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카투사 희생자 위한‘추모의 벽’최초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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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추모의 벽’한인 카투사
‘전사자 7,052명 이름 새겨진다’

■ 윤석열 대통령 7월 27일 추모벽 제막식 미국방문
■ 한국전 추모벽은 미국 최초 한국 카투사 희생 헌정
■ 6·25전쟁 한국인 카투사 7,052명 ‘대한민국 수호’
■ 전쟁 중 43,660명 카투사 중 11,365명 전사 부상

6·25 전쟁 휴전 제69주년 기념일인 올해 7월 27일 워싱턴 DC 한국전쟁참전공원(Korean War Memorial)에서‘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의벽’(Korean War Veterans Memorial Wall of Remembrance) 이 제막된다. 이 기념 제막식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추모의 벽’에는 36,574명의 미군 전사자와 특히 7,052명의 한국인 카투사 전사자 이름도 함께 처음으로 새겨진다. 이들 7,052명의 카투사도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다 산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공적을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이번에 워싱턴DC에 건립되는 추모벽은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영구적인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한편 지난해 OC플러튼에 한인사회 주도로 건립된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미군 참전자 이름만이 새겨진 최초의 기념비였다. <성진 취재부 기자>

대한민국 남자라면 ‘카투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래 명칭은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 (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으로 주한 미육군부대에 예속 또는 배속된 한국 육군 장병을 뜻한다. 미군 군복에 한국 계급장을 달고 미군부대에서 미군과 함께 복무하는 한국군 병사이다.

카투사는 한국전쟁과 미군의 주둔으로 탄생한 독특한 제도이다. 전세계 주둔 미군 조직에서 유독 한국에만 있는 조직이다.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과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졌다. 우리 국민들 중에도 카투사를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을 정도이지만, 카투사가 6·25전쟁 때 미군과 함께 북한군,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무려 7,052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다. 6·25전쟁 중 미군 5명 전사에 카투사 1명이 전사할 정도로 희생이 컸다. 특히 전쟁 3년 동안에 4만 3천여 명의 카투사가 미군 부대 소속이었는데 참전 카투사 6명중 한 명이 전사한 셈이다. 6·25 전쟁 중 미군이 승리한 전투에는 반드시 카투사의 용맹이 있었다. 전투에서 미군 부대가 전사자가 발생한 곳에 카투사도 함께 있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젊은이들은 ‘Korea’ 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 가는지, 그 땅의 지형은 어떨지를 모르고 나라의 부름에 따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이 같은 미군들이 한국 땅에서 전투를 하는데 함께 싸우면서, 한국의 지형지물을 알려 주고 통역 이나 전방 수색 등등 카투사는 그야말로 미군에게 “생명의 안내자”였다. 전쟁 초기에는 미군 부대에 미군 한 명에 카투사 한 명이 배치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같은 카투사들은 특히 그 유명한 장진호 전투를 포함해 인제·원통의 가칠봉 전투, 원산 상륙작전, 양구의 펀치볼 전투, 폭찹힐 전투 등 미군이 중심이 된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 중 4만 3,66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1만 1,365명의 피해자 중에서 전사자 7,052명이고 나머지는 실종(MIA) 또는 포로(POW)가 될 정도로 희생이 컸다. 초기 카투사 대부분은 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미군 공수부대 출신으로 한국전쟁에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은 윌리엄 웨버 예비역 대령(최근 작고)은 “미국 국민들은 카투사 전사자들이 있었기에 미군 전사자들의 수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이들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카투사가 있어 미군 전사자 줄어

▲ 부상당한 카투사병사를 미군이 업고가고 있다.

최근에 작고한 콜린 파월 전국무장관도 회고록에서 카투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카투사)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군기가 있었으며 지식 습득 능력이 우수했다. 그들은 미군 병사 한 사람이 동두천에서 하룻밤에 맥주를 마시며 써 버릴 수 있는 액수보다 적은 3달러(1973년 기준)를 매월 받을 뿐이었다” 카투사는 인건비 적게 드는 최고급 인력의 비정규직 부대로 파월 전국무장관은 그때 이미 아웃 소싱의 이점을 체험했던 셈이다. 특히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싸운 장진호 전투에서도 많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정말 별로 없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에서도 “사상 가장 혹독한 전투”로 기록될 정도이다.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전사의 2대 동계전투(2차대전 스탈린글라 드와 장진호 전투)의 하나이며, 6·25 전쟁의 3대 전투(인천상륙전, 장진호 전투, 다부동 전투)의 하나 이며, 특히 미해병 역사상 3대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이다.

