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의원 11명 만장일치로 LA사적지로 공식 지정
■ LA시 흥사단 전단소 사적지 신청서에 오류 많아
■ 보훈처, LA총영사관 동포사회 여론 파악 재정비
■ 주정부 연방정부 문화유산 지정위해 전문가 구성
LA시의회는 3.1절 하루 전날 지난 28일 전체회의에서 참석 시의원 11명의 만장일치로 흥사단 옛 본부 건물(단소, 3421-3423 South Catalina Street, LA)을 LA시 사적지(LA Historic-Cultural Monuments) 로 공식 지정했다. 이번 LA 시의회의 결정은 올해 3·1절 104돌에 맞춰 뜻과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는 사적지 지정 첫 절차인 소위원회 1차 공청회가 이뤄진 지난 2021년 7월을 기점으로 약 19개월 만이며, 한인단체들이 시정부에 사적지 지정을 신청한 2021년 6월을 기점으로 하면 약 20개월 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제 한인사회는 LA시와 함께 흥사단 단소 사적지 보호와 운영 관리에 힘을 모아야 하는데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어 초장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특별취재반>
흥사단 단소 사적지 논의를 위한 지난 28일 LA 시의회 전체회의에는 일부 한인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표결 전 의견을 발표하며 흥사단 옛 단소의 사적지 지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날 주로 흥사단 관계자들이 참석해 ‘흥사단은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한인 이민자들의 희망과 열망을 구체화한 단체로, 흥사단 옛 본부 건물이 사적지로 지정돼 선조들의 희생을 후손들에게 전하는데 쓰일 수 있도록 복원 및 보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고, ‘이 건물은 한국 의 독립운동과 실제로 깊게 연관돼 있으며, 초기 한인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 여겨졌다’ 고 증언했고, 그리고 ‘한국 정부가 매입을 결정한 옛 단소가 한인사회의 역사적 유산으로 앞으로 의미 있게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어 ‘이 건물은 한인사회에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LA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높히고 타민족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인사회 다섯번째 역사적 유산
이 외에도 LA시의 유일한 한인 시의원인 존 이 시의원(12지구)은 “한국 외에서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된 흥사단 옛 단소는 이미 한인 사회에서 역사적 기념물로 여겨져 왔으며, 한인사회에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흥사단 전단소 건물이 위치한 지역(8지구)을 관할하는 마퀴스 해리슨-도슨 시의원도 표결 전 지지 성명을 통해 흥사단 옛 단소 건물의 사적지 지정을 위해 힘쓰고 중요 성을 알려준 한인단체 관계자들에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날 시의회에서 통과된 사적지 지정안은 캐런 배스 LA시장의 서명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다. 흥사단 단소 사적지 지정건은 원래 지난 2021년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당시 이사장 윤효신)이 주축이 되어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당시 회장 홍명기), 미주3·1여성동지회(회장 그레이스 송)을 포함한 한인단체들이 아시안태평양주민역사보존협회(APIAHP)와 협력해 LA시에 요청했다.
이러는 가운데 한국 국가보훈처가 지난달 개발 업체에 의해 철거 위기에 놓였던 흥사단 전 단소 건물을 매입하면서 단소 보존을 위한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LA시가 한인 이민사 관련 건물을 역사문화 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템플사이나이이스트(구 한인 필라델피아장로교회ㆍ91호), 우정의 종각(187호), 대한인국민회총회관(548호), LA한인 연합 감리교회(1236호)에 이어 흥사단 단소가 다섯 번째다. 흥사단 전단소 사적지 지정은 지난 2021년 11월 2차 공청회 이후 3차 공청회가 오랜 기간 미뤄져 왔는데, 한국의 국가 보훈처가 지난달 이 건물을 295만 달러에 직접 매입한 후 사적지 지정 움직임 이 급물살을 타며 지난 2월달에 3차 공청회와 시의회 표결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국가보훈처는 흥사단 옛 단소 건물에 대해 2025년까지 리모델링을 완료한다는 목표다.
