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폭동 30주년 ‘이제라도 밝혀야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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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4·29 폭동을 기념할 자격이 있는가’
‘30년 지나도 아직 4·29 원인 이유 깨닫지 못해’
‘세계곳곳에서 답지한 성금 둘러싸고 진상 의혹’

폭동성금 중 700만 달러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인 정치력 부재
■ 정치인들의 ‘두 개의 얼굴’을 모르는 한인사회 침묵
■ 주류정치인들에게 손도장 찍는 한인들 행태가 문제
■ “4·29 후예들” 뜻있는 2세들에게 희망을 걸어 봐야
■ 폭동성금 1,200 만 여 달러 분쟁은 한인추태의 극치
■ 성금관리위원회, 피해자협회, 언론사 치고 받고 대립
■ 30년 지난 오늘날 엄청안 성금 의혹 진상 오리무중
■ 유대인 커뮤니티 ‘왓츠 폭동 성금’ 현재까지도 혜택
특집 시리즈                                                                                                                                                                       1) 4·29 폭동에서 밝혀저야 할 진실
2) 4·29 폭동에서 미국정부의 책임
3) 4·29 폭동에서 배워야 할 교훈

▲ 본국에서 온 4·29 폭동 성금 수표(사본)

우리가 보통“사-이-구(4·29) 폭동”이라고 부르는 LA폭동 30주년을 맞아 한인사회와 미주류 사회에서 다양한 장르의 행사가 펄쳐졌다. 대부분의 행사가 미래를 향해 새롭게 나아가자는데 초점을 두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30년 전의 피해를 당한 한인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이웃의 아픔은 계속 남아 있는데, 옆에서“평화”와“화합”을 외치면서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30년이 지났는데 4·29 폭동의 진상은 아직 밝혀 지지 않았고 최대 피해자인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공식적인 사과도 없었다. 당연히 피해 보상도 없었다. 우리는 30년 전에“우리가 힘이 없어 당했다”라고 했는데,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한편‘4·29 폭동에 한인들이 가장 피해가 크다’라는 당시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의 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보내왔는데 자그만치 1,200만 달러가 넘는 구호금이 답지했다. 전무후무한 성금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성어린 성금을 두고 한인사회가 갈갈이 찢기는 분쟁으로 한인사회는 치욕스런 역사를 점철하면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몇몇 인사와 단체들의 성금 갈취 의혹으로 남겨 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4·29 폭동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을가. 과연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로 돌릴 자격이 있는지 곰곰히 되새겨야할 대목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사-이-구(4·29) 폭동>에서 한인으로 유일하게 희생당한 이재성(당시 18세)군의 어머니 이정희 여사는 폭동 당시 아들의 장례식이 열렸던 LA 한인타운 ‘서울국제공원’(구 아드모어 공원)을 3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찾았다.이 군의 어머니는 “공원 부근을 지나는 다녔지만 와보고 싶지 않았어요. 보고 싶은데 못 와요. 30년 만에 이 공원 땅을 밟아본 건 처음이에요”라면서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이재성군이 왜 희생을 당했는지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4·29 폭동이 일어나고 10여년이 흐른 2005년 OC에 있는 한국순교자성당의 한국어학교에서는 토요일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클래스가 있었다. 당시 프리랜서 기자였던 김지현씨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4월 어느 날 학생들에게 4·29폭동 다큐멘터리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 주고, ‘사이구’ 폭동에 대해 느낀 점을 적어 보라고 했다. 한 학생이〈흑인 동네 사람들에게>하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나는 미국에서 사는 한국 사람입니다. 사-이-구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로드니 킹 재판의 무죄평결에 대해서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리커 상점에서 흑인 소녀가 죽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우리가 리커 상점에서 일하면서 친절하게 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젠 더 착하게 살겠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들과 사이가 좋으세요?”

