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LA한인사회의 “롤 모델” 민병수 변호사 졸수(卒壽)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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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때 다시 모여 생신 잔치 치루자’ 한 목소리
■ 미주한인사회 최고령 변호사 일하며 커뮤니티 활동
■ ‘한쪽 눈만으로도 세상을 더 크게 보았다’ 외길인생
■ 유색인종 인종차별 딛고 교사 변호사로 인권보호에

“한인사회의 정의의 챔피언” “미주한인의 롤모델” 민병수 변호사의 90세 생신 축하 이벤트가 지난 5일 코리아타운 용수산 식당에서 한미 커뮤니티 관계자들과 친지 가족 등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이날 행사는 민 변호사와 함께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던 1.5세-2세, 3세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했다. 이들1.5세-2세 한인들은 지난 2003년 민 변호사의 70회 생일잔치부터 시작해 이날 90세 생신을 맞아 20년째 축하 파티를 이어 온 것이다. 한편 이날 민 변호사는 44년 전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미국인 제자 2명이 참석해 스승과 재회하여 더욱 의미있는 자리가 되었다. 또한 이날 참석자들은 올 여름을 목표로 한 민 변호사 자서전을 출간하기로 하여 모금 활동도 펼첬다. 민병수 변호사의 생일은 3월 5일이다. 올해는 3월 5일이 일요일이지만 날 90회 생일 잔치에는 한인1세를 포함, 1.5세 그리고 2세, 3세들까지 80여명이 모여 힘차게 “해피버스 데이!!”를 합창했다. 이날 알렉스 차 변호사의 사회로 진행된 90회 생일잔치에서 민 변호사는 답사를 통해 “젊은세대들과 함께한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었다”면서“이 몸이 움직일 수가 있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남가주 지역에 있는 한인 변호사 3천여명 중에 세번째 변호사이다. 고 백학준 판사, 고 장병조 판사 등 오직 2명의 선배 변호사에 이어“한인변호사의 대부” 로 든든한 맏형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이날 생일 자리에서 켈로라인 심씨의 기도로 시작했으며, LA 카운티 수피리어법원 판사를 지낸 하워드 함 변호사, 민 변호사의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 빌 시아스 (LA카운티 검사), 데이빗 류 전LA시 의원 등이 민 변호사의 90세 인생을 조명했으며, LA시의원 후보자 그레이스 유 변호사는 민 변호 사 인생사 출판 기념 계획을 설명했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의회 마이크 퐁 의원(Mike Fong, Cal Assemblyman)은 민 변호사에게 주의회를 대신하여 공로장을 증정했다.
한편 평소 민 변호사의 생활 철학을 존경하는 박병철 에베레스트 트레이딩 회장은 기자에게 “민병수 변호사는 우리 커뮤니티의 진정한 어른이다.”면서 “그분의 인생철학이 담긴 책을 펴내 널리 읽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민 변호사 인생사 출판비 종자돈으로 5천 달러를 기탁했다. 이 자리에 44년전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인 빌 시아스(Bill Sias)는 변호사가 되어 나타났다.

또 다른 제자 잉글리드 맥킨네크씨도 남편과 함께 참석해 눈물을 글썽했다. 제자 빌 시아스 변호사는 이날 마이크를 잡고서 지난날 스승인 민 변호사의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중간 중간 말을 잊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스승은 우리들에게 고난을 극복하는 창의력을 심어 주었다”면서 “오늘의 내가 이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스승이 우리들에게 희망을 가르처 주었다”고 토로했다. 민병수 변호사의 90년 인생사는 한인사회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1960년대 2세들로 구성된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KYCC(한인청소년회관)이사, KAC(한미연합회)이사장, 한미변호사협회 회장,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지만 한인사회 일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나서게 된 계기는 바로 1992년 발생한 4·29 LA폭동이다. 현재 한인사회 최고령 인권변호사인 민 변호사가 기억하는 4·29 폭동은 더 심각하다. 그는 미주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4·29 폭동 직전 민 변호사는 평소처럼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운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탐 브래들리 LA시장이 나와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러분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흑인(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 졌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를 토해내야 합니다…(정적) 합법적으로.” 민병수 변호사가 기억하는 LA 폭동의 시작이었다. “브래들리 시장은 평소 감정이 전혀 없는 차분한 톤으로 말하곤 했다. 몇 번 만나봤기 때문에 그의 성품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날 그는 다분히 감정 적이었고 시민들에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어처구니가 없던건 그렇게 흑인들을 선동했던 브래들리 시장이 며칠 후 한인타운에 와서 피해자를 돕고 싶다며 1000달러를 기부했는데 한인 피해자들은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것이다”라고 말한 민 변호사는 “만일 그 때 브래들리 시장이 라디오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폭동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면서 브래들리 시장의 두 얼굴을 기억했다. LA 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인타운과 한인들이었지만 정치력을 동원한 공격도 계속됐다. LA시는 폭동 이후 사우스 LA지역에 다시 문을 여는 한인 업소들에 치안을 핑계로 내세우며 가게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낙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주류 판매량도 제한시키는 등 운영 조건을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한인들의 재활이나 복구를 막았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시의 원은 바로 현재 재판을 앞두고 있는 10지구 마크 리들리-토머스였다. 이를 막을 힘조차 없던 한인 업주들은 평생 지켰 던 일터를 떠나야 했다.

