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빚진 것은 없다’
자유 의무가 있을 뿐이다
■ 6·25 전쟁에서 팔 다리 잃고서도 끝없는 ‘한국사랑’
■ 워싱턴DC 한국전쟁참전비 동상의 모델이 되기까지
■ 6·25 참전 부상 미군해병이 보내온 ‘기적의 태극기’
■ 태극기의 주인공들 찾아 새롭게 한미동맹의 모델로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영웅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6·25 전쟁 중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벽안의 영웅들이 많다. 잊을 수 없는 벽안의 영웅들 중에서 6·25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고도 자유 한국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윌리엄 빌 웨버 대령은 97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사랑을 이어간 영웅이었다. 메릴랜드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그는 6·25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고도 대한민국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영웅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웨버 대령은 1925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출생해 위스콘신 주 밀위키,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서 자랐다.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 부대 소속 대위로 6·25에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그는 서울 수복 이후 잇딴 전투의 승리로 북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돼 중부전선의 격전지였던 원주에서 수류탄에 맞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었다. 그때가 1951년 2월, 원주 북쪽 324고지에서 오른 팔과 오른 다리를 잃는 큰 부상을 당했다. 미국에서 1년여 간의 수술 후 현역에 복귀한 뒤 1980년 전역했다. RFA방송은 웨버 대령 별세를 알리는 부고 기사(김태우 석좌교수 글)에서 원주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웨버 대령과 함께 미 187 공수여단에서 싸웠던 콜맨(J.D. Coleman) 예비역 중령은 2001년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 ⌈Wonju-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에서 원주 전투를 <한국의 게티스버그 전투>라고 했다. 원주 전투가 한국을 구한 전투라고 한 것이다.사실 그 직전까지 전쟁 양상은 유엔군 측에 불리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이후 궤멸상태로 북쪽으로 패퇴한 북한군을 도와 참전한 중공군이 세 차례의 대공세를 통해 다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 오던 상황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청전강 이남으로 밀렸고, 11월 25일 시작된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했는데, 미 제2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에서 포위되었다가 흥남을 통해 해상 철수했다. 12월 31일 시작된 3차 공세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안성을 연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무렵 중공군과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은 한반도 중동부의 교통 요충지인 원주 지역을 점령 함으로써 대전과 대구로 향하는 돌파구로 삼고 유엔군의 동서 간 연결을 차단하려 했다.
원주가 6·25 전쟁의 핵심적인 승부처가 된 것이다. 1950년 12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치러진 원주 전투는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모두가 사력을 다한 총력전이었다. 전투에 참가한 유엔군은 한국군 제3사단, 미 제10군단, 미 제1 해병사단, 미 제2사단과 7사단, 미 제5 기갑연대,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연대, 그리스 부대 등이었으며, 공산군은 중국군 제42집단군과 제66집단군, 북한군 제2, 3, 5군단 등이었다. 이 전투에서 뺏고 뺏기는 혈전 끝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1951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중공군은 공세를 중단했고, 유엔군은 ‘선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 1951.1.25~1951.2.20)’을 통해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다시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하여 3월 15일 감격적인 서울 재수복을 달성했다. 중동부에서는 횡성, 평창, 동해 등으로 진격한 한국군과 유엔군에 대해 공산군이 횡성과 지평리에서 반격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중공군은 물론 북한군 제5군단과 제2군단도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고, 더 이상 대공세를 펼칠 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6·25 전쟁 승부처 ‘원주전투’
웨버 대령이 팔과 다리를 잃은 원주 북쪽 324고지 전투는 이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1951년 2월 영하 30도의 혹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반드시 그를 살려야 한다는 미군 최고위층의 명령에 따라 웨버 대령은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후송되었고, 이후 1년 동안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역에 복귀하여 인공 팔과 인공 다리를 동시에 착용한 유일한 군인이 되었다.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은 1980년 예편 후에도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웨버 대령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6·25가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의 무력에 맞선 첫 전쟁”이라는 전쟁의 본질과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계속했고, 그의 딸 배스 웨버와 손녀 데인 웨버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따라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 제막식 등 여러 참전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6·25의 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손녀 데인 웨버는 “할아버지는 팔과 다리를 잃었지만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싸웠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비록 팔과 다리는 잃었지만…
