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특집] 남북한은 독일 통일에서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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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성 총리 ‘앙게르 메르켈’의 통일 정신

작은 노력이 모여

‘철의 장벽’을 허물었다

올해 8.15는 남북한 분단 76주년이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분단이다.  우리는  “한반도 통일” 문제를 두고 대화할 때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나 글을 종종 보게 된다.  ‘독일 통일’에서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독일이 우리처럼 분단국가였다가 통독이 되었기에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상식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분단의 독일 국민들이 통일을 스스로 이룩했다는 것은 진정 배울만한  교훈이다.  통일을 이룩한 독일 국민들의  정신이  인물을 키워내고 신앙도 키웠다. <성진 취재부 기자>

▲ 앙게르 메르켈 독일 총리

▲ 앙게르 메르켈 독일 총리

독일의 현재 총리는 여성인 앙게르 메르켈(67, Angela Merkel)이다.  그는  지난 2005년 부터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출발해 내리 4선에 16년 가까이 재임하고 있다. 그는 독일 기민당 (기독교 민주연합) 대표로 현재 까지 연립 정부(좌, 우 대연정)를 이끄는  리더십으로  4년 연속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이기도 하며  2015년에는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오는 9월에 총리직을 떠나 정치에서 은퇴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다. 메르켈 총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이 있다. 메르켈 총리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활 점령 당한후, 1959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270 만 동독인들이 자유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1954 년 수 많은 인파가 자유를 찾아 구름 처럼 서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독  정 반대인 동쪽 으로 동쪽으로 떠나가는 한 가족이 있었다. 서독 출신의 ‘호르스트 카스너’ (Horst Kasner) 목사의 가족이었다.  카스너 목사 가족은 동독 사람 들의 서독으로의 피난 행렬을 역행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수 많은 목회자가 동독에서 계속 넘어오기 때문에 서독에는 목회자가 넘쳐나고 있지만, 오히려 동독에는 목회자 기근이 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동독은 목회자가 없어서 수 많은 영혼들이 방치되고 있었다. 카스너 목사는 서독에서 남부럽지 않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에게는 함부르크에서 낳은 겨우 6 주가 된 신생아가 있었다.  이 신생아를 데리고 머나 먼 동쪽 정한 거처도, 교회도 없는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고민하던 카스너 목사는 결단을 내렸다.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교회도 없는 공산 치하로 들어 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것은 누가 보기에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스너 목사는 청지기 인생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고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 처럼 낮은 곳, 더 낮은 곳을 향해 죽음까지 내려가는 그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동독에서 카스너 목사는 루터 교회를 사목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그 다음에 펼쳐졌다. 당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공산 치하 동독으로 갔던 목회자의 딸이 아버지의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생활로 양육 받고 자라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당대의 가치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시대를 역행했던 그  카스너 목사의 딸이, 지금 통일 독일을 이끌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만약 남북한이 통일일 됐을 경우, 북한 출신을 통일한국의 대통령으로 선뜻 선출할 수 있을가? 한 시대의 사명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에 의한 양육으로 성숙된다.  당대의 가치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시대의 역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면 그것이 오히려 항상 순행이 되는 역전의 축복을 만날 수 있다는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소박한 동독의 한 시골 교회에서 자란 소녀가 나중 통일 독일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독일의 부흥을 일으키고 유럽의 경제 위기 극복과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을 이끌고 있다가  명예로운 박수 를 받으며 오는 9월에 정계까지 은퇴하며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간다.

서독에서 신앙 전파를 위해 동독에 간 목회자

지난 7월22일 독일 수도 베를린의 연방기자협회(BPK) 강당에서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은퇴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회견이었다. 이자리에서 총리에게 한 기자가 “오는 9월 26일 오후 6시에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다. 자신의 후임 총리를 정하는 총선일 저녁 에 무엇을 할 예정이냐는 질문이었다. 메르켈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아직 생각 못 해봤네요. 아마도 나한테 소중한 정당과 관련된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총선이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 온 데다, 이날은 정당 대표가 아니라 독일의 국정 책임자로서 기자회견장에 섰다는 점을 고려해 일부러 여당인 기독민주당(이하 기민당)의 당명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메르켈 총리는 “제가 그 당의 당원입니다”라고 했다.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독일 통일 이루다.

