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주년 특집 3 한국전쟁의 숨겨진 사연들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숨진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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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프리트 미8군 사령관 외아들 지미 중위의 마지막 편지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저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unnamed“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다. 사회적 신분이 높으면 그만큼 도덕적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외아들이 아버지가 한국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하여 아버지를 돕겠다고 한국전에 자원 했다가  순직한 이야기를 포함해,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 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3만 4천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꿈쩍 않는 국민을 둔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대통령을 포함해 미군 장성과 유명 인사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전사자는 3만4천여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그리고 아직도 생사를 모르는 실종 군인들이 8천명이 넘는다. 한국전쟁에서 숨겨진 미군 사령관들의 남다른 사연 을 소개 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한국전쟁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 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8군 사령관의 외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편지였다.

사랑하는 어머님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님,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52년 4월 2일   당신의 아들 지미 올림 

이 편지를 쓴지 2일후 4월 4일 새벽 지미 벤프리트 중위는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경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 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증언 이다.

​‘아버지를 돕겠다고 한국전에 자원한 밴프리트 2세’

soldiers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은후 부활절을 맞아 사령관 밴프리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 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기꺼이 내놓았던 것이었다.

이처럼 밴플리트 장군은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군 현대화와 한미동맹 공조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알려진다.  그는 퇴역 후에도 종종 방한해 한국과의 우정을 돈독히 했고 미국서는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설립하는 등 평생 한미 관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밴프리트 장군과 그의 아들 지미 중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2014년 밴플리트 부자를 6.25 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에 그의 영웅적 희생의 삶과 한국전을 통해 혈맹으로 맺어진 한미 두 나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된다. 올해 한미 동맹 71주년을 기념해 ‘1부 밴플리트의 기도-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2부 ‘손명화의 기도-잊혀진 사람들’을 타이틀로 제작되는 영화는 윤학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제작에 들어갔다. 한편 지난 해 6월 LA 총영사관(총영사 박경재)이 주최한 ‘한국 전쟁의 역사’에 대한 세미나에서 밴플리트 장군의 외손자인 ‘조지프 맥크리스천’ 씨가 자신의 외삼촌이 한국전쟁 중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해 주목을 끌었다. 그는 “외삼촌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며 “이것은 옛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알려준 내용으로, 육군 정보국 참모차장을 지낸 부친 이 확인했다”고 말했다.

현재에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군과 한국과 유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한 땅에는 140여명의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고 참전 군인 유해도 4만여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한국전에 총 180만여명을 파병해 22개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으며 전사 3만4,000여명, 실종 3,700여명을 포함 13만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윤학렬 감독은  그는 ‘오박사네 사람들’, ‘LA 아이랑’ 등 시트콤 1세대 방송 작가로 활동하다, ‘오! 해피데이’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그는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의 이야기와 지역교회의 사명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몇년 전에는 <1919 유관순>도 연출했다.

밴프리트 장군 부자의 ‘노블리제 오불리주’ 영화화

한국전쟁이 아직도 치열했던 1952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그해 12월 어느 날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았다. 그 당시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야전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 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 장군이 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 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 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었다. “옛써,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밴프리트 장군의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에피소드는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 탱크 대대의 대대장 페렌바하(T.R Fehrenbach )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과 워커힐 호텔

한국방문한 아이제하원 당선자한국전쟁의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대장은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사단에 대한 부대 표창을 위해 짚차로 달려오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 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현장에서 순직했다. 당시 24사단에는 워커 대장의 아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 아들이 전공을 크게 세워 훈장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 사고로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순직한 월튼 워커 대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월튼 워커 대장의 아들도 나중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해 최초의 미군 부자 대장 가족을 이뤘는데 전도유망한 아들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한국전에서 순직한 워커 사령관의 아들 워커가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 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때  분연히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월튼 워커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지난 2002년 미군이 탱크 훈련 중 “미선”과 “효순” 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 이다. 그뿐 아니라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짚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 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51년 미8군 사령관을 죽게 한 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 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 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워커 사령관의 에피소드를 알았다면 어떠 했을까? 오늘날의 서울의 워커힐 호텔은 바로 이런 워커 장군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며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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