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특집] ‘이철수 인권 승리 스토리’ PBS 미전국 최초 방영하기까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 아시안 증오범죄가 타오르는 때 던지는 메시지
■ 미주 이민사에서 최초 아시안 인권승리의 표징
■ ‘이중 언어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조례 제정
■ 소수 인종 관련 재판 시 문화 이해 판례도 생겨
■ 한인이민자들이 알아야하는 하는 ‘이철수사건’
■ 한인 할머니 할아버지 일본계 운동가들과 합심
■ 이경원 기자의 진정한 언론관이 이끈 인권운동
■ 사형수 이철수에게 자유를 안겨준 랑꼬의 공헌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가장 공정성을 평가받고 있는 PBS방송이 미국 인권운동 이민사에서 최초의 아시안 인권 승리의 상징인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 감독: 줄리 하&유진 이)이란 다큐 영화를 지난 4월 24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최초로 방영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에 PBS가 미전국으로 방송하면서 미국 인권운동사에서 최초의 아시안 인권의 승리가 된 ‘이철수 사건’은 미국 사회에 소수민족 인권신장에 새로운 역사적 기록이 되고 있다. 이 다큐는 이미 지난 1월 말 열렸던 선댄스 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총 1시간 24분 52초 짜리 다큐 영화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이라는 작품에서 한인 이민 청소년 ‘이철수’ 가 미국 사법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희생되어 ‘사형수’로 굴러 떨어졌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풀뿌리 운동’ 으로 끝내 자유를 찾는 드라매틱한 과정을 최초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이철수에게 자유를’이라는 다큐 영화는 이철수가 옥중에서 미주류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잠깐 등장하고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다리가 나타나면서 1973년 차이나타운 모습이 나오면서 이철수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철수 사건을 처음 인지하고 이철수의 무죄를 믿었던 랑꼬 야마다 변호사가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철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이경원 대기자와 함께, 가장 헌신적인 후원자였다. 이철수 사건 당시(1973년 6월 3일)일본계 3세 여고생인 랑꼬 야마다(Ranko Yamada)는 언니와 잠깐 데이트했던 한국인 청년 이철수가 차이나타운 갱 살인 사건으로 체포된 신문 기사를 보고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직감하고 이철수에게 “너는 범인이 아니다”라며 글을 보낸다.

랑꼬 야먀다는 그후 수중에 500달러 저금통장을 들고 변호사를 찾아다니며 도울 길을 찾는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이철수가 살인범 용의자라며 엄청난 변호비(1차 선임료 $5,000)를 요구한다. 평소 “변호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법조인”이라고 배웠던 랑꼬는 크게 실망하며 주위의 사회 운동가들을 찾아 다니게 된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꿈이었던 랑꼬 야마다는 자신이 변호사가 되어 이철수 같은 사건을 돕겠다고 법대를 진학해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한편 영문 모르고 체포된 이철수에게는 미국의 사법제도는 인권존중 보다 인종차별이 더 강했다. 캘리포니아 법원이 지정한 관선변호인 크리포드 굴드(Clifford Gould)는 한국인인 이철수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이철수에게는 서류마다 “중국인”(Chinese)로 적혀 있었다. 심지어 1심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듀엘 교도소에 들어 갔을 때 교도소 당국은 이철수는 라티노 갱단 ‘뉴에스트라 파밀리아’(Nuestra Familia) 소속 멤버”라고까지 적어 놓았다.(나중에 이를 정정했다.) 억울하게 체포되고 자기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경찰이나 관선 변호인의 자세에 낙망한 이철수는 유일한 희망이 일본계 친구 랑꼬 야마다가 보내주는 편지였다. 나중 이철수는 랑꼬 야마다에게 “당신 이외에 나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글을 보냈다.(10년 억울한 옥살이 끝에 1983년 3월 28일 스탁턴 교도소에서 풀려난 이철수는 본 기자와 대담에서 “랑꼬가 없었다면 나는 사형수 감방에서 자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랑꼬가 없었다면 자살 했을 것”