▲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독일 통일 이루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독일의 대표적인 언론인 단체인 BPK 초청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온 것이다. 1949년 출범 한 BPK는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총리를 초청해 국정 현안은 물론이고 총리의 개인사까지 질문을 쏟아낸다. 이날 메르켈은 지난주 독일 서부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와 백신 접종에 대해 13분 에 걸쳐 모두 발언을 한 후 80분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질문에 답했다. 늘 그랬듯이 그녀는 준비 된 원고가 없었다. 메르켈 총리의 BPK 기자회견은 2005년 총리 취임 이후 이날이 29번째였으며, 마지막 이라는 점에서 독일 언론들이 집중 조명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인 영역을 건드리는 질문이 나왔다. 어떤 기자가 “당신 인생 에서 동독 출신이라는 게 여전히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메르켈은 “뿌리 없는 미래는 없다”며 “(어린 시절 동독에서 자란 것은) 당시 무슨 일들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해줬기 때문에 좋은 정치적 커리어 를 갖기 위한 바탕이 됐다”고 받았다. 메르켈 총리는 동독에서 공부하던 시기를 회상하며 “나는 과학자”라고 했다. 그는 정확하게 현안을 바라 보자고 강조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쓴다. 메르켈은 1986년 동독 시절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양자 역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그가 앉은 자리 앞에는 ‘메르켈 박사(Dr. Merkel)’라는 명패 가 놓여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공격적인 표현을 자제하며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그는 ‘미래 를 위한 금요일’ 캠페인을 세번 언급했지만 한번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 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을 실행에 옮겨달라며 금요일마다 학교에 결석하는 캠페인으로서, 다소 급진적인 환경운동으로 평가된다. 여당인 기민당의 우파 정치인들은 이 캠페인에 대해 지나 치다며 자주 비난하지만 메르켈은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국정 현안을 놓고 쏟아지는 질문을 메르켈은 막힘없이 설명했다.

기후변화 대책, 러시아 와의 천연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를 둘러싼 논란,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메르켈은 93분에 걸친 회견을 마치면서 “언론인 여러분 고맙다. (BPK 기자회견에 참가한 것은) 나에게는 즐거움이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메르켈 총리는 퇴임을 앞두고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허락한다면 마지막 해외순방도 고려 중 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후대에 역사책에서 “게을렀다”라는 평가는 피하고자 최선을 다할 예정 이라고  덧붙였다.

어린시절 ‘뿌리 없는 미래는 없다’ 터득

▲ 메르켈 총리(중앙)와 아버지 카스너 목사와 어머니

▲ 메르켈 총리(중앙)와 아버지 카스너 목사와 어머니

통일 독일 이면에는 서독의 교회와 동독의 교회가 일치를 이뤘다는 커다란 운동이 통일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이미 언급했던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간  카스너 목사 딸이 나중  독일 총리 ‘메르켈’ > 이란 사실도 중요하지만, 동서독 교회가 공산주의 핍박에서도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기윤실 공동대표)가 최근 기윤실 ‘좋은나무’에 기고한 글에서 동서독 교회 통합 30주년을 기념해 정치·사회적 분단에도 한 체제를 유지했던 독일 교회를 조명한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조 교수는 “1945년 독일의 패전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이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체제에 의해서 독일은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소위 동독과 서독이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각각 다른 체제를 추구하는 두 국가로 나뉘었는데도 교회는 분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그러면서 “두 국가 아래서 이들은 독일개신교연합(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체제는 1969년 6월 10일 독일민주공화 국개신교연합(der Bund der Evangelische Kirche in der DDR), 즉 동독개신교연합이 설립되어 독립 하기까지 유지되었다”고 했다. 조 교수는 “동서독 교회가 이렇게 분단 이후에도 20여 년간 한 체제를 유지한 것은 우리의 상식 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면서도 “그러나 이런 체제는 당시 상당히 실질적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현재 독일의 총리인 메르켈의 아버지는 서독에서 목사가 되었고 이후 동독으로 가서 목회를 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만 해도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는 공산주의 체제에 있는 동독 지역에서 선교하겠다는, 어쩌면 상당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동독 교회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교회를 유지해 나갔다. 이후 분단이 점점 실제가 되며 교류는 점차 끊어지고, 정보기관과 정부의 박해와 감시는 교회의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 체제의 분단은 공산국가의 감시와 공작으로 더 공고해졌다. 그리고 결국 체제 의 분단이 교류의 단절로 이어졌다.

▲ 조성돈 교수

▲ 조성돈 교수

하지만 조 교수는 독일 교회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독일 교회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서독교회연합과 동독교회연합의 교류는 어려워졌지만, 개 교회 간의 교류는 포기하지 않았다”며 “연합체의 교류가 어려워지자 양측의 교회는 지역교회별로 1 대 1 자매결연을 했다. 그래서 서독의 교회가 동독의 한 교회를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상대편 교회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그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런데 동독 정부의 방해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 파트너십 관계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독일 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 단위를 개인 수준으로 낮추었다.   그래서 그들의 명절인 교회 기념일에는 서독의 교인들이 동독의 교인들에게 소포를 이용하여 선물을 보냈다. 특히, 성탄 절이 되면 선물 보따리를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보내는 운동을 펼친 것은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라고 했다. 조 교수는 그러면서 “이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이들은 독일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통합을 준비했다. 1990년 1월, 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겨우 3개월 정도가 지난 후, 그해 10월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보다도 훨씬 전에, 동서독의 교회 지도자들은 서독 지역 인 로쿰에서 한자리에 모였다”며 “더 놀라운 것은, 이 모임이 독일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부터 계획 되었다는 점이다. 실은 이 모임은 동서독 교회 분단 20주년을 기억하자며 준비했던 모임 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면서, 분단을 기억하려는 모임이 통일을 준비하는 모임이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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