을 했다. 전쟁 중 미군 군목 13명이 희생되었으며, 외신 특파원 270명 중 17명이 희생되었다. 한국 기자 1명도 순직했다. 참전 미군 중에는 대통령의 아들과 장성의 아들 142명이 포함되었으며, 그 중 35명이 전사, 실종, 부상을 당했고, 미군 연인원 180만 명 중 7,800여 명의 실종 미군의 생사 여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한국전쟁 외신 특파원들 중에 일부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성진취재부 기자>

△ 한국계 유일한 여성종군기자 사라 박

△ 한국계 유일한 여성종군기자 사라 박

2009년 3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언론 박물관 뉴지엄(Newseum)에서는 50년 만에 1,898명의 순직 언론인들과 함께 명예로운 이름을 같이한 한국계 미국인, 이민 2세 여성 사라 박(Sarah Park, 1927.6.22-1957.3.9)의 이름이 헌정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특파원들 가운데 유일하게도 재미동포 한국인 첫 여성 특파원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미국의 일간지 최초 한인 기자인 이경원(K.W. Lee)원로 기자는 “사라 박은 언론 박물관 추모비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유일한 한인계 언론인”이라면서 “또한 한국전쟁을 취재한 유일한 미 언론사의 유일한 한국 여성 전쟁특파원이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사라 박은 공산주의 비판과 그들의 만행과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생생하고도 날카로운 취재 기사로, 당시 소련의 한 뉴스매거진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펜을 든 8명의 깡패’ 중 한 사람으로 영광스러운 필명을 얻었다고 한다. 사라 박은 하와이 호노룰루에서 한국인 아버지 박신복과 어머니 춘하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 국인 저널리스트다. 나이 16세에 비행기 조종 기술을 배워 단독 비행에 성공한 사라 박은 워싱턴 D.C.의 아메리칸 대학교와 하와이 대학교를 졸업, 영국 국제뉴스 서비스 및 로이터(REUTER) 통신사 에서 아시아 지역 일을 맡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50년 일간지 ‘호노룰루 스타 블레틴’(Honolulu Star-Bulletin)에 입사하여 1952년 겨울부터 1953 년 봄까지, 당시 25세의 애띈 나이로 한국전쟁 특파원 활동을 했다. ‘박씨는 전선 주변 지역에서 촛불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도하여, 이 보도에 하와이 주민들이 15만 개의 촛불을 군대에 보내어 사기를 진작시키는 ‘한국의 양초 캠페인’(a campaign ‘candles for Korea)을 벌이기도  했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한국전쟁 취재 기간에는 미 제7보병 사단 명예 회원 신분으로써, 제23보병 연대, 제3 대대 부대원들을 따라 전선의 참호와 거친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 지대를 수없이 넘나 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사라 박은 안타깝게도 1957년 3월9일 하와이 ‘해일’(쓰나미) 취재 중 태평양 상공 에서 소형 비행기 사고로 그의 친구 폴 O. 빔과 함께 30세에 절명했다.

한국전쟁 최초의 한인 여성 전쟁특파원

원로기자 이경원(K.W. Lee ) 미주한인기자협회 창립 회장은 사라 박의 죽음은 “대단한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는 “슬픔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그녀를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도 말했다. 사라 박은 또한 여성 기자들이 거의 없고 여전히 전선을 취재하는 사람들이 적었던 시대에 성별 장벽을 깼던 개척자 기자였다.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던 스타-불렛 기자였던 라일 넬슨은 사라 박의 스타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에서 이름난 특파원 어니 파일(Ernie Pyle)의 보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군대와 함께 그들 이 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보는 것처럼 그것을 보고 있었다,” 라고 스타-불렛에서 박씨와 함께 일했던 넬슨이 말했다. “저는 그녀가 확실히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라고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던 소수의 여성 기자 중 한 명이었던 KITV 기자 덴비 포셋은 말했다. 그녀는 전쟁 특파원이면서 관찰자 이상이었다. 그녀는 누구나 하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집에서 온 이해심 많은 ‘버디’였다.”;

