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발굴 특집 – 미주 이민선조는“3· 1 운동의 선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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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잔 다르크”
김 마리아를 아시나요?

해마다 3·1절을 경축할 때 많은 사람들은“유관순 열사”나“3·1 운동 33인”을 기억하곤 한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탄탄대로를 마다하고 조선 일본 미국 등을 넘나들면서 2·8 운동, 3·1운동을 통해 일평생 조국독립에 헌신했다. 1900년대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선교사들은 특히 여성 운동가에 많은 관심을 두었는데 김 마리아의 독립운동에 감동해 그녀를“살아있는 잔 다르크”라고 불렀다. <성진 취재부 기자>

▲ 김 마리아

미주에서의 3·1 운동은 독특한 의미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국에서 3·1 운동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인 유학생들의 2·8 선언서가 촉매제가 되었으며, 그 유학생의 선언서 채택은 미주 이민사회의 독립운동으로부터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국에서의 3·1 운동 시발점은 특히 3·1 운동 1년 전인 1918년 11월 25일 뉴욕에서 조직된 김헌식의 ‘신한회’가 정치력으로 미국 정계에 문을 두드렸다. 뉴욕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발점 이기도했다. 앞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7년과 1918년 뉴욕의 맥알핀(McAlpin) 호텔에선 소약속국동맹회의가 두차례에 걸쳐 열렸다. 코리아를 비롯한 억압받는 약소국들 대표가 모여 독립에 대한 열망을 논하고 세계의 지지를 얻는 자리였다. 박용만과 민찬호 정한경이 대표로 참석한 소약속국동맹회의 소식은 AP를 통해 세계에 전파 되었다.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zer)에 ‘한국민들 독립을 주장’,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 등의 기사에 힘입은 재일유학생들은 은밀히 독립운동에 나섰고 이것이 1919년 2·8 독립선언과 역사적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당시 뉴욕 한인교회의 신자인 김 마리아는 동경에서 한인 유학생이었는데 이 ‘2·8 선언문’을 몰래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일본 기모노를 입고 그안에 2·8 선언문을 감추었다. 하지만 나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크게 옥고를 치렀다. 당시 유관순과 함께 복역했다.

김 마리아는 나중 복역을 끝내고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해 ‘근화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어 미국인 선교사들과 동포사회에서는 그녀를 “살아있는 잔다크”로 불렀다. 지난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3·1 운동 당시 및 일제 강점기에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우리에겐 유관순 열사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 외에도 김마리아 박인덕 박자혜 권기옥 황애덕 등 다수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이런 가운데 김마리아 (1892~1944)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도 열리면서 국내에서도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김마리아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여성으로서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열사이자 교육자이다. 그녀는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라고 외치면서 1944년 서거 하는 날까지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과 악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끈질긴 투쟁과 역사적 업적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 유관순 열사

일제강점기 선교사들 사이에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렸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어도 우리나라는 벌써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칭송 했다. 그러나 오늘날 국사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중학 국어책에 한동안 실렸던 선생의 전기도 사라지는 등 독립열사로서 너무나 초라한 예우를 받고 있다. 황해도 장연에서 신학문을 받아들인 독립운동 가문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정신여고를 나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미국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2·8독립선언’의 한 주역으로 참여했다. 이 독립운동을 고국으로 확대해야겠다고 절감한 그녀는 대학 졸업(영문학 전공)을 한달 남겨둔 시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긴 채 부산행 배에 올랐다.

당시 김마리아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 띠)에 선언문 숨겼다고 한다. 적발될 경우 살아남기 어려운 위험천만한 임무여서 모두 말렸 으나 “내게 이 사명은 졸업장을 따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여성이라 검열과 수색이 덜 할 테니 내가 조국으로 가져가 전파하겠다”고 당당히 나섰다. 그녀의 결단으로 부산을 거쳐 광주 대구 등 전국으로 전해진 2·8독립선언서는 3·1 운동을 촉발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 이후 정신여고 동료교사 및 학생들과 3·1 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운동의 배후자로 5일 후인 3월 6일 일본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본 경무총감부는 배후를 대라며 선생의 가슴 한쪽 전체를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등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 때의 고문으로 그녀는 평생 끔찍한 후유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기모노를 입고 오비에 2·8 선언문 숨겨 귀국