처음 미 7사단에 배속된 한국 카투사들은 1950년 9월 15일에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 되었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후송되어 훈련을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카투사는 대부분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단지 K문자로 시작된 번호만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사흘 뒤인 9월 18일 인천 앞바다에는 모함과 수송선이 수십 대가 떠 있었 다. 그중 한 대의 수송선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빼곡하게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겨졌다. 한국군 카투사들은 모두 군번이나 계급장 같은 게 달려 있지 않았다. 1950년 9월 18일 인천상륙작전 때 미육군 보병 7사단 병사들로 당시 미육군 7사단에는 한국인 병사인 카투사의 비율이 50%를 차지했다. 미 7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한 카투사는 서울을 탈환하면서 북으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어 10월 19일 평양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 압록강변의 혜산진과 초산까지 진군했다.

당시 장진호 주변에 배치된 유엔군은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2개 대대, 영국 해병 41 코만도 였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하는 길은 장진호 서안과 장진호 동안을 따라 난 길 뿐이었다. 미 10군단(군단장 아몬드) 지휘본부는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 서안으로, 미 육군 7사단은 장진호 동안을 통해 각각 압록강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엔군이 평양을 거쳐 북쪽 압록강을 향해 진격해오자 중국은 12개 사단 병력(약 30만명 추정)을 압록강변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중국 공산군의 참전 명분은 “항미원조”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 였다. 이때 미 10군단 지휘부는 중공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넘어 유엔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 산악도로 주변의 산악지대에 병력을 매복시 켜 놓고 있었다.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 사단 중 10여개 사단을 동원해 1950년 11월 27일 밤부터 개마고원의 장진호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예하 31연대전투단에 공격을 가해 왔다. 그 유명한 인해전술로 장진호 전투는 시작됐다.

당시 약 10 배에 달하는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해온 중공군은 미 10군단을 궤멸시키고, 국군 1군단 도 전멸시키려고 계획하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도 엄청난 큰 피해를 보았지만, 중공군 제9 병 단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이 흥남 항구까지 철수하는 동안, 1950년 12월 11일까지 약 2주간 계속되었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어 그들이 더는 남쪽으로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어 성공적인 흥남철수가 가능하도록 이바지하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과 중공군은 서로 또다른 적과 싸워야 했다. 특히 영하 20~4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로 양측은 전투가 아닌 동상 이나 부상으로 인한 피해가 더 극심했다. 장진호 전투는 초반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그때의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 장진호 동안에 배치된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의 투혼과 희생이 한국전쟁의 흐름을 공산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저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당시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에 한국인들로 구성된 카투사와 대한민국 경찰 중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재미동포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이 저술한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에 카투사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수록되어 있다. 12월 1일 미군에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미군이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12월 3일이었다. 모든게 불리한 상황 속에서 중공군과 싸우며 철수하는 작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중공군의 공격으로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로 24Km를 철수하기 위해 5일 밤낮의 사투를 벌인 끝에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7연대의 부상병들은 마침내 구출의 손길을 찾을 수 있었다. 미 해병대원 뿐만 아니라, 영국 해병대원,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생존병, 대부분 카투사인 한국인 병사들, 대한민국 경찰은 흥남항으로 철수하기 위해 새로운 제대 편성을 하였다.

“대한민국 경찰 중대의 참전 투혼”

▲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진호 전투는 당시 미국과 중국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1950년 크리스마스전에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고 장담했다. 이에 중공군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계 최강의 미군의 상징인 해병 1사단을 전멸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초부터 중국 관영매체 는 “미 해병 1사단 포위 섬멸 임박”이라고 계속 보도했다. 미국 언론들도 미 해병사단의 철수작전을 크게 보도했다.