그녀는 1950년 스타-불렛에 고용되어 1952년 겨울부터 1953년 봄까지 한국전쟁을 취재했고 1954년 하와이로 돌아왔다. 뉴지엄(Newseum)의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진 마테르는 언론 박물관이 계속해서 추모 목록을 갱신하고 있다며 언론박물관의 한 직원이 전 UPI(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 기자들을 위한 뉴스레터에서 사라 박의 이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뉴지엄은 스타-불레틴과 접촉해 사라 박의 사망 경위를 확인한 뒤 홈페이지와 추모비 자체에 사라 박의 이름을 헌정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한국전쟁(Korean War) 보도의 또다른 특징은 단순전쟁으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보도였다는 점이다. 기사가 차지한 지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한 분량이었으며 각국에서 모여든 종군기자의 수도 초기전시 238명으로 이것은 2차대전에 동원되었던 기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취재 활동도 대단히 적극적이었으며, 각국 신문의 많은 기사는 이들의 송고에 따른 것 이었다. 지면의 분량에 있어서는 ‘뉴욕 타임스’가 단연 앞서는데 초기전과 휴전협정시 단일기사 건수가 평균 23건으로 이를 지면으로 환산하면 약 10면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한편, 영국의 타임스는 여타 신문과는 달리 기사의 양은 적었으나 편견이나 감정이 입을 가능한한 줄여 사실의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였으며, 균형있는 정보원과 기사 종류의 선택으로 전쟁과 정전 을 폭넓은 시각으로 다룬 점이 주목을 끈다.

소련 등 공산진영의 표적이 된 특파원

▲ 한국전쟁 발발 첫 해외호외 신문 스타엔스트라이프

▲ 한국전쟁 발발 첫 해외호외 신문 스타엔스트라이프

한국전쟁 발발 당시 UP통신(UPI의 전신) 한국 지국에는 제임스(Jack James) 기자가 있었는데 그가 약 20분간 본사에 보낸 기사가 첫 전쟁 보도였다. 제임스의 기사 전보는 수분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신되어 자동적으로 뉴욕에 있는 UP 본사에 중계됐다. 서울 시간 1950년 6월25일 오전 9시50분 워싱턴 시간 6월24일 오전 8시50분이었 다. 잭 제임스가 보관하고 있는 6.25발발 첫 기사의 원본(본사의 데스크에서 수정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다. <지급 기사 UP 뉴욕(250950 제임스) 38선 지역의 단편적 보고에 의하면 북한은 일요일 아침 전 경계선에서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곳 시간 오전 9시 30분 현재의 불규척한 보고 내용에 의하면 서울 서북방 40마일 지역인 개성시 (한국군 제1사단 사령부 소재) 가 9시에 함락되었 으며, 웅진 남쪽 3~4킬로미터 지역에서 적의 부대가 발견되었다.  서울 동북방 50마일 지점인 춘천 지역에서 공격에 투입된 적의 전차대가 출현했다.국도가 없는 강릉 이남의 동부 해안 지역에서 적은 단정 20척으로 상륙을 감행 했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도 단편적이며 모호하다는 사실을 덧붙여 둠> 이같은 제임스 특파원의 제 1보는 AP의 기사보다 2시간 14분이나 빨랐으며,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타전한 보고 보다도 오히려 빨랐다. 무초 대사도 제임스가 기사를 보낸 비숫한 시간에 보고 전문을 발송 하긴 했지만 그것은 도쿄롤 거쳐 워싱턴으로 연결되는 주한 미 대사관의 공식회로를 통하여 전달 됐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서 미 국무성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잭 제임스의 기사를 받아 본 UP 본사가 국무성의 당직 책임자였던 프랭크 더발과 극동과의 공보관 W. 브래들리커너스에게 전화를 걸어 뉴스의 확인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제임스 기자외에도 AP 통신의 킹 (.H. King) 특파원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뒤에 공산군에 포로가 된 프랑스 AFP 통신 모리스 상를루 (MauriceChanteloup) 기자와 함께 도쿄에 상주 하고 있던 뉴욕 타임스의 딕 존스턴(Dick Johnston), 시카고 트리분의 월터 시몬즈 (Walter Simmons) 등이 서울을 커버 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시몬즈는 2차대전때의 베테랑 종군기자로 서울 함락 을 취재한 유일한 미국 기자였다. 또 대통령 이승만의 초대로 내한한 INS 통신의 레이 리차드 (Ray Richards) 기자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률루 기자는 38선을 시찰하기 위해 6월 17일에 내한했던 미 국무장관 덜레스의 대외 정책 특별 고문을 따라 서울에 왔다가 취재를 위해 며칠간 더 묶고 있던 중에 6.25룰 만났다. 한편 한국인 외신 기자로는 AP의 신화봉, UP의 서인석, INS의 이용호, 뉴욕 타임스의 김용문 등이 일하고 있었다.