이 글을 쓴 이정준 어린이는 4·29 당시 숨진 이재성군의 어머니에게도 글을 썼다. “이재성 형이 죽어서 안됐습니다. 한국인들을 도와주려고 간 건데 총을 맞게 돼서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세요? 지금도 마음이 많이 아프세요? 이제는 우리 모두 흑인들이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윤준혁이란 어린이도 <흑인 동네 사람들> 앞으로 글을 썼다.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로드니 킹 아저씨도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재판도 나쁘게 끝이 났고, 경찰도 정당하지 못해서 유감스럽습니다…. 나는 이 비디오를 보고 화가 났습 니다. 이제는 우리 서로 도우며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지현이란 어린이는 <베벌리힐스 주민들에게>라는 글을 썼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저는 13년 전에 생긴 사건이「사-이-구(4·29)」또는 「LA폭동」이라고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들은 베벌리힐스에 사는 사람들만 도와주었습니다. 당신들의 커뮤니티가 더 좋아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대우를 해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으셨나요? 저는 폭동 당시를 직접 목격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래도 매우 슬픕니다.”

문화적 차이가 빚은 폭동 참상

워싱턴 포스트지는 2002년 <4·29 폭동 10주년> 특집기사에서 <알리>라는 가명으로 보도된 한 청년이 4·29 폭동 당시 갱단들의 지시에 따라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병에 담았다고 보도했다. 그 청년은 <나타샤 할린스 사건>에 대한 응징이라고 실토했다. <나타샤 할린스 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진 후 13일 만인 1991년 3월16일 15세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스 가 한인 상점주의 실수로 사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 운명의 날 두순자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엠파이어 마켓’에서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몰래 가방에 넣는 장면을 목격했다.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과 손찌검이 오갔고, 결국 난투 끝에 당황한 두순자씨는 고장난 권총 방아 쇠를 당겨 할린스를 절명케 했다. 당시 경찰에 의하면 엠파이어 마켓은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18개월 동안 흑인 갱단인 ‘크립스’ 일당의 테러에 시달려왔다. 당시 LA타임스는 <나탸샤 할린스 사건>에 대해 26건의 기사를 보도했다. 한인사회는 이 기사들이 불필요하게 ‘1달러 79센트짜리 오렌지 주스 한 병 때문에 소녀를 죽인 한인 상인’을 자꾸만 강조 하고 있음에 경악했다. 이 문구가 노리는 바는 분명했다. 한인들이 흑인의 생명을 ‘1달러 79센트’ 도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주류 언론들의 한인상인에 대한 반감도 높아 갔다. 나타샤 할린스가 등 뒤에서 총격 당하는 짧게 편 집된 비디오 테이프 장면과 함께 “한인상점 주인이 1달러 79센트짜리 오렌지 주스 하나로 15세 흑인 소녀를 살해 했다”는 기사나 보도가 흑인사회 사람들의 머리에 깊게 각인됐다.

▲ 4·29 폭동 당시 불타는 상가

당시 재판에서 경찰과 나타샤 할린스의 가족들이 모두 “이 사건이 인종차별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증언했다는 사실이나, 재판에서 그러한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LA타임스는 중요 하게 다루지 않았다. LA와 전국의 주류언론들은 두순자씨 가족이 18개월 동안 갱들의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 왔고, 두순자씨가 고장난 권총이라 손가락을 슬쩍 대기만 해도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 으며, 또한 그녀가 당황한 나머지 권총을 발사하기 전까지 나타샤 할린스로부터 얼굴을 네 대나 맞고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할린스는 15세의 소녀였지만 덩치는 두순자씨보다 훨씬 컸다. 재판 결과 두순자씨는 실형이 면제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흑인사회는 분노했다.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징역을 선고하지 않았다며 백인 여판사 조이스 칼린에게 항의가 밀려 들었다. 주류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할 때마다 한인상점 앞에는 피켓과 화염병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한인상인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4·29 폭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ABC 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이런 장면을 로드니 킹 사건만큼이나 지겹도록 틀고 또 틀었다. 시청자들, 특히 흑인들의 가슴에 격노의 감정이 심어졌다.