피폐한 건물 보수작업이 우선과제
한편 한인사회 일각에서는 ‘흥사단 전단소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처음 국민회기념재단 측에서 한인 사회에 호소하여 캠페인이 시작됐는데, 뒤늦게 흥사단이 마치 자기들이 모든 캠페인을 주도한 것 처럼 나서는 모습이 안좋다’면서 ‘보훈처나 LA총영사관도 한인사회 여론을 파악하는데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한국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지난 1월 31일 부동산 재개발로 인한 멸실 위기의 LA소재 흥사단 옛 본부 건물(단소)을 사적지로 보존하기 위해 매입계약 체결했다고 공식 보도했다. 보훈처는 우선 건물 내외부 안정화 작업을 실시한 뒤 연내에 건축물에 대한 기록화 작업 및 정밀 실측에 나설 계획이며 이후 관계 전문가와 한인사회의 의견수렴을 거쳐 건물 활용방안을 수립, 2025년 상반기까지 재 단장(리모델링)공사를 완료한 후 2025년 8월 15일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보훈처는 앞으로 LA시 사적지 지정이 완료되면 주 및 연방차원의 문화 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여 우리의 독립 운동자산이 미국의 문화유산으로도 보존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본보 취재진이 LA시에서 긴급 수집한 171 페이지 자료(CHC-2021-5125-HCM, ENV-2021-5126-CE)에 따르면 LA시당국이 흥사단 전단소를 두번이나 실제 방문하여 전면적인 조사를 한 기록이 나타났으며, 단소 건물의 피폐상이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편 LA시가 입수한 자료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증거 자료들도 혼합되어 있어, 이에 대한 보완 작업도 매우 시급하다. 앞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까지 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으려면 전문적이고 고증을 겸비한 연구진 들이 시급히 구성되어 이에 대한 준비작업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미국 동포사회의 이민 역사에 대한 생각부터 다시 검증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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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점] 흥사단은 국민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오늘날 국민회관기념관으로 복원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의 원래 주인인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한인 이민역사상 독립운동의 최초의 연합운동체로 창립되었다. 그러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 되면서 그의 소명이 다 됐다고 생각했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조국을 위한 구호활동에 나섰으며, 한국의 민주화에도 기여하다 가 1989년 3월 7일에 LA에서 해산됐다. 국민회 해산을 위한 마지막 공식회의를 기록한 사람이 서기를 맡았던 구융회 장로(2007년 작고)였다. 20년전인 지난 2003년 9월 5일 구융회 장로는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면서 본보 기자에게 약 3시간 동안 피맺힌 증언을 했다. 그는 국민회를 청산하는 마지막 회의록을 보여주면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당시 국민회관 사료 문제와 관련 “이런저런 사연으로 국민회관의 사료들이 분실되고 사그라지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메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967년 7월 13일 이민으로 LA에 정착한 구융회 장로는 당시 국민회 회장인 김성락 목사(작고)의 권유로 국민회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그 해 12월부터 그는 편집장과 주필로 근무 하면서 신한민보를 창간호부터 자신이 편집할 때 까지를 모두 읽었다고 했다.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에 대해 그는 “대학 공부한 것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을 배운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한민보는 한국의 국호와 연호 그리고 한글을 고수한 유일한 역사적 신문”이라며 “특히 일제 강압시절 세계 각 지역 동포사회로부터 접수된 전보문을 가지고 편집하는 등 살아 숨쉬고,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신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한민보의 기사는 조상의 눈물 자욱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신한민보의 역사적 가치성
이처럼 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미국에서 나라 없는 한인들에게 조국의 정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1913년 당시 국민회 이대위 총회장 시절에는 미국정부로부터 ‘자치정부’의 대우까지 받을 정도로 역량을 보였다. 당시 국민회는 ‘임시정부’ 격으로 국민회가 보증을 서면 이민국도 불법 체류 한인동포에게 미국 체류증을 발급해 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단체였다. 그해 5월 1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단 했다. 일부에서는 도산이 리버사이드에서 흥사단을 창단했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다. 그러나 해방 후 세월이 흘러 1965년 미국의 개정 이민법으로 한인이민이 대폭 증가되면서 미주 동포사회는 새로운 커뮤니티로 형성 되어 가면서 독립운동체였던 국민회는 회원들이 줄어들어 자연히 해산의 길을 걷게 됐다.
