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세월이 가도 4·29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책임과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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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 갈등의 원인은
‘우리들에게 있었다’

■ LA인구의 5% 한인 피해가 전체 피해의 40%가 넘어
■ 총 3,767채의 방화 약탈 파괴 2,617채가 한인 소유
■ 한인 1.5세 2세들이 ‘4·29 진상위원회’ 로 진실추적
■ 진정한 화해 없으면 제2의 ‘4·29 폭동’ 발발 가능성

30년전 1992년 4월 29일 LA에서 발생한 4·29 폭동 당시 LA시 400만 인구 중 5%인 한인들의 피해가 전체 10억 달러 재산 피해 중 약 4억 달러로 40%를 차지했다. 총 3,767채의 건물 방화 약탈 파괴가 일어났는데 그중 2,617채가 한인 소유였다. 당시 LA경찰과 LA세리프는 폭동 기간 중 총 6,345명을 체포했으며, 폭동 후 11,000여 명을 체포했지만 대부분 풀려났다. 당시 LA 타임스를 포함해 ABC 방송 등 주류언론들은 폭동의 원인을 한흑갈등으로 몰고 갔다. 미국정부는 부촌 베버리 힐스를 지키기 위해 한인타운을 맞불작전의 불쏘시개로 이용했다. 30년이 지나고 있는데 책임지는 주체가 없다. 왜 그럴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4·29 폭동 발발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왜 피해를 당해야했는지 이제는 곰곰히 되씹어야할 시간이다. <특별취재반>

올해는 4·29 폭동이 발생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미주한인사회의 1.5세와 2세 단체들은 <왜 폭동에서 유독 한인사회가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다. LA인권변호사 김도형 1.5세 변호사는 1992년 4월 29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하버드 대학 기숙사 방에서 TV를 통해 불타는 LA코리아타운을 지켜보았다.

그는 1년 전 한흑갈등을 막아 보려고 LA 코리아타운과 흑인촌을 쫓아다니며 활동했던 일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는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의 가족이 첫 번째 터전을 잡은 곳은 LA 코리아타운 한복판의 월세 100달러짜리 아파트였다. 주위엔 갱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마약 중독자 들이 서성거리고, 빈곤과 실의로 자살 등이 빈번히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 김도형 변호사

그러나 김씨는 “가진 것은 없으나 가치 있게 살라”는 부모님의 가정교육에 충실했다. 그리고 동네 흑인 아이들과 라티노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한인들과 흑인들 간에 증오하고 멸시하는 환경을 바꾸어 보려고 흑인 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흑인민권단체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소년원과 교도소의 흑인 재소자 들을 돕는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은 공익 변호사가 되어 LA한인사회와 흑인, 그리고 라티노 사회 등을 포함한 다인종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이 어린 시절 주위에서 함께 살아왔던 여러 인종 이웃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LA 인권변호사 김도형씨가 이끌고 있는 ‘K.W.Lee Leadership Center’ 는 고등학생과 대학 초급생들에게 4·29 역사를 가르치고 한인사회가 해야 할 과제들을 논의한다. 김 변호사는 지난 2005년 4월 1일 워싱턴주 시애틀시 소재 워싱턴 대학교에서 개최된「전국 한인 대학생 지도자회의(KASCON)」에서「4·29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라는 개막식에서 <징검다리>를 주제로 기조 연설을 했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던 한국의 고향 마을에서는 징검다리를 통해 다른 마을과 어울렸습니다… 미국에 온 우리 1세 부모들은 수십년간 아메리카 땅에서 군림해 온 인종편견의 희생자들 입니다. 이제 우리 2세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복지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다른 인종들의 복지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비전을 지니고 이 땅에서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아 한인의 울타리를 벗어나 주위의 다른 인종과 함께 번영을 추구해야 합니다”

“뼈와 살을 깎는 반성 있어야”

한편 시카고 지역의 UIC 대학에서는 2005년 한인이민 역사를 재조명하는 포럼을 통해 4·29 폭동에 대해 알게 돼 자극을 받은 한인 2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4·29 조명 작업을 시작했다. UIC 대학의 한인학생회(KAUSE) 데이빗 신 회장은 “우리들이 4·29에 대해 무지했던 사실을 새롭게 깨우쳤다”고 말했다. 그는 “폭동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웹사이트 개설과 조직을 구성해 활동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데이빗 신 회장과 함께 포럼을 기획한 헬렌 전 UIC대 교수는 “ 4·29 폭동을 끝난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한인 젊은 세대들은 타소수민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포럼의 의미를 설명했다.

또 한편 뉴욕 지역에서도 당시 한인유권자센터(소장 김동석)와「한뜻열린마당」(회장 허영욱), 그리고 CUNY 법대「한인학생법률봉사동아리(KASIA)」등의 한인계 시민단체들도 4·29 폭동을 재조명했다. 이들은 흑인 및 라틴계 등 소수민족과의 관계개선,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 등의 과제를 토론했다. 이들은 LA폭동의 근본적인 이유를 높은 빈곤율 등의 경제적인 요소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차별로 요약했다. 특히 이들은 한인 커뮤니티의 미약한 정치력과 한·라틴계의 노사 갈등으로 인해 제2의 폭동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다인종 사회와 관계개선 부터

▲ 4·29 폭동 당시「평화 대행진」모습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현재 한인업소에서 일하는 라틴계 노동자들이 한인 고용주를 상대로 임금, 노동조건 등의 법정소송을 벌이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며, “일부 지역에서는 한인 상가의 라티노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등 제2의 4·29 폭동 발발 가능성이 보인다”고 경고 했다. 그는 “이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흑인이나 라틴계 등 다인종 사회와의 관계개선이 중요 하다”면서 “한인 사회의 정치력 신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LA폭동(1992년 4월 29일)은 발생 1년 전인 1991년 3월 3일 LA경찰국 소속 백인 경찰관 4명이 흑인인 로드니 킹(27)을 집단 구타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이날 밤 자정께 LA 근교 밸리 지역에서 5∼6대의 경찰차가 과속으로 달리던 한 대의 현대(Hyundai) 승용차를 뒤쫓은 끝에 멈춰 세웠다. 백인 경찰관들은 그 차를 운전하던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끌어내려 경찰봉과 주먹, 발길질로 마구 구타했다. 마침 이 장면을 근처 아파트에서 한 시민이 녹화했다. 이 녹화 테이프가 방송을 통해 전국적인 뉴스로 비화됐고, 해당 경찰관들은 기소됐다.