주류언론들의 한결 같은 ‘반한인정서’ 보도

이 사건이 발생하기전 3년동안 한인 상점들에서 주인이나 종업원들 37명이나 흑인 갱들에게 사살 되었으나 주류 언론들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LA경찰국은 흑인 갱들이 한인 상인들을 표적으로 한다는 정보에 대해서도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LA경찰국과 FBI는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불타는 한인상가를 지나는 경찰

한인사회 최고령 인권변호사인 민병수(90)변호사가 기억하는 4·29 폭동은 더 심각하다. 그는 미주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여러분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흑인(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 졌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를 토해내야 합니다…(정적) 합법적으로.” 당시 민 변호사는 평소처럼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운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탐 브래들리 LA시장이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민병수 변호사가 기억하는 LA 폭동의 시작이었다. “브래들리 시장은 평소 감정이 전혀 없는 차분한 톤으로 말하곤 했다. 몇 번 만나봤기 때문에 그의 성품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날 그는 다분히 감정적이었고 시민들에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어처구니가 없던건 그렇게 흑인들을 선동했던 브래들리 시장이 며칠 후 한인타운에 와서 피해자를 돕고 싶다며 1000달러를 기부했는데 한인 피해자들은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것이다”

라고 말한 민 변호사는 “만일 그 때 브래들리 시장이 라디오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폭동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면서 브래들리 시장의 두 얼굴을 기억했다. LA 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인타운과 한인들이었지만 정치력을 동원한 공격도 계속됐다. LA시는 폭동 이후 사우스 LA지역에 다시 문을 여는 한인 업소들에 치안을 핑계로 내세우며 가게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낙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주류 판매량도 제한시키는 등 운영 조건을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한인들의 재활이나 복구를 막았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시의원은 바로 10지구 마크 리들리-토머스였다. 이를 막을 힘조차 없던 한인 업주들은 평생 지켰 던 일터를 떠나야 했다. LA 폭동에 대한 민병수 변호사의 감정은 지금까지도 복잡하게 남아있다.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던 정치인들의 민낯에 대한 실망감, 피해자임에도 외면당한 한인 커뮤니티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에 대한 아쉬움까지 섞였다. “폭동이 발생한 후 며칠 뒤 한인들이 평화 행진(5월2일)을 벌였다. 그 자리에 에릭 가세티 LA 시장 의 아버지(길 가세티)도 LA 카운티 검사장으로 나와서 연설했는데 함께 나왔던 청년 에릭은 삽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삽’ 은 그냥 정치적 퍼포먼스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민 변호사의 주관과 목표도 바뀐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2003년 LA시의회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한 일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특히 미주 한인 이민 사가 100 년을 맞은 해를 기해 이뤄진 일이라 한인사회에 주는 의미는 더 각별하다. 폭동을 극복한 한인 커뮤 니티의 개척정신과 미국 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90세의 민병수 변호사가 애타게 바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 부재”를 누가해야 하는가?

“주류사회의 공식 사과 받아내야”

이번에 코리아타운 지역이 포함된 연방하원 34 지구에 재도전한 한인 2세 데이빗 김 후보는 “당선되면 제일 먼저 4·29 폭동에 대한 주류사회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는 일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한인사회가 흑인 폭도들에게 방화 약탈 파괴 등으로 무참하게 유린당한 4.29 폭동 후 한달만인 그해 5월 28일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AME교회(담임 세실 머레이 목사)에서 한인교계와 사회단체 지도자 60여명을 초청해 조찬기도회와 토론회를 개최했다.

▲ 민병수 변호사(4·29 당시)

이 교회는 나타샤 할린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인 상점에게 본 때를 보여야 한다’고 선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동수 변호사(KAC 창립자)는 ‘흑인사회가 먼저 사과부터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돌아온 답변은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도, 주류언론도, 경찰도, 흑인사회도 한인사회 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당시 LA카운티 검찰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21-24세 흑인 남성중 50%가 936개 갱단 조직에 직접 간접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총 15만여명이라고 밝혔다. 그중 흑인이 37,000 명이고, 58,000 명이 라티노라고 지적했다. 한편 당시 FBI측은 4·29 폭동전 흑인 최대 갱단 크립스 등이 한인업소에 대한 공격 계획을 나타내는 물증까지 입수했으나 정작 폭동이 발생하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4·29 폭동에서 우리가 무슨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인가에 주저하고 있는데 여기 좋은 예가 있다. LA폭동이 발생하기 27년전 1965년 LA 남쪽 왓츠(Watts)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와츠 폭동” 이라고 부른다. 그 폭동에서 유대인 상점들이 큰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이를 ‘유대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만들지 않았다.