공식적으로 국민회 마지막 회장은 안승화(작고)씨였다. 국민회 마지막 청산회의는 1989년 1월 20일 오후 1시30분 LA코리아타운의 세종회관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당시 안승화 회장을 포함해 이화목 , 안정옥 이사, 구융회 서기 그리고 김희선 재무 등 5명이었다. 이날의 주요 결의사항은 국민회의 재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당시 국민회 재산은 국민회관에 보존된 유물과 사료 등과 ‘홈 세이빙 오브 아메리카’(Home Saving of America) 은행에 정기 예금으로 기탁된 기금( 만기일 금액 45,118달러 25센트)이었다. 회의에서 재산을 LA총영사관이나 동포단체 등에 위탁시키자는 논의를 한 결과,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해온 흥사단으로 결정했다. 국민회는 은행 예치기금 약 45,000 달러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측 으로부터 받을 미수금 (당시 국민회는 자체 건물 국민회관을 교회에 매각했다)까지를 흥사단에 모두 기탁하면서 딱 한가지 조건만 내 걸었다.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 이었다. ‘역사 속에서 대한인국민회’ 존재 만이라도 남기자는 뜻이었다.
국민회 청산 재산 받은 흥사단의 행위
또 국민회의 모든 유물과 사료는 흥사단이 위임을 받아 훗날 조국이 통일되면 책임 있는 기념관에 영구 보존하도록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회의는 이 결의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안승화 회장, 구융회 서기, 김희선 재무 3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들 3인은 그 해(1989년 )3월7일 왕관 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흥사단에게 국민회의의 청산결의문을 발송하고 흥사단 측의 공식 수락서를 받은 후 청산업무를 집행키로 했다. 당시 흥사단 미주위원부는 위원장의 명의로 대한인국민회의 모든 조건을 수락한다는 공문을 국민회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안승화 회장이 흥사단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기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졸지에 구융회 서기는 국민회 회장대행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결국 국민회와 흥사단은 1989년 5월1일 LA한국회관에서 국민회 청산에 따른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하지만 국민회로부터 ‘대한인국민회 장학금 지급’ 조건으로 청산기금을 받은 흥사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후3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흥사단의 누구도 이에 대하여 책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도산의 어록을 매 기념일 마다 읊으고 있는 흥사단은 과연 어떤 단체인가? 지난 2003년 본보와의 인터뷰 당시 국민회 회장대행 구융회 장로는 “오늘 날까지 흥사단이 국민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그 돈이 어떤 돈 인데···국민회 청산을 담당했던 한사람으로 선조들을 볼 면목 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흥사단 측에 연유를 알아보았는데, 자기들 단소(회관) 관련 비용에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 분이 복바쳤다” 며 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노감을 나타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시 흥사단에 촉구 하겠다” 고 말했다.
흥사단, 국민회 장학금 약속 지켜야
하지만 구융회 장로는 끝내 흥사단에서 ‘국민회 장학금’을 지급 약속 보도를 듣지 못한 채 본보와 마지막 인터뷰 후 4년만인 지난2007년 3월 15일 별세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다”가 한이 됐다. 구융회 장로는 2003년 당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이라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비젼을 우리사회가 지녀야 한다”면서 “우리 한국인에게는 다른 민족이 지니지 못하는 ‘뜨거 움’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취재반에게 “젊은 세대에게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알려 주는 일이야 말로 희망의 비젼이다”라며 “국민회관 사료보존에 교회나 흥사단을 포함해 관련 단체들이 서로 칭찬하면서 바른 길을 택하길” 당부했다.
하지만 흥사단은 국민회 사료도 지켜주지 못했고, 국민회 이름으로의 장학금 지급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역사와 국민회 그리고 미주동포에 대한 배신 행위나 다름없다. 국민회가 청산할 때 기증했던 그 돈으로 자신들의 단소 유지 비용에 사용했던 몰염치한 흥사단은 오늘날 그 단소마저 지키지 못하고 철거 위기를 만났는데 아이너리칼 하게도 국민회관기념재단의 당시 윤효신 이사장 이 이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국민회의 “최후의 증언자” 구융회 장로가 하늘나라에서 후손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구융회 장로의 마지막 유언이 담긴 녹음 테이프는 한미박물관이 건립되면 그곳에 기증해야 하는데, 한미박물관의 건립도 요원한 것 같아 씁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