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미주한인 이민 역사 120년 아닌 140년 역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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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이민 120주년 기념행사에서 바로 잡아야할 것들
■ 초기 유학생은 이강 황태자 포함 한국현대사주역 산파
■ 최초 미국 유학생 유길준…최초 시민권자 서재필 박사
■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워싱턴에 유학

2023년 올해 ‘미주 한인의 날’인 <1월 13일>이 ‘미주한인이민 120주년’이라며 LA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문제는 ‘2023년은 미주한인이민 120주년’ 이라는 주제에 대해 대부분의 한인들이 미주에서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년이 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미주 땅에서 한인이 거주한 역사가 적어도 140년 이상이란 것이 여러가지 공식적인 문서 기록에 나타나 있다. 미주한인 이민의 역사를 바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선데이저널>은 지난 2015년 1월 25일자 지령 963호에서 “미주한인이민 역사 시작은 1903년이 아닌 1885년부터”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미국에서 이민의 역사는 1600년경 최초의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한 이후 미국으로 이동한 사람 들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약 1600년부터 시작하여, 영국인과 다른 유럽인들이 주로 아메리카 대륙 동해안에 정착했다. 이후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데려왔다. 최초의 성공적인 식민지는 1607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1775년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최초이자, 가장 오랜 이민 역사의 시작이다. 1600~1775년 동안 영국령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이민 여권’을 들고 왔겠는가? 아니다. 미국은 독립이후 연방정부를 수립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오르락 내리락 하는 쇄도하는 이민자들의 파도를 경험했다. 1965년 수많은 이민 제한들이 종식됨으로써 최초로 종합적인 이민 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는 이민자들의 수가 증가되었다. 이민(Immigration)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 캠브리지 사전(Cambridge English Dictionary)이나, 미리엄-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 Dictionary)에서는 “외국에 나가 사는 것”(the act of someone coming to live in a different country)이라 했으며, 국제연합(United Nations)은 3개월 이상 삶의 근거지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을 이민으로 정의했다.

1903년은 하와이에 이민선 도착 날

국내외 많은 동포들은 미주 한인의 이민의 역사가 1903년 1월 13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해 올해를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120년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인들이 미국 땅에 처음 이민 온 것이 1903년 1월 13일 부터이고, 그 전에는 한인들이 미국 땅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해마다 ‘1월 13일 미주 한인의 날’ 기념식을 주관하는 단체들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이민선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라고 기념했기 때문이다. 1903년 이후로 매년 1월 13일은 오래 전부터 하와이의 한인들이 ‘조상숭배의 날’로 기념해왔다. 그래서 2003년에 미주에서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행사를 전국적으로 할 때,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도착을 기준으로 이민 100주년을 택한 것 뿐이다. 미국 정부도 하와이에 이민선이 도착한 날 100주년이 되는 2003년 1월 13일을 기념해 ‘1월 13일- 미주한인의 날’로 선포했다.

그러면 1903년 이전에는 한국인이 미국 땅에서 살고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미국 역사 여러 기록에는 1883년부터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 전 20년 동안에만도, 미국 땅에 왕족, 망명 정치인, 유학생, 외교관, 상인(인삼장수)의 이름으로 거주한 사람만도 6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에는 이강(의친왕), 서재필, 유길준, 변수, 박에스더(김점동), 서광범, 박영호, 김규식, 백상규, 윤치호, 안창호 등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의 왕자 유학생도 있고, 최초 4년제 미국 대학 졸업자로, 미국 정부 최초 공무원이 된 한인도 있고, 최초 미국 유학생도 있고, 한인 최초 미시민권자에 최초 미국 의사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미국 땅에 한인의 역사는 1903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선 1900년에 미국에 유학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있다. 독립운동가로도 알려졌다. 이강은 대한제국 고종의 아들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 동생으로, 2명의 시종을 대동하여 1900년 미국에 유학와서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대학(Roanoke College) 등에서 수학 중 의친왕에 책봉되고 1905년 귀국하여 적십자 총재를 역임하였다.