이 같은 웨버 대령은 전역 후 1993년부터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KWVMF) 회장을 맡아 워싱턴 D.C.에 한국전 참전비(19인의 용사상) 건립을 주도하였고, 자신이 19인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또 2006년부터는 미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운동을 시작하여, 세 차례 법안 통과 시도 끝에 마침내 2021년 5월 기공식을 가졌다. 또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했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 공원 추모의 벽 착공식에서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 추모의 벽 제막식은 오는 7월 27일에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 참석하에 거행된다. 그는 워싱턴 D.C. 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의 19명 동상 중 판초를 입고 소총을 든 동상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웨버 대령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었 지만 후회는 없다”면서 “한국인은 빚진 게 없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게를 짊어지고 재건하는 모습을 그동안 목격했고 한국인이 다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소 웨버 대령을 존경했던 사진작가 라미 현이 그의 생전에 미국 자택을 방문해 자신이 찍은 대령 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 전했다. 기뻐하는 웨버 대령은 “(대가로) 뭘 해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현 작가는 “대령님은 이미 전쟁 때 다 지불하셨다”고 했다. 그러자 웨버 대령은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빚진 것은 없다. 자유를 가진 사람에게는 의무가 있다.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전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전한 것은 우리의 의무였다. 우리가 준 자유를 얻었으니 너희도 의무가 생긴 것이다. 북쪽에 있는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것이 너희들 의무다.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 (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한편 웨버 대령을 찍은 라미 현 사진작가는 미국 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사진을 전공했으며 인물 사진을 주로 작업했다. 2016년〈대한민국 육군 군복〉사진전을 개최하며 우연히 만난 참전 용사의 사진을 찍고 Project-Soldier 네 번째 이야기,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찾아서’를 계획하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들을 기록했다. 찍은 사진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길 바라며, 세상의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담는 날까지 작업은 계속된다. 기록이 곧 역사 가 되고, 다음 세대의 자부심이 된다는 믿음으로 그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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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미 해병 대원 제임스 란츠(90, James Lantz)씨
‘6·25 전장에서 꽃피운 한미해병의 우정’
6·25 참전 미해병이 보내온‘기적의 태극기’실제 주인공
LA총영사관(총영사 김영완)은 6·25 참전 미 해병대원이 보내온 태극기의 실제 주인공 한국인을 찾고 있다. 지난달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으로 색이 바랜 태극기가 편지와 함께 배달됐는데 편지의 주인공 은 LA 인근에 거주하는 제임스 란츠(90, James Lantz)씨로 자신을 6·25 참전 미 해병 대원이라고 밝혔다. 제임스 란츠씨는 “6·25 전장에서 만난 한국 해병대원으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70여년 동안 소중히 보관 했는데 이제는 한국으로 돌려주어야 할 때가 된것 같다”며 총영사관에 이를 보내온 것이다. 제임스 란츠씨가 소속된 미해병 1사단 11연대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힘들게 싸운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진 ‘장진호 전투’에 참여했으며 당시 생존자들을 장진의 일본식 이름인 Chjosin을 따서 ‘Chosin Few’라고 불렀다.
장진호 전투의 역사적 영웅
미 해병대 1사단 11연대가 흥남 철수작전 이후 대구 부근에서 재정비 하는 동안 20~30명의 한국 해병대원들이 함께 훈련을 했는데 제임스 란츠씨는 한국 해병대원 중 한 명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고 이후 한국 해병대원이 다시 최전선으로 가게 되면서 자신과 한국을 기억해달라며 태극기를 건넸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은 제임스 란츠씨가 한국전 참전용사로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공로를 인정하여 지난달 18일 자택을 방문,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수하였다. 또한 LA 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는 제임스 란츠씨의 사연을 영상으로 제작, 홍보 캠페인을 통해 관련 제보를 받는 한편, 국방부 등 유관 부처 협조를 통해 당시 미 해병대와 함께 훈련한 국군 부대를 확인하여 한미 양국 우정의 상징인 기적의 태극기의 실제 주인공을 찾아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대내외에 과시할 계획이다. 제임스 란츠씨가 해병대원으로 싸웠던 장진호 전투는 미해병 역사상 3대 전투에 속했던 역사적인 전투이다.
한반도 운명 가른 흥남철수작전
미 해병 제1사단의 7연대와 5연대가 유담리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격돌한 것은 영하 25도의 혹한에 강풍이 몰아치던 1950년 11월 27일이었다. 수적 우세를 앞세운 중공군은 해병 7연대와 5연대를 포위하고 유담리와 하갈우리 그리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보급로를 막았고 고토리에서 함흥으로 가는 보급로까지 차단했다.
그리고는 미군을 섬멸하겠다는 목표 하에 11월 28일 밤 다시 공격해왔지만 미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해병대 항공대의 근접지원을 받으면서 이 공격을 물리쳤고, 결국 12월 3일 하갈우리로 철수했다. 해병 1사단은 하갈우리에서 집결한 이후에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열을 재정비할 겨를도 없이 격전을 이어가야 했다. 해병 제1사단이 고토리를 거쳐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 전투를 마무리한 것은 12월 11일이었으며, 이후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에 돌입 하게 됐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전사자 730명을 포함해 4,400명의 전상자를 기록했을 만큼 치열 했던 전투로서 “한반도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도 불리지만,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한 막대한 의미를 가진 전투이기도 했다.
✦문의: 총영사관 문정희 영사 (213) 651-3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