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어느 호스피스 봉사자가 남긴 글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사는 시간의 길이 뿐 아니라, 그 의미라든가 가치 등 질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차가운 의료기계에 둘러싸인 채 단지 육체적으로만 오래 사는 것보다도,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며 자기다운 삶을 온전히 사는 문제가 훨씬 중요한 과제이다”라고 했다.
지난 9일 오후 3시 이(김)춘자 회장(Susan Lee, 재미독립유공자유족회장)의 천국환송예배가 정창운 목사 집례로 한국장의사에서 엄수됐다. 고 이 회장은 지난 3월 31일 81세를 일기로 타계 했다. 코로나-19가 조금씩 물러가도 아직은 장례식 참석이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날 한국장의사에는 좌석이 모자랄 정도의 많은 조객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평소 고인이 인연을 맺었던 ‘일사회’(회장 박철웅), LA평통, LA한인가정교회, 미주3·1여성동지회(회장 그레이스 송), 평화대사협의회, 연세대동창회, 꿈나무 야구교실, 선화한글학교, 자유대한지키기 운동 등 관계자들이 고인을 진정으로 추모했다. 또한 평소 고인이 인종을 초월하여 펼친 봉사를 받은 주류사회 백인들과 타인종 인사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헌신적인 자원봉사자의 순간들
이 자리에 평소 고인과 오랫동안 교류를 지내왔던 민병국 전 미주방송인협회장은 조사를 하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 “고인을 통해 처음으로 자원봉사의 보람을 배웠습니다”면서 “본인이 2000년대 ‘꿈나무 야구 교실’을 운영할 때 무려 20여년간이나 팀 마더(Team Mother)로 봉사하신 일은 어느 세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봉사였습니다”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어 눈물을 닦으며 관속에 누운 고인을 바라 보며 “누님! 오늘 먼저 하늘 나라에 편히 가세요. 저도 조만간에 따라가 뵈올 것입니다”라고 하직 인사를 했다. 고인이 생전에 교장으로 봉사했던 선화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던 히토에(Hitoe)씨는 또렸한 한국말로 “선생님께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 한국말을 배우게 되어 보람을 느꼈습니다”라고 말하며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봉사정신을 받들어 나가겠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이날 순서에 없는데도 조객으로 참석한 김복임 여사(미주근우회장)는 “우리 커뮤니티에서 이춘자 회장처럼 자원봉사를 오랫 동안 헌신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면서 손수 ‘애국애족상’을 제작해 유족에게 전달했다. 또 다른 조객 윤익중 대령(미방위군사단)도 “평소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 활동을 하셨던 이춘자 여사를 존경해 왔는데,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이자리에 나왔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날 장례식장에서 슬라이드로 비쳐자 회장의 지난동안 삶의 순간들의 장면들을 보면서 기자는 고인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50년전인 70년대 초기, 지금의 LA한인회(당시 남가주한인회)는 웨스턴가의 4층 건물 한인회관이 아니라, 올림픽과 매그노리아 코너(2559 W. Olympic Bl. LA, CA 90006)에 자리잡은 단층의 아주 허름한 작은 방 두개를 빌려 쓰고 있던 때였다. 당시 LA한인사회는 동포 수가 1만명을 막 넘으며 팽창일로에 있었다. 무엇보다 1972년 4월 19일 KAL이 서울-LA노선에 처음 여객기를 취항하면서, 한인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KAL타고 왔습 니다”라는 말이 유행되기 시작했으며, ‘KAL을 타고 온 동포 10인중 6명은 LA에 남고, 나머지 4명은 동부로 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자는 72년 LA로 와서 처음 한인회를 찾아 갔는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자신이 ‘쇼셜 워커’라며 자상하게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는데, “(속으로) 어쩌면 만물박사 닮았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기자는 당시 ‘소셜워커’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봉사
그녀는 그 다음 해 한인회 사무국장이 되어 전문 봉사자로 나섰다. 당시 한인 식당에 ‘소리함’을 설치해 동포여론을 청취했으며, ‘결혼 상담소’도 설치해 동포들의 경조사를 도와주었다. 또 남미에서 무작정 미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의 여권 문제도 총영사관에 건의해 나중 해결해 주었고, 72년 3·1절 행사를 한인회가 다운타운 LA컨벤션센터에서 개최했는데 동포들이 무려 700여명이 운집했는데 이춘자 사무국장의 노력이 컸다.
그녀는 71년 2월부터 한인회에 나와 무보수 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6월에 한인회 주최 야유회를 개최했는데 600여명이 참석해 모두가 놀랐다. 오늘의 LA한인사회가 50-100만명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3·1절 행사를 포함 국경일 행사에 참석자가 700명을 넘은 예가 없다. 고인과 기자는 그후 50년을 지나오면서 커뮤니티 봉사자와 기자의 생활을 하면서 행사장에서 가끔 만나곤 했다. 기자의 취재 노트에 담겨진 많은 기록에서 고인은 한인 단체들 활동에서 빠지지 않은 자원봉사자로 수록되어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부친 김덕원 애국지사의 혼을 이어 받은 딸로 이춘자 회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나라사랑 활동에 헌신했으며, 미주류사회 진출하는 정치인 후원 봉사 활동에도 열성적이고, 대한민국이 6·25 전쟁으로 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도운 미국 참전용사를 위한 감사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지난해 기자는 코로나 시절에 열린 ‘일사회’ 모임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을 때 이 회장은 오랜만에 만난 기자에게 “내 인생의 가장 힘없고 외로운 마지막 시기를 그래도 일사회에 나오면 살맛이 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주어 좋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기자에게 지난 1월 6일 카톡으로 보낸 동영상은 바로 ‘일사회 2021년 망년회 행사’였다. 그녀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지난 9일 천국환송예배를 집전한 정창운 목사는 “고인은 4·19 학생운동 여자 선봉장이었고, 애국 애족을 실천한 봉사자였습니다”면서 “고인은 운명하기전 3개월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름들을 써 놓으면서 ‘이 세상에 와서 인연을 맺고 가서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라고 쓰셨다”고 소개 하면서, “이제 우리 모두가 이 회장님의 마지막 길을 박수로 보내 드렸으면 합니다”라고 말하자, 조객들은 한결같이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남 모르는 50년간의 봉사활동
LA에서 무려 50여년 동안 봉사활동을 했던 이춘자 회장, 남모르게 양로원이나 요양원을 찾아 홀로 외롭게 지내는 노인들을 위로했으며, 임종환자들도 찾았다. 젊은이 못지 않게 활동적인 이춘자 회장은 바쁜 봉사활동에도 불구하고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런 그녀가 지난 1월 초 뇌졸증 증세를 보였다. 응급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재활병원에서 몸을 단련 시키기도 했지만 3월 들어서 극도로 쇠약해 지면서 3월 29일 혼수상태로 발견되어 다시 병원에 입원했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31일 오전 10시 50분 눈을 감았다. 부활절이 다가온다. 올해 부활절(4월 17일)은 고 이춘자 회장이 살아 있었으면 81회 생일이 된다. 요즘 한인사회 원로들이 부쩍 많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동안 한인타운을 위해, 그래도 일익을 담당했던 원로들에게 우리 커뮤니티가 어떻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어떤 사람이 진실로 소중한 사람인가를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