한편 미주 각지의 유대인들이 성금을 모았다. 그들은 그 성금을 이웃과 미래를 위한 투자에 이용했다. LA폭동이 발생하자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한인 유학생들에게도 구호 기금을 무상으로 지원 했다. 지금까지도 왓츠 폭동 성금으로 자신들의 커뮤니티 경제 지원은 물론, 타인종도 지원을 하고 있다. ‘사-이-구 폭동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바로 ‘폭동 성금 의혹’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확실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매년 4·29 폭동 때만 되면 한번씩 들먹이는 것이 성금 의혹 사건이다. 폭동 성금을 두고 우리도 유대인 커뮤니티처럼 효율적으로 이용해 보자는 의견도 나왔 으나 분란의 함성속에서 묻혀버리고 말았다. 폭동 성금 1,000만 달러로 5,000만 달러 재활기금을 활용할 수도 있었는데, LA에서의 성금분쟁을 본 국내에서 지원을 거부했다는 소리도 나왔다.

우선 폭동 성금의 액수가 정확히 얼마가 모아졌는지 모르고 있다. 본국의 적십자사에 모여진 성금 이 미화로 계산하면 450여만 달러 ($4,536,817.31)였다. 그 것만이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 자료: 성금 수표) 그리고 LA지역의 언론사들(미주한국일보, 미주중앙일보, 라디오코리아, KTE 방송, 미주한인방송, 미주한인복음방송 등)이 모금한 것과 교회 단체들과 타주에서 보내 온 것 들을 추산한 결과로 약 7백만 달러가 넘는다는 것이다. 추산일 뿐이다. 당시 미주한국일보 자체가 기탁 받은 액수만도 약 250만 달러가 넘었다. 당시 태어난지 불과 3년 밖에 안된 라디오코리아는 정규방송과 광고 등도 중단하고 24시간 폭동 재난 구조 방송으로 “한국 판 CNN방송”이란 소리를 들었으며, 성금을 기탁하는 청취자들이 많았다.

30년이 지나도 폭동 성금 진상 몰라

▲ 4·29 LA 폭동은 미역사상 최초 대도시 폭동사건이다.

당시 폭동이 군대가 출동하면서 일단 진압된 이후 5월 6일에 LA총영사관내에 ‘4·29 폭동 비상대책 본부 성금분과위원회(9명)가 구성되었는데, 나중에 남가주한인공인회계사협회가 미주지역에서 LA로 보내진 성금을 조사하려고 특별감사 위원회까지 구성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구체적 금액을 밝혀내지 못했다.한 예로 라디오코리아는 당시 시시각각 폭동 성금 접수를 방송으로 보도했는데, 회계사협회에서 성금 모금액을 파악하기 위해 당시 방송 테이프를 요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미주 한국일보는 모금한 성금을 처음에 폭동성금위원회에 전달하지 많고 한국일보 자체가 구호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들에게 성금을 직접 지급하다가 나중 여론에 밀려 성금 잔액을 성금분과위원회에 이관했다. 회계사협회가 언론사를 상대로 성금 모금 관계를 감사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본국 적십자에 접수된 성금 445만 달러가 미국에서 전달되면서 이를 두고 총영사관 및 성금관리위원회와 피해자협회간의 분쟁 사태는 총영사관 농성에다 점거사태와 총영사 사퇴 요구 시위에다 법정 공방 사태 까지 불러왔다. 이 같은 성금 분쟁 상태는 급기야 미국 정부 재무부 산하 비밀경호대(US Secret Service)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한국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한편 성금을 기탁한 미주 동포들은 “내가 기탁한 성금 돌려 달라”라는 분노의 소리까지 나왔다. 여기에 수혜 자격도 안되는 피해자가 $5,000을 타갔다는 소문도 나왔다. 폭동 당시 직접 코리아타운 피해 지역을 찾아 피해 동포들을 위로를 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성금 5만달러도 기탁을 했었는데, 이 같은 성금 분쟁에 크게 실망해 당시 8월 31일 특별 설교에서 LA한인사회 성금 분쟁 행태를 개탄하면서 “폭동의 와중에서 보여주었던 평화대행진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하여 인간애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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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폭동 백일장 장원 작품