일단 미 해병은 하갈우리의 간이 활주로를 이용해 부상병 4500명을 항공기로 후송했다. 전멸을 우려한 미군 10군단 지휘부는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에게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항공기로 철수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며 거절했다. 항공철수를 할 경우 마지막 수송기가 이륙할 때까지 2개 대대 병력이 공항에 남아 중공군 공격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2개 대대 병력을 적진에 희생양으로 남겨두고 철수하는 것은 ‘해병의 불명예’ 라고 여기고 흥남항이 있는 함흥까지 110㎞를 걸어서 철수를 결정했다. 스미스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해병은 철수하는 게 아니라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 이라고 강조했다. 이때 “후퇴하느냐” 종군기자의 확인 질문에도 스미스 사단장은 “다른 방향으로 진격 한다”고 답했다. 중공군은 미 해병의 철수작전을 막기 위해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했고, 미군 후퇴로에 있는 모든 다리를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했다. 미 해병은 끊어진 다리를 긴급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재를 수송기로 긴급 공수해 복구했다. 미 해병은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했다. 낯선 지형, 강추위, 절대적 병력 열세, 포위 기습 공격 같은 악조건 속에서 미 해병처럼 장비와 부대 단위를 유지하고 계속 전투를 벌이며 성공적인 후퇴작전으로 이어갔다. 장진호는 북한에서도 가장 추운 개마고원에 위치해 있다. 전투가 진행되었던 2주간 동안 평균 기온은 영하 11도, 가장 추운 날의 오전 기온은 영하 45도까지 내려갔다. 물도 얼고 전투식량도 얼고, 기관총의 노리쇠도 얼려버리는 강추위였다. 중공군은 미군 하나만 죽일 수 있다면 열 명이 죽어도 괜찮다면서 제일 앞에서 공격하는 군인들은 총도 없이 막대기 수류탄 2개씩 양 손에 들고 달려왔다고 한다. 인해전술이었다.

▲ 워싱턴 DC‘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

지난해 중국에선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 <장진호>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진호>에 등장한 “양놈들이 우리를 무시하지만, 존엄은 전쟁에서 싸워서 얻는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은 이 영화를 통해 반미정서와 애국을 강조한다. 중국은 장진호 전투를 ‘항미원조’의 대표적 승전으로 부각한다. 중국측은 어쨌든 장진호에서 미군을 몰아냈으니 자신들이 이겼다는 셈이다. 한때 장진호전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가장 굴욕적인 전투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군사 연구자들의 평가는 다르다. 혹한의 추위 속에 미해병과 미육군은 17일간 장진호 주변에서 후퇴하면서도 사실상 미군의 10배에 달하는 중공군을 괴멸시켰다. 이로 인해 중공군의 중동부 전선 남하가 2주간 동안 지연되었으며 그들의 최종 목표였던 부산까지 진격도 무산됐다. 중공군에 비해 10배 열세인 미 해병 사상자는 2,621명이었다. 이에 비해 중공군 9병단은 무려 전사 2만 5천명, 부상자 1만 200명이었다. 장진호전투 피해로 전투 기능을 상실한 중공군 9병단 은 함흥 일대에서 머물며 4개월 동안 부대정비를 하느라 1951년 1월4일 서울을 점령했던 중공 군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 에서 남진을 멈췄는데 만약 9병단까지 3차 공세에 가세했다면 대전까지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장진호전투, 미군의 성공적 후퇴작전

▲ 인천상륙작전시 미군과 카투사들이 함께 참전했다.

이때문에 한-미 전쟁연구자들은 장진호전투를 두고 “중국이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전쟁’에선 못이겼다”고 평가한다.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함경도 두만강까지 진출했던 국군 수도사단, 국군 3사단 등이 큰 피해없이 함흥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사에 기록된 인류애를 담은 흥남철수가 가능하도록 이바지하였다. 특히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난민 10여만명을 구조하여 남하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인도적 군사작전이었다.

특히 장진호 전투시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과 같은 훌륭한 리더십을 지닌 지휘관이 직관 적인 판단력으로 진출속도를 조절하고 병력 및 부대를 집중 운용했으며,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Retreat, hell!! We are not retreating, we are just advancing a different direction)이라는 작전명령으로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신념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작전으로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성공시켰고 이후 휴전까지 전세를 주도해 나갔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1893~1977) 미 해병 1사단장을 지난해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미국 정부는 장진호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이미 1950년 12월 십자수 훈장을 수여했다. 전쟁후 스미스 장군은 대서양함대 해병대 사령관을 거쳐 1955년 9월 대장으로 예편한 뒤 1977년 84살의 나이로 숨졌다. 장진호 전투를 성공시킨 후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바로 1.4후퇴였다. 140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국제시장’의 처음 장면으로 소개됐다. 당시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북한 피난민이 무작정 따라 나섰다. 흥남부두는 민간인과 군부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흥남철수 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만 4000명을 구출한 기록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이다. 이 사실은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꿈>을 편찬한 월드 피스 자유연합 안재철 이사장에 의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로 시작되는 유행가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지어졌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수가 30여만이란 엄청난 것이 밝혀진 것은 1950년부터 40여 년이나 지나 중국의 자료보관소가 비밀해제를 통해 당시의 자료를 공개한 후였고, 그전까지는 미 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투혼속에 한국인 병사인 카투사가 병사들이 50%를 차지했던 사실은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 장진호 전투에서 한국군 카투사 875명이 미군과 함께 피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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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Chosin Few)와‘고토리의 별’(Star of Koto-ri)

