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로운 죽음을 원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전쟁 광기에 참혹한 지경에서 고통을 당하는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사람들의 깊은 동정과 관심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에 살면서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에도 전쟁에 재미 한인 청년들도 미국군인들과 함께 참전도 했지만 그 전쟁에 한인사회 전체가 미국 국민들처럼 관심이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인연이 없는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먼 나라로 생각해 왔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갑자기 우리 앞에 매일 영화 스크린처럼 나타나 우리 마음 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있다. 생각해보니 우크라이나는 먼 나라가 아니였다.
우크라이나는 먼나라가 아닌 이웃
제2차 세계대전 종반에 우크라이나 크름 반도 남단 흑해 연안의 얄타 리바디아 궁전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당 서기장,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등 연합국 수뇌들이 모여 패전국에 대한 의견을 나눈 회담(1945. 2. 4~11)이 열렸다. 이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의 38선 분단이 그어지게 되어 우리에게는 슬픈 역사의 장소로 기억된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의 루즈벨트를 감동시키기 위해 크름 반도 바닷가 리콜라이 2세의 여름 별장에 좋은 방과 사무실을 제공하고 각종 집기들을 모스코바 궁전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한편 우리에게 크름 반도는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름 전쟁(1853∼1856년)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는데, 당시 전쟁은 러시아와 오스만튀르크, 영국, 프랑스 등이 중간에 낀 크름 반도를 무대로 싸운 것이다.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우크라이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혈통의 작곡가이다. 이 ‘피아노 협주곡 1번’곡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때 러시아 국가 대신 연주되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아버지인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우크라이나 혈통이다. 차이콥스키의 여동생은 결혼 후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는데 그는 종종 여동생이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크라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 2번’도 우크라이나 카만카에서 작곡했다.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좌와 벌’의 작가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문호 토스토에프스키도 우크라이나 혈통이다. 생존경쟁에 앞장 선 나라라면 아랍국가들에 둘러 싸인 이스라엘이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처음 신병훈련을 마치고 군인으로서 선서식을 갖는 곳이 ‘마사다’(Masada)이다.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이곳의 고대 전쟁사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신병훈련을 마사다에서 끝마치게 했다. 부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한다. 마사다는 2001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사다를 견학한 조현 종교 전문 기자의 글이 오늘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정신을 반영시키고 있다. 마사다(Masada)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이곳을 처음 요새로 만든 것은 대제사장 요나단 (기원전 160~143)이었다. 역사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은 서기 66~70년 독립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세계의 패자 로마는 반란을 허용치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 마저 파괴되고 무려 110만명이 살육을 당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사람의 피가 강을 이뤄 목까지 차올라 왔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 같은 독립전쟁 30여년 전에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언덕을 오르던 예수는 자신을 보며 울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며 ‘유대인 최후의 날’을 예고했던 그리스도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로마군에게 저항하던 열심당원들이 쫓기고 쫓겨 최후에 맞선 곳이 바로 최후의 요새 마사다였다.
우리의 가족들이 욕당하지 않게
서기 72년 로마군 실바 장군이 이끄는 9천명의 세계 최강 군인들이 마사다 요새를 포위했다. 하지만 절벽 위의 요새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실바 장군은 지형이 비교적 높은 곳을 택해 200m 높이의 언덕을 쌓아갔다. 그 공사는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6천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맡았다. 그래서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동족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언덕은 완성되고 마사다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열심당원들을 이끌던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가 최후의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 채로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노예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명예 롭게 자유인으로 죽을 수 있으며, 이 특권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먼저 우리의 재물과 요새를 불태웁시다. 그러나 우리의 곡식창고만은 남겨둡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결한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음 결의한 바와 같이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토록 합시다.
산채로 잡힌 청년들이 계속되는 고문에도 생명이 끊어지지않고 고통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남편은 거칠게 다루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볼 것입니다. 그는 또 두 손이 묶여서 ‘아빠’하고 소리치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의 손이 자유롭게 칼을 들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하직합시다.” 로마군이 요새에 들어왔을 때 자결한 960명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오직 물저장고에 숨어 있던 두여자와 5명의 어린아이들만이 살아 있었다. 이들이 마사다의 최후를 남긴 것이다. 유대인 반란군이었다가 로마군에 투항해 불후의 <유대전쟁사>를 남겼던 요세푸스는 이들의 증언을 기초로 최후의 항전기를 썼다.
지금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은 유대인들의 마사다 역사처럼 최후이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마치 마사다의 최후의 사령관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의 마지막 목소리처럼. “그들이 아무리 산채로 잡으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승리를 그들에게 허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