한인동포 1903년 이전 부터 존재

이강은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기차를 타고가던 중 중국 안동 에서 체포되어 귀국 당하여 연금 당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 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1955년 임종 직전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한때 LA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이석이 그의 아들이고, 1969년부터 뉴욕 컬럼비아대 동양학 도서관 한국학 사서로 일하다, 1996년 과장으로 정년 퇴직한 이혜경 여사는 그의 다섯째 딸이다. 그의 미국 유학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 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이듬해 1901년 3월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아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로아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898년에 아버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므로 전례에 따라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1907년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 이때에도 그는 황태자 책봉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강, 황족예우 버리고 ‘신민’으로

이강 이외에 여러 명의 한인 유학생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Yu Giljoon , 1856-1914)은 1882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갔다가 민영익을 수행하여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하고 1885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귀국하여 <서유견문기>를 출판하였다.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였다. 이로써 그는 근대에 들어 해외에 유학한 첫 번째 유학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일본과 게이오의숙이 받아 들인 첫 번째 외국인 학생이기도 하였다. 유길준은 신사유람단 덕택으로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지만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일본이 입은 피해를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다시금 수신사를 보냈다. 수신사에는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현지에서 이들 수신사 일행과 만났으며 이들과 함께 1883년 1월 귀국하였다.

이때 그에게 손을 내민 인물이 바로 그해 7월 보빙사로 임명된 민영익이었다. 그는 민영익의 수행 원으로 미국에 건너갈 수 있었다. 민영익은 이후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Selem)시의 피바디 박물관(Peabody Museum)의 관장인 모스(E. S. Morse)의 개인지도 받았으며 1884년 8월에는 모스의 소개로 대학예비학교인 담머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 입학하였다. 이로써 그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라는 기록도 세울 수 있었다. 한편 한국 최초 미국 대학 졸업자 변수(Pen Su, 1861-1891)도 특이한 인물이다. 1883년 보빙사절단 의 일행로 도미해 1891년에 매릴랜드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여 최초의 미국 정부 공무 원이 되었는데 1891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로 1883년 5월 주조선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John L. Foote)가 방문하자 답례사절을 선발하였다.

그는 자청하여 답례 사절단의 수행원을 지원하였다. 그는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 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 1884년 봄 일본을 경유 하여, 귀국하였다. 그후 1886년 1월 민주호, 윤정식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 언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87년 8월 베리언츠 언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아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으로, 수석 졸업자의 영예도 얻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6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 졸업과 동시에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게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변수, 한국인 최초 미국대학 졸업자

도산 안창호와도 교분이 있던 윤치호(Yoon, ChiHo,1865-1945)는 일본에 유학 중 영어를 배워 초대 미국 주한 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1883년 귀국하였다가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도미 유학하여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수학하였다. 안창호와 더불어 애국가 가사 작가로 알려졌다. 한때 일본에 협조한 것이 부끄러워 해방되자 자결하였다. 독립신문 발행자로 유명한 서재필(Phillip Jaisohn,1866-1951)은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9년 와싱톤 대학에 입학하고 1892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된다. 1890년 6월 10일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한 그는 1895년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였지만 1898년 미국으로 추방 당하여 1945년 해방될 때 까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1년 타계하였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 중 18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취업허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임금을 받지 못하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 받는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1886년 9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 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컬럼비아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당시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미국의 제도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으며, 미국 초대 철도 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동참했다. 또 다른 인물 김규식(Kim KyuShik,1881-1950)은 1896년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버지니아의 로아노크 대학(BA)과 1904년 프린스톤 대학원(MA)을 마치고 귀국, 상해임시정부 부주석 역임. 한국전쟁때 납북됐다.

한인이민 역사1903년 시작은 잘못

한편 1896년 서광범 주미공사(Korean consul Soe GwangBum)의 도움으로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등이 워싱턴 DC 소재 하어드 대학에 유학했다. 하어드대학교는 흑인계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이었다. 미주한인 사회에서 잘 알려진 도산 안창호는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의 교장인 미국 선교사 밀러의 주례로 결혼하고 다음 날 부인 이혜련(미국 여 선교사 엘러스가 세운 정신여학교 출신)과 같이 1902년 도미 유학했으나, 동포들의 삶을 보고 나라사랑 운동을 폈다.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의 도미는 한인 부부로서 최초 미국 입국자로 알려지고 있다.

국민회총회장을 지낸 이대위는1903년 도미하여 오래곤의 포트랜드학교와 UC Berkeley, 태평양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로서 안창호와 같이 친목회,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설에 이바지하고 상항감리교회 목사, 신한민보 편집국장 역임, 한글 인터타입 식자기 발명했다. 특히 그는 1913년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 에게 청원하여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한국 망명객 451명을 미국에 망명 유학생 자격 으로 여권도 없이 오도록 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이 1903년 이전부터 버젓이 미국 땅에서 활동한 한인의 역사가 있는데 미주이민의 역사를 ‘1903년 부터’라고 기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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