이후 1년여 동안 법정공방이 진행됐다. 백인 지역에서 백인 배심원이 대부분인 법정에서 심의가 벌어졌다. LA근교 시미밸리 지방법원의 배심원들은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20분 로드니 킹을 직접 구타한 4명 중 3명에게는 무죄를 평결하고, 나머지 1명에게는 재심사를 결정했다. 배심원은 모두 12명으로 백인이 10명, 히스패닉계과 동양계가 각각 1명이었다. 무죄 평결 소식은 TV와 라디오로 즉각 발표됐다. 당시 흑인계 톰 브래들리 LA시장은 “믿을 수 없는 평결” 이라고 했다.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달리는 트럭에서 백인 운전사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그대로 TV로 방영됐다. 어둠이 내리면서 다운타운 LA경찰 본부 앞에서까지 불길이 올랐다. 폭동은 약탈, 파괴, 방화로 이어졌다. 한인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흑인들과 라티노 폭도들의 폭동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4·29 LA폭동에서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당한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30년이 지닌 오늘 까지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30년이 지나도 답이 없는 까닭

▲ 한인 2세들이 ‘4·29 진상’ 규명을 다짐하고 있다.

1.5세 김도형 변호사를 위시한 <4·29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는 다음 8가지 의문을 집중 추적 하고 있다. 첫째, 폭동이 1차 진압된 1992년 5월2일 LA카운티 셰리프(카운티 경찰)의 셔먼 블록 국장 (작고)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은 한인 상인들에게 인권침해적 피해를 준 폭동혐의자들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 “이들을 인권법 위반으로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조사는 흐지부지되어 버렸고 지금까지 조사결과에 대한 발표가 없다. 또한 이날 FBI의 LA지부장도 기자회견에서 폭도들을 인권법 위반으로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으나 그 수사 역시 아무런 진전이 없다. 폭동 3일 동안 50명이 사망하고, 4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약 1만 2000명이 난동혐의로 체포됐다. 사법 당국은 아무런 해명 없이 폭도들의 인권침해 사항에 대해 수사를 중단했다. 그 배경을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LA경찰국(LAPD)은 폭동이 발생한 4월 29일과 30일의 초기 2일 동안 왜 코리아타운을 방어하지 않고 철수했는가?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무방비 상태였다. 이들 경찰은 왜 약탈과 방화를 당하고 있던 한인 상인들의 구조요청을 묵살했는가? LA경찰국은 당시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배버리 힐스와 웨스트LA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코리아타운 뒤편에 방위선을 설치했다. 결과적으로 코리아타운이 폭도들에게 유린당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했다. 무슨 이유로 그 같은 방위선을 설정하게 됐는지 밝혀야 한다.

셋째, LA경찰국은 4·29 폭동의 시발점인「로드니 킹 사건」재판에서 4명의 경찰관이 무죄평결이 날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폭동) 사태에 대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조치들은 무엇인가?

넷째, LA경찰국은 폭동 발생 전 이미 ‘갱 퇴치 특별단속반원’의 정보를 통해서 일부 갱단들이 <나타샤 할린스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코리아타운과 사우스센트럴(흑인집단 거주지역)에 있는 한인상가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탐지하고 있었다. 당시 시중에 “크립스, 블러즈, 멕시칸 마피아, 18스트릿 갱 등의 갱단들이 한인상가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들 갱단이 4·29 폭동 중 방화와 약탈, 그리고 총격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은 미국주류 언론에서도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LA경찰국은 흑인 갱들이 한인 상인들을 표적으로 한다는 정보에 대해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LA경찰국과 FBI는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 인가?

다섯째, LA경찰국은 폭동 당시 자신들의 상점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했던 한인들을 체포하는데 급급하면서도 한인상가를 상대로 약탈하고 총질하는 폭도들에 대해서는 방관했다. 또한, 당시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으로 향하는 대로인 웨스턴, 놀만디, 버몬트 쪽으로 몰려가도록 유도해 결과적으로 이 거리에 포진한 한인 상가들과 코리아타운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여섯째, 한인 폭동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당시 피해보상을 지불할 수 없는 보험회사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보험회사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보험국의 감독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이들 보험회사 중 과반수가 캘리포니아주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 말하자면 주보험국이 직무유기했던 것이다. 주보험국은 피해자들이 제기한 불평사항에 대해 조사를 벌였는가? 또한 사기보험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는가?
일곱째, 폭동 당시 정부 구호기관인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피해자들 사이에서 조롱거리였다. 왜냐하면 아주 소수의 피해자만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은행의 채무이행 조치로 주택과 상점을 빼앗겼다. FEMA가 행한 조치는 무엇이었는가?

여덟째, 폭동 후 소수의 주유소와 식품점만 시공청회를 통해 재개업을 할 수 있었다. LA시 당국이 재개업을 위한 허가조건을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재개업을 허가 받지 못한 상점들은 무슨 이유로 거부되었는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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