미 해병 전우회‘마스코트’
한줄기 별빛‘고토리의 별’

▲‘코도리의 별’상징 기념비

장진호전투와 잊을 수 없는 기적의 별이 당시 미해병 1사단 장병들에게 비추어진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미해병 제1사단은 기세당당하게 장진호 지역까지 북진을 한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평양을 버리고 강계에 임시 수도를 정하고 있었기에 강계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의 시작인 1950년 11월27일 미 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장진호 근처에서 중공군 12개 사단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게 됐다. 중국군 병력은 미 해병보다 약10배 많았다. 강추위 속에 고립된 미 해병 1사단은 전멸 위기에 빠졌다. 장진호 일대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 고산 지대다. 낮 영하 20도, 밤 영하 30도의 강추위가 몰아쳤다. 탱크, 트럭 등 각종 장비의 윤활유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포를 쏘면 얼어붙은 포신이 충격으로 깨졌다. 곳곳에 매복한 중국군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미 해병은 전사자를 땅에 묻으려고 했으나 언 땅을 팔 수 없자, 주검을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렸다. 이런 전투를 벌이면서 미 해병 2개 연대는 악전고투끝에 12월 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장진호 남쪽 끝에 있는 하갈우리에 집결했다. 하갈우리에 군 병력 1만명, 피난민 1500명, 차량 1천대가 모였다.

무릅꿇고 기도하자 한줄기 빛이

미 해병대는 하갈우리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황초령을 넘어 흥남항이 있는 함흥 까지 110㎞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황초령과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차가운 눈이 쌓여 얼어 붙었다. 포위 고립된 미 해병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이에 앞서 1950년 11월 14일, 장진호 남쪽 끝에 자리잡은 하갈우리에 진주한 미해병 제1사단 사령부 장병들은 마침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몰래 숨어서 예배드리던 하갈우리장로교회의 지하 교인들과 함께 하갈우리장로교회에서 감사 예배를 드렸다.

‘고토리 별’ 출현은 흡사 신의 계시

더구나 이들 신자들은 그동안 숨겨 놓았던 교회 종을 가지고 나왔다. 지하교인들은 11월 23일 추수감사절 주일로 미군들과 함께 지켰는데, 11월 27일에 장진호 지역에 미군 병력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포위망 속에 갇혔다는 정보가 날라 들었다. 그래서 11월 31일 주일에 미군은 퇴각하기 전 철수 예배를 드렸는데,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피난 민들이 함께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신분이 완전히 노출되어서 북한 공산군이 다시 들어 오면 처형 1순위가 될 것이기에 미군을 따라서 남한으로 가고자 했다. 하갈우리에서 철수한 미해병 1사단은 고토리(Koto-ri)까지 왔다. 이때 미군과 함께 있던 기독교인들이 무릎 꿇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2월 7일 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 하나가 빛을 띄웠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치 신의 구원처럼 고토리 밤하늘에 아주 작은 한줄기 별빛이 해병 전사들에게 등대불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이 별을 본 미 해병들은 투혼이 살아났다. 정말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맑은 날씨가 나타났다.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어 생명의 보급품이 무사히 공급되고 미군은 무사히 철수 작전을 할 수 있었다.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함경도 두만강까지 진출했던 국군 수도사단, 국군 3 사단 등이 큰 피해없이 함흥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한편 장진호 전투 당시 북쪽의 지하교인들과 미 해병들이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 현재 버지니아주 미해병대 국립박물관에 “고토리의 별”(The Star of Kotori)이란 제목의 그림으로 전시돼 있으며, “고토리의 별”(The Star of Kotori)이란 이름의 장진호전투기념비까지 세워졌다. 그리고 이 별은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해병 1사단 전우회의 공식마크가 됐다.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미해병 1사단을 따라 흥남까지 온 기독교인들과 피난민이 4,500여명이 었다. 흥남부두에 모였던 10만명의 피난민 중 기독교인이 무려 95,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투사와 달리 장진호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국군 부대가 있었는데 한국 경찰로 구성된 ‘화랑부대’였다. 한국 ‘화랑부대’는 미군에 배속되어 함께 전투에 참여했는데, 장진호전투에도 화랑부대의 1개 소대가 기관총부대로 참전하여 미해병 1사단의 철수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을 가리켜 “쵸신퓨”(Chosin Few)로 부른다(당시 유엔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제에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일본식 발음으로 “장진”을 “초신”으로 불렀다). ‘살아 돌아온 자가 극히 적었다’는 의미다. 특별히 선택된 자만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Chosen Few”로도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당시 살아와 전우회를 통해 만날 때마다 동료 전우들은 “너 이제 몸 좀 녹았냐?”라는 말로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를 체험하면서 일명 “스키파카”로 불리 는 방한복을 개발했다. 수원경성교회의 김대운 목사는 ‘고토리의 별’에 대하여 “해방 후 5년간 공산치하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고 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로 향하는 성도들 앞에 나타난 끊어진 다리는 실로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날 밤 떠오른 ‘고토리의 별’은 그들에게 주님의 인도하시는 손을 바라보게 했다.”고 회고했다. 장진호 전투의 극적인 승리와 고토리의 별은 한반도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 준다고 당시 남쪽으로 온 지하교인들은 믿고 있다. 이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 6·25 전쟁 발발때까지 5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북녘의 신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국교회 부흥의 또다른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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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산화 7052명 카투사 호명식

