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모래처럼 단단해져야 제2의 4·29 막을 수 있다’
30년 세월이 흘렀건만…
‘진상규명과 사과 없었다’
4·29폭동 30년이 되었는데,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당시 폭동에서 최대의 피해자인 한인사회는 아직도 수난의 연속이지만, 가해자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더 무서운 사실은 미국 정부를 포함해 폭동을 부추긴 주류 언론들을 위시해 어느 누구도 LA코리아타운에 대해 진정한 사과는 없었다. 사과가 있어야 용서가 따르는 법이다. 미국의 공영 방송인 PBS TV 는 LA 4·29 폭동 13주년을 맞은 지난 2005년「젖은 모래」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영화는 폭동에서 한인으로 유일하게 희생된 이재성군의 어머니 이정휘씨의 한을 전했다. 그녀는“젖은 모래는 손 안에서 단단하게 쥘 수 있으나, 모래가 마르게 되면 손가락 사이로 떨어 져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고 했다. 한인들이 4·29 폭동 직후에는 젖은 모래처럼 한 덩어리로 단결 하였으나, 불과 1년의 세월이 지난 뒤 마른 모래처럼 부서져 4·29 폭동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젖은 모래」를 방영한 PBS 방송은 4·29 폭동이 한인, 흑인, 라티노 등을 포함한 미국사회의 소수 유색인종들이 직접 간접으로 당한 현대사의 비극이다라면서 이 다큐멘터리는 수난을 당한 소수민족들이 <젖은 모래>처럼 단결하여 인종 차별과 빈부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4·29폭동 30주년을 기해 한인사회와 주류사회가 3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렸다. 특히 이번 4·29폭동 30주년 행사에도 1992년 LA 폭동 때 한인사회가 ‘왜 피해자가 되어야 했는지’와 ‘우리가 당한 피해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에 대한 목소리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4·29 폭동 이후 한인이면 한 번쯤 생각하는 주제이다. 1992년 4·29폭동 당시 부시 대통령이 LA를 방문했다. 당시 한인들은 부시 대통령의 숙소인 다운타운 보나벤추어 호텔에 달려가 데모를 벌였다. 시위대의 한인여성은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 나라 전쟁에도 즉각 출동하면서 왜 우리 코리아타운 보호에는 늑장을 부렸는가?”라고 항변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4·29흑인폭동 피해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전용기인공군 1호기 편으로 1992년 5월 6일 오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부시대통령은 공항에서 도착성명을 통해 “연방 정부가 6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 재해복구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부시대통령은 “폭력이 없이 평화가 있어야 복구 사업이 가능한데 LA가평온을 찾은데 안도한다”고 말하고 “이제 시민들은 편안히 복구 사업에나서야 할 것”이라고 피해주민들을 격려했다. 부시대통령은 7일 오전 흑인폭동의 시발지였던 사우스센트럴 LA를 돌아본뒤 오후에는 코리아 타운과 라디오코리아 방송국을 방문해 커뮤니티 대표자들을 만나고 코리아타운의 피해지역을 둘러보았다. 당시 한인동포 3천여명은 6일 저녁 부시 미대통령의 LA도착에 때 맞춰 숙소인 LA중심가 웨스턴 보나벤처 호텔 앞에서 한인피해에 대한 미 정부의 보상 등을 요구하며 5시간여 동안 시위를 벌였다. 4·29 폭동 후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에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 빌 클린턴 대선 후보자를 포함해 많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한국의 정치인들이 부리나케 찾아온 지역이 되어버렸다. 마치 관광지로 된 것 같은 지역이었다.
말로만 한인위로, 실제는 책임전가
4·29폭동 후 이경원 원로 대기자는 틈만 나면 미국의 대학들을 순방하면서 한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4·29 역사를 가르쳤다. “너희들의 부모들은 언어 문제로 할 말을 못하고 있다”면서 “너희들이 부모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고, 그것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당시 이경원 대기자가 미국정부와 미국사회에 제시한 4·29 폭동의 진상을 요구하는 질문 서이다.
1) 4·29 폭동 당시 LA 카운티 세리프 셔만 블록(Sherman Block) 국장과 LA지역 FBI 국장은 한인 들에게 가해자 대규모 인권 위반자들을 기소하겠다고 공언하고서는 이를 이행치 않았다. Why?
2) 당시 LA PD 경찰은 폭동 발생 2일 동안 수많은 한인 상인들과 한인 거주자들의 보호 요청을 거부했다. 그 대신 경찰들은 코리아타운의 뒤편의 웨스트 LA와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망을 구축했다. Why?
3) 당시 LA PD는 ‘로드니 킹 사건’과 ‘라타샤 할린즈 사건’ 발생 후 정보망을 통해 흑인 갱들과 라티노 갱들이 한인 상가에 대한 보복행위를 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Why?
4) LAPD는 ‘로드니 킹 사건’ 재판에서 4명의 경관이 무죄 평결 될 경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5) LA PD는 폭동 당시 폭도들이 한인 상가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것을 방치하는 대신에, 한인들이 무장해 자신들의 상가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을 체포했다. 이 같은 명령은 누가 내렸는가?