UP 기자가 외신으로 한국전쟁 최초 보도 특종

1950년 9월까지 한국전쟁 특파원은 모두 238명, 나중에는 270명으로 늘어났다. 뉴스통신24시에 의하면, 한국전쟁 3년1개월 간 한국 전선을 다녀간 특파원은 줄잡아 500명, 평균 200명이 전장에 남아있었으며, 50명은 적과 마주하는 전선에서 취재했다. 특파원들 중에는 미국 200명, 다음으로 일본 50명이다.특파원들 중 최초 희생자는 AP 통신의 윌리엄 R. 무어(William R. Moore, 1909-1959. 7. 31), 그는 마산에서 취재 중,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인 7월31일, 그가 탄 취재 차량이 북한군 탱크와 부딪혀 사망했다. 그 후 ‘더 타임즈’(The Times)의 이안 모리슨(Ian E. M. Morrison, 1913-1950. 8.12)이 7월 10일 최초로 한국전쟁 기사를 내보낸 후 8월12일 취재 차량 지프차의 지뢰 폭발로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 특파원 크리스토퍼 버클리(Christopher Buckley, 1905-1950. 8. 12), AP통신의 윌리엄 무어와 함께 사망 했으며(KWE), 알버트 엘 힌튼(Albert L. Hinton)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제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취재한 특파원이다. 그는 한국으로 이동 중이던 군용기가 일본 해안에서 추락하면서 다른 동행자 25명과 함께 사망했다.

리니타 브라운(Lynnita Braown) 여사는 더글라스 카운티 박물관(Douglas County Museum) 책임자 로서 ‘한국전쟁 교육자’(Korean War Educator, St, Tuscola, IL)를 설립하여 ‘잊혀진 한국전쟁’을 상기 시키는 참전용사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희귀 자료들을 수집 내지 정보를 공유하는 단체다. 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17명의 전쟁 특파원들 가운데 유독 시선을 멈추게 하는 한국 인 이름 ‘Han, Kyu-Ho’(한규호) 기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경기도 파주시 통일공원에 있는 ’통일공원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기념비‘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다 순직한 국내외 언론인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미국기자 10명, 프랑스 2명, 영국 4명, 필리핀 출신기자 1명, 그리고 한국 서울신문의 한규호 기자의 이름이 눈에 띈다. 한국기자협회의 ’뉴스통신사 24시‘에 의하면 한규호 기자는 서울이 함락될 때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납북 순직했다고 한다.

한국 기자 순직자 서울신문 한규호 특파원

1993년 7월, 한국전쟁을 취재한 미국 언론계 은퇴 기자 100여명이 워싱턴 D.C.에서 한국전쟁 정전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의 최연소 저널리스트는 당시 CBS 특파원이었던 67세의 고 루 시오피(Lou Cioffi)는 1950년 대 한국전쟁을 다룬 방송 기자이기도 하다. 함께 모인 은퇴 전쟁 특파원들은 하나같이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17명의 특파원들이 한국전쟁 취재 중 희생되었지만, 그들은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과 비교 할 때 특파원들에게 안전한 ‘전쟁’(safer war)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전쟁에는 몸을 피할 수 있는 참호와 피아 구분이 가능한 전선(a front line)이 있었고, 베트남과는 달리 적은 언제나 앞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린 외신 특파원들은 총을 든 전투요원 못지않게, 그들은 펜을 들고 총탄 속을 누비면서 전쟁의 진실을 취재한 영웅들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의 위험을 알렸다. 6.25 전쟁 71주년을 맞이하면서 참전 용사들을 기리고 감사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국전쟁 역사를 기록한 전쟁 외신 특파원들의 공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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