(1992년 4·29 폭동 후 LA Veteran’s Memorial Park에서 열린 LA 폭동 백일장이 열렸는데, 대부분 작품들은 폐허 속에 울분과 한흑문제를 다루었는데, 아래 글은 LA에서 코리아타운으로 연결되는 지하철이 없던 1992년 시제를 미래로 끌고 간 점이 돋보여 장원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팜츄리와 자카란타

배수지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 보자.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 보자’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88서울올림픽을 즈음해서 한창 불려지던 때가 있었다. 나는 이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불러 보고 싶다. ‘벌몬에는 쟈카란타 심어보자. 웨스턴에는 팜츄리를 심어보리라’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내려다 보면 코리아타운은 타지역에 비해 녹색의 그늘은 별로 보이지 않고 시멘트 건물들로 삭막해 보인다. 거기에 모여 사는 사람들 마저 왠지 무표정일 것만 같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타고 가로수가 울창한 미래의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가 본다. 때는 21세기 어느 화창한 봄날, 걷기 싫어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며 헐리우드 전철역으로 향한다. 지하철에 오른지 채 10분도 안되어 윌셔 벌몬역에 도착한다.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땅속에서 빠져 나와 밝은 태양아래 우뚝 선다. “엄마, 저 보라색 꽃나무 참 멋있다! 길이 모두 보라색이야.” “으음, 쟈카란다 나무인데 매년 이맘 때 쯤이면 한창 핀단다. 전에 이 동네가 온통 벌건 불길에 휩싸인 적이 있었지.” 조그만 종 모양의 꽃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꽃보라를 가르며 관광 대형 버스들이 벌몬 길에 줄을 잇는다. 버스 문이 열리고 머리 허연 백인 노부부, 흑인은 물론 세계 각종 인종들이 쏟아져 내린다. 그들은 늘어선 쟈카란다 나무에 원더풀을 연발하며 정신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보라색 꽃이 차도 인도 할 것 없이 떨어져 꽃잔디를 이루고 야외 촬영 나온 신부들의 하얀 드레스가 햇살에 눈부시다. 흥겨운 사물놀이 패를 따라 올림픽가로 접어든다. 아드모아 공원(현재 서울국제공원)을 중심으로 덕수궁 돌담길이 둘러서 있고 마치 민속촌에 온 착각이들 정도로 길가 건물 양식은 옛 고전풍이다. 엿판을 둘러맨 엿장수의 가위 장단소리에 꼬마들이 몰려든다. 골목마다 갈비 굽는 냄새가 넘쳐흐른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우리와 눈이 마주친 스페니쉬 할머니는 인종폭동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타운을 그 시절 직접 봤다며 아이에게 악수를 청한다.

손님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한인타운을 관광도시로 만든 한인들의 노력과 관광객들이 뿌리고 간 엄청난 수익금을 한인들이 다시 불우한 지역사회에 환원시킨다는 얘기를 서로 주고 받으며 모두가 감격 스런 하루를 연출해 내고 있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에 섞여 웨스턴 길로 들어선다. 그 비싼 팜츄리가 줄지어 서 있는 웨스턴 길은 정말 든든하다. 우리를 이끌어 갈 믿음의 기둥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 준다. “폭동이 났을 때는 여기가 전쟁터와 같았어. 그걸 TV로 본 외국인들이 한인 타운에 오기를 꺼렸단다. 불경기까지 겹친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지. 그러나 그 때부터 타운을 살리기 위해 나무심기운동을 꾸준히 벌린 결과 이제는 산에서 봐도 얼마나 우거져 보이는지 몰라.”

나도 길 옆 종합마켓으로 들어간다. 관광객들은 골동품, 자게 장식품, 도자기를 어루만지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이는 색동 인형을 고른다. 사람들마다 양손에 쇼핑백을 몇 개씩 들고서 윌셔 웨스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나는 하루종일 걸어 다니느라 피곤해진 다리를 끌고서 길가 벤취에 걸터앉는다. 아이가 내 손을 잡아당긴다. “엄마, 식당 음식 참 맛있다. 이 동네 오니까 나 같은 아시안 애들도 많고…. 엄마, 나 이제 한국말 열심히 할꺼야.”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에 새들이 나뭇잎새를 펄럭이며 지저귄다. 나는 이 아이에게 한국의 얼을 힘껏 불어넣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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