6) ‘라타샤 할린즈 사건’과 관련해 마지막 특정 부분만을 편집해 방영이 됐는데, 이 같은 편집은 LA PD 인가, 검찰인가 또는 언론 기관인가? 진상을 밝혀라.
7) 폭동 중에도 ‘로드니 킹 구타 장면’과 ‘라타샤 할린즈 사건’이 계속 주류 언론에서 왜곡 편집 보도를 했는데 누가 책임인가?
8) 한인 폭동 피해자들에 대한 보험 혜택 문제에서 주 보험국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주지 못했다. Why?
9) 폭동 구호차 출동한 FEMA 측이 제대로 한인 피해자들을 적절히 도와주지 않아 주택이나 사업체를 잊어버렸다. Why?
10) 폭동 후 피해 복구에 나선 한인 피해자들을 LA 시의회가 업체 면허 갱신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했다. Why?
정부 책임론 주장하는 한인 원로기자
4·29 폭동이 발생한지 30년이 지나가지만 한인 사회가 당한 피해 보상과 명예 회복은 요원하다. 미국정부가 이를 책임지고 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보상을 위해서는 한인사회가 법적 투쟁 도 선행돼야 한다. 한인사회의 원로 법조인인 민병수 변호사는 “인권투쟁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면서 “죽기를 각오 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송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겠지만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 한인타운의 미래 즉 우리의 차세대들을 위한 싸움”이라며 “우리의 발언권과 민권을 찾는 싸움에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민병수 변호사는 “아시아 인종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들도 지난 동안 약 200개의 민권 소송을 제기했다”면서 “그중에서 불과 몇 개 만 승소했다”면서 인권투쟁의 어려움을 밝혔다. 따라서 그는 “인권운동은 죽어라 해야 한다”면서 “흑인들의 역사에서 300여년 동안 민권 투쟁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진주만 폭격’(1941년 12월7일) 사건 이후 미국에 거주하는 약 12만 명의 일본계 시민권자 밎 영주권자들을「국가안보의 위험한 존재」라며 강제로 수용소에 보냈다. 당시 루스 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행정 명령 9066호」를 발동해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2, 3세들까지 부모와 함께 수용소에 억류시켰다. 일본 이민사에서 최대 수난으로 기록되는 이 같은 강제 수용소 생활은 나중에 수용소에서 풀려난 2, 3세들이「왜 우리들이 아무런 혐의도 없이 일본계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보내져야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일본계 2, 3세들은 미국 정부의 강제수용소 격리 조치에 강력하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일본인 2세 프레드 고레마쓰, 민 야수이, 고든 히바라시 등을「민권투쟁」의 표상으로 삼았다. 20대의 프레드 고레마쓰는 일본인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미군이 지시한 소집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이탈리 아계 애인과 도주했다. 유타주에서 은신하고 있던 그는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됐다. 그는 재판정에서 “일본계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은 수정헌법 14조의 위반” 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18일 법정은 고레마쓰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연방법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유타주 수용소로 보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법정투쟁을 벌였다. 결국 1983년 11월 10일 미 연방지법은 “전쟁 중이라도 기
본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면서 고레마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본계 2세들이 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한지 40년 만의 승리였다. 결국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보내졌던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법에 서명했는데 총 16억 달러의 배상액이 결정됐다. 이 법에 의거 1990년부터 과거 수용에 보내졌던 일본계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1986년 캐나다 정부도 제2차 세계대전 때자국 내에서 일본인들을 부당하게 수용시킨 점을 사과하면서 2억 3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미국 정부는 1971년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10억 달러를 배상하고 약 4400만 에이커의 땅을 돌려 준 일이 있다. 1980년에는 오리건주에 거주하는 인디언 클래매스(Klamaths)족에게 8100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1985년에는 사우스 다코다주의 인디언 수(Sieux)족에게 1억 500만 달러, 위스콘신주의 인디언 치피와스족에게 3100만 달러, 플로리다州의 세미놀수족에게 1200만 달러를 각각 지급했다. 1986년에는 미시간주의 아타와스족에게 32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미국의 흑인 단체들도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 과거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미국내 일본인,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배상을 하면서 왜 흑인 노예 착취에 대한 배상은 없는가?』라며 투쟁을 하고 있다.
흑인에 대한 폭력 린치와 흡사
한편 UN도 미국 정부가 흑인들에게 노예제도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2016년 밝혔다. 유엔은 지난 2002년 인권위원회 산하에 “미국 흑인 문제 조사 전문가 위원회”를 설립하고 미국의 흑인 차별 실태를 조사해왔다. 위원회는 14년 동안 미국 주요도시를 돌며 정부 및 시민들과 면담을 통해 인종차별 실태를 조사한 끝에 2016년 9월에 노예제도에 대한 배상금 지금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 했다. 보고서는 에릭 가너, 마이클 브라운, 타미르 라이스, 월터 스캇, 프레디 그레이, 라콴 맥도날드 등 경찰에 의해 사살된 흑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경찰관들의 흑인에 대한 과도한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조사에 참여한 한 프랑스인 전문가는 “현재 미국 경찰관들의 흑인 사살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과거 노예제도 시대 흑인에 대한 린치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