‘추모의 벽’건립에 한국정부와 향군 2300만불 지원

6·25 전쟁 발발 66주년을 맞는 지난 2016년 6월 25일에는 워싱턴DC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서 한국 전쟁 당시 사망한 카투사(KATUSA, 미군 배속 한국군) 전사자 7,052명의 이름이 호명되고 기려 졌다. 당시 주미대사관 국방무관부(신경수 국방무관)와 미 한국전참전용사기념재단(이사장 윌리엄 웨버)이 마련한 호명식에는 한·미 양국 인사들과 한국에서 온 카투사 현역 및 한인사회 인사들이 참석, 카투사 전사자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미국에서는 윌리엄 웨버 미 한국전참전용사 기념재단 이사장, 아브라함 덴마크 미 국방부 아태 부차관보, 월터 샤프 전 한미연합사령관, 존 존슨·버나드 샴포 전 미 8군 사령관, 브라이언 메네스 전 2사단 부사단장, 토마스 스티븐스 미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당시 한국 측에서는 신경수 국방무관, 김동기 워싱턴 총영사, 김종욱 대한민국 카투사 연합회 회장 과 조성재 미 8군 한국군 지원단 주임원사, 최연규·김현재 카투사 상병 등, 한인사회에서는 이병희 워싱턴안보협의회회장, 황원균 워싱턴 평통회장, 원미숙 미동부 재향군인회 여성회장 등과 워싱턴 카투사 전우회 관계자 및 한국전 참전용사 등이 참석했다.당시 신경수 국방무관(소장)은 호명식에 앞서 가진 기념사에서 “오늘 우리들은 카투사 영웅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면서 “카투사들은 한국전에서 미군들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고 현재는 3,400명의 카투사들이 미군에 배속돼 군사외교관으로 한미동맹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고 말했다. 이날 호명식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장 8시간 진행됐으며 호명자들은 전사자들의 이름 을 한국어와 영어로 불렀으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카투사 전사자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행사를 위해 한국에서 온 김종욱 회장은 “카투사 선배들의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의 벽’(Korean War Veterans Memorial Wall of Remembrance) 건립 사업은 미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이 먼저 추진했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참전비 등에는 전사자 명단이 있지만 정작 6·25전 기념비에는 이들을 기리는 이름이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했다. 2016년 10월 미 의회가 ‘추모의 벽’ 건립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한국 국회에서도 같은 해 11월 건립지원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한국재향군인회가 2018~2019년 6억 3000만여원 건립 기금을 모금했다. 한국 정부 역시 2200만 달러(약 250억원)를 지원했다. ‘추모의 벽’은 워싱턴DC 6·25 참전 기념공원 내 ‘추모의 연못’ 주변에 설치된다. 길이 55m 화강암 벽화, 2m 크기 동상 등으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명판엔 6·25 때 전사한 미군 36,574명, 한국인 카투사 7,052명 이름이 알파벳 순으로 새겨진다. 가장 첫 줄에는 존 애런 주니어(John Aaron Jr.) 육군 이등병이 자리한다. 그는 1950년 7월 27일 하동 전투 때 300여명 미군과 함께 사망했다. 당시 22세였다. 추모의 벽 건립과 관련, 존 틸럴리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외국(한국) 군인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는 미국 최초”라고 했다.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틸럴리 이사장은 지난해 당시 문 대통령의 착공식 참석을 언급하면서 “실체적으로 한미 동맹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추모의 벽이 내년(2022년) 5~6월 완공되면 연간 40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알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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