김마리아는 그러나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여성 독립단체로는 최초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전국에 15개 지부를 두고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쓴 편지는 지금도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다. 비밀리에 군자금을 걷어 독립운동가들을 돕던 애국부인회는 조직원의 배신으로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경에 체포돼 대구로 압송됐다. 결국 선생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사이 고문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병보석으로 가석방돼 1920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고, 이듬해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상해임시정부 최초의 여성 대의원에 선임된 김마리아는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합 하고자 국민대표회의 준비위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후 더 큰 독립운동을 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의 대한여자애국단을 통해 중국의 광복군에게 지원금 등을 전달했다. 그녀는 가정부, 필사원, 도서관 사서 등 궂은 일을 통해 학비를 조달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선 실력 을 쌓아야 한다”며 뉴욕의 명문 콜롬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신학을 공부한 그녀는 귀국 후 황해도 원산의 마르타윌슨신학원 교수로 부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등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다. 이처럼 김마리아는 나라 잃은 조국과 한 마음, 한 몸이 돼 독립의지를 다각도로 실천에 옮겼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고 주창 하며 한평생 국내외에서 선 굵은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한국의 국권상실이 실력있는 인재가 부족하고 가난했기에 당한 것임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항일투쟁은 물론 미래세대 교육, 독립정신 함양, 경제력 향상을 강조하는 등 한민족의 독립과 실력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광복을 목전에 둔 1944년 3월 13일, 향년 52세로 타계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으며 사실 결혼을 못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도 있었는데 김마리아는 성고문을 당하여 한쪽 가슴이 없고 국부는 인두로 지져지는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박용옥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김마리아 선생은 논리와 사상, 실천 면에서 가장 앞서가는 독립운동가이자 열사로, 현재의 독립 장이 아닌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밝혔다.

“독립장이 아닌 대한민국장을 서훈받아야 할 인물”

▲ 3·1 운동 2주년 기념식이 열린 뉴욕 타운홀

지난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 건국에서 미국의 이민 선조들이 행한 3·1 정신의 시발과 계승이 원동력이었음을 미주 이민사는 말해 주고 있다. 3·1 운동 이듬해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은 조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독립운동 기념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캘리포니아 중가주 지역 리들리(Reedly)와 다뉴바(Danuba)에서 3·1 운동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들리 인근 다뉴바에서 1920년 3월 1일 정오 이 지역 한인 선조들이 세계 최초로 3·1 운동 1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벌여 미국 사회에 ‘대한민국이 독립국’ 임을 만방에 알렸다. 한편 그 다음해 1921년 지금으로부터 102년전인 1921년 3월 2일 수요일 저녁 봄비가 내리는 뉴욕 맨하탄 43가 타운홀에서 역사적인 3·1운동 기념 집회가 거행됐다. 당시 뉴욕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30여명으로 추산됐고 필라델피아 등 인근에 있는 한인들이 모두 합쳐도 100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날 행사엔 무려 1300여명이 참석하는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행사는 당시 ‘미국위원회(The American Committee)’의 후원으로 마련됐고 참석자도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출신의 유학생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미국인들의 지지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 3·1 만세운동을 전세계에 최초 AP 통신이 보도했다.

미국 언론이 가장 놀라워한 20세기초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3·1만세운동이었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의 평화 시위였기 때문이다. 총과 칼로 유린당하는 순간에도 시종일관 비폭력으로 맞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에게 큰 감동과 놀라움을 주었다. 3·1운동은 처음엔 외부에 한국인들의 폭동으로 잘못 알려졌다. 당시 조선엔 상주하는 미국 기자가 없었고 도쿄와 베이징에서 간접 취재하는 방식이어서 바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와 행진을 목격한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3·1운동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취재를 시작했다. 1919년 3월 12일 서울에 온 AP 통신 기자가 첫 보도를 했고 베이징에 있던 뉴욕타임스 기자도 같은 날 전문(cable)을 통해 긴급 타전했다. ‘일본 헌병대는 성명서를 들고 있는 소녀의 손목을 칼로 잘랐다. 소녀가 나머지 손으로 성명서를 들어올리자 이번엔 그 손목마저 잘랐다.’(AP통신 1919년 3월 13일)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고 발로 걷어 채이며 칼로 찔리는 등 끔찍한 참상이다. 일본 군인들은 ‘한국 만세(Hurrah for Korea)’라고 외치기만 해도 총을 쏴서 죽이고 있다.‘(1919년 3월 17일 뉴욕타임스) AP는 “정의와 휴머니티를 앞세운 코리아가 2000만 국민을 대표해 독립 선언을 했다. 선언문에서 ‘우리는 4300년 역사에 걸쳐 독립된 나라였다. 우리의 독립 선언은 현재의 고통스런 상처를 없애고 국가적 기상과 활력을 고취시키며 불법적인 일본 정권의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영원한 자유를 구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오늘의 독립 선언은 일본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일본 정치인들이 폭력적인 정책으로 저지른 잘못들을 바로 잡기 위함이다’라고 당당히 외쳤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에서 일어난 독립 운동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졌다. 3월 1일 민족주의자들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펼쳤다. 일본은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시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서울역 등 주요 지역에 헌병대를 투입했다.

일본은 독립 운동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후 수천 명을 체포하는 등 신속한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평양의 장로신학교 학생들을 체포해 옷을 벗기고 그들을 묶어 놓은 채 고문하며 너의 하나님처럼 견뎌보라고 학대했다. 일본인들은 독립 운동을 제압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한국인들은 수면 아래서 펄펄 끓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3일에도 베이징발 기사로 일제의 잔학한 만행을 고발했고 15일엔 ‘평화 시위 참가자 4만 명 체포’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대규모 체포 소식을 전했다. 또 18일엔 ‘미선교단 한국의 평화적 독립운동 설명’,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잔인성 고발’ ‘한국 전역에서 공포정치 (Reign of Terror) 자행’이라는 기사에서 “선교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에게 야만적 잔인성이 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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