“청소년들에 고난극복과 희망을”

LA 폭동에 대한 민 변호사의 감정은 지금까지도 복잡하게 남아있다.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의 민낯에 대한 실망감, 피해자임에도 외면당한 한인 커뮤니티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에 대한 아쉬움까지 섞였다. “폭동이 발생 한 후 며칠 뒤 한인들이 평화 행진(5월 2일)을 벌였다. 그 자리에 에릭 가세티 LA 전시장의 아버지(길 가세티)도 LA 카운티 검사장으로 나와서 연설했는데 함께 나왔던 청년 에릭은 삽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삽’은 그냥 정치적 퍼포먼스일 뿐이었다.” 라고 말할 때부터 민 변호사의 주관과 목표도 바뀌었다. 이후 그는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2003년 LA시의회에서 ‘미주 한인 의 날’을 처음 제정한 일도 그 결과물 중 하나였다.

특히 당시 미주 한인 이민사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100 주년을 맞은 해를 기해 이뤄진 일이라 한인사회에 주는 의미는 더 각별했다. ‘미주 한인의 날’은 폭동을 극복한 한인 커뮤니티의 개척정신과 미국 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4·29폭동 후 한인사회 권익보호를 절감하게 된 그는 1993년 한인법률권익재단(KALAF)을 조직하고 LA시를 상대로 리커 업주들에게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다. 2년이 넘게 걸린 지루한 싸움이었지만 그는 업주 들을 독려해 결국 승소를 이끌어냈다. 또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실상을 주류사회에 알리고 소녀상 건립에도 발 벗고 나섰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해요. 중학생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학생을 조례 시간에 불러내 칭찬하던 그 장면이… 결국 그 여학생은 돌아오지 못했지요.” 조국의 아픈 역사는 민 변호사에겐 그저 온 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통한의 개인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미주한인사회를 위한 그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 훈장 목련장을, 2009년엔 ‘대한민국 법률대상’ 해외동포부문 법률대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고희를 넘겨서도 활발한 활동을 할 만큼 건강한 그였는데 2011년 6월 돌연 왼쪽 눈에 안구암 말기 선고를 받게 된다. 수술시간만 8시간에 사망확률도 30%에 이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큰 수술이었다. 당시 취재 기자는 그의 수술을 지켜 보았다.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죠. 오른쪽 눈은 볼 수 있으니까요. 분명 제 인생에 어떤 뜻이 있어 이런 암을 만났지 싶어요.” 그는 한쪽 눈만으로도 길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였으며, 더 나아가 한쪽 눈만으로도 운전하는 자신만의 훈련을 통해 끝내 새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열정을 보여 DMV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같은 수술 후 여전히 그는 전과 다름없이 법정에 나가고 무료법률상담 현장과 강연장을 누비며 청년처럼 살아갔다.

‘한인사회 봉사가 삶의 목표’

조선시대 “민씨” 명문가였던 민 변호사의 가족사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조국의 아픈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댔던 그의 백부는 혹시라도 그 사실 이 발각돼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 싶어 아우였던 민 변호사의 부친을 일찌감치 미국 유학을 보냈 다.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민 변호사 부친 민희식씨는 10년 뒤 귀국해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그 후 1947년 LA총영사로 발령 받은 부친은 아내와 3남 2녀 를 이끌고 1948년 미국 LA에 부임했다. 당시 언제 돌아올지 모를 천리 타향 길 앞두고 인천 부둣가에서 흙 한줌 주머니에 넣고 LA에 온 민 변호사의 LA 폴리 테크닉고등학교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전교에서 동양인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ESL 클래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영어로 수업을 듣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미국 오기 전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던 영민한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고교시절을 보내고 졸업한 후 그는 포모나 인근 라번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유색인종 교사는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라 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 후인 1960년 몇 번의 면접 끝 교생실습을 나갔던 웨스트 코비나 교육구 소재 코르테즈 초등 학교(CortezElement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교육구 내 수백여 명 교사들 중 동양인은 그를 포함 고작 3명뿐이었다고 한다. 교직생활 8년 차쯤 되던 1970년 그는 YMCA 활동을 하며 만난 아내 캐롤 민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시 백인인 아내와 데이트를 하고 있노라면 백인 노인들이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백인과 유색인종 간 결혼금지법이 있었으나 다행히 결혼 무렵 그 법은 폐지됐다. 결혼 이듬해 첫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변호사가 될 결심을 한다. 당시 법대와 의대에선 유색인종을 받아 주지도 않던 시절이라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법관 임관이나 변호사 취직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글렌데일 소재 야간 법대에서 주경야독 끝 1975년 당당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가주에서 세 번째 한인 변호사가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합격 후 바로 그는 윌셔가에 변호사 사무 실을 낸다. 변호사 개업과 함께 그가 세운 철칙은 한인들 간 소송은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돈을 벌기보다는 가능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개업 후 첫 1~2년은 고전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이민문호 개방과 함께 한국에서 이민 행렬이 이어지면서 사무실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그는 LA한인사회 유일한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입지를 굳히면서 하루에 다섯 차례 씩 법정을 오갈만큼 바빠지기도 했었다.어느새 그의 춘추 90세다. 격랑의 한미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해온 그의 삶은 이제 차곡차곡 쌓여 미주한인사회의 한 권의 이민역사책이 됐다. 어수선한 상실의 시대, 포기를 모르고 희망을 향해 쉼 없이 전진했던 그의 삶이야 말로 우리의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명쾌한 나침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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