이철수가 1974년 차이나타운 갱 ‘입이택’(Yip Yee Tak)살해 용의자로 체포되어 물증도 없는 재판 (1974년)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을 때까지 이철수에게는 랑꼬 야마다만이 홀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랑꼬 야마다는 나중 이경원 대기자에게 글과 전화로 “이철수의 무죄를 밝혀 달라”고 호소했다. 1977년 이철수 인생의 또 다른 분기점이 찾아왔다. 당시 주류 언론의 유일한 한국 기자였던 이경 원 대기자와의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이경원 대기자는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사에서 100여 마일 떨어진 샌프란시스코까지 무려 6개월동안 취재 여정에서 예리한 눈으로 사건에 대한 5년 간의 조사 보고서를 수집하여 경찰과 검찰 그리고 관여 판사들이 젊은 수감자(이철수)를 오인 했 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미국 형사 사법 제도의 인종적 편견과 불의를 폭로했다. 이경원 대기자는 이철수를 인터뷰해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지1면에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속의 앨리스 (Alice-in-Chinatown Murder case)”라는 제목으로 이철수 중국갱 살해 재판은 법적 제도적으로 완전하게 불법 재판이었다고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가 AP 통신을 비롯한 미 전국 유명 언론들의 보도로 이어 졌고, 이경원 대기자는 이철수 사건과 관련해 장장 5년동안 120여편의 시리즈 기사를 끈질기게 연재하면서 ‘이철수 구명운동’이 시작되어, 범 아시아계 인권 변호사들이 함께 협력해 결국 이철수가 사형수에서 자유인으로의 무죄 석방되는데 기여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언론에서 이경원 대기자의 이 쾌거를 일제히 보도함으로써 많은 미국인들이 ‘K. W. Lee’를 존경하게 됐다. 이경원 대기자의 ‘이철수 사건’ 특종기사를 본 당시 UC버클리대의 일본계 대학생 제프 아다치(Jeff Adachi, 나중 SF 관선변호인 겸 사회 운동가)와 역시 일본계 데이빗 가키시바(David Kakishiba)는 직접 새크라멘토 신문사로 이경원 대기자를 찾아가 사건 경위를 듣고는 이철수 구명위원회에 합세 하면서 일본 커뮤니티를 포함 미국사회에 이철수 구명운동을 랑꼬 야마다와 함께 주도하게 된다.

무죄로 이끈 ‘풀뿌리 운동’

1시간 25분 짜리 다큐 영화에서 이철수의 독백과 함께 이경원 대기자, 랑꼬 야마다 변호사, 제프 아다치 국선변호인, 데이빗 가키시바 사회운동가들이 이철수 사건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이철수에게 자유를’은 한마디로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종 프로파일링을 받고 부당하게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젊은 한인 이민자의 참혹한 이야기를 파헤친 것으로 이 사건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전례 없는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고, 마침내 이철수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낸 과정을 사실 자료를 통해 조명했다. 이민 1세대부터 젊은 세대 학생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한인, 일본계, 아시안계, 히스패닉계 이민자 커뮤니티는 힘을 합쳐 1970년대 후반부터 1982년 재심이 승인될 때까지 획기적인 범아시아계 미국인 운동을 이끌어 나간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1950-53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철수는 불과 12세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머니와 재회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고독한 한국인 청소년’으로 영어도 모른채 홀로 자란 이철수는 어느 순간 위탁가정에서 소년원, 심지어 정신과 시설까지 전전하며 위험에 처한 청소년의 고립된 삶에 빠져들게 된다. 학교에서 동료학생들과 다투다 교장에게 끌려간 이철수는 교장의 호통을 고개를 떨구고 (한국 에서는 어른에게 야단 맞을 때 고개를 숙여야 한다) 듣고 있는 이철수를 교장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 했다. (미국에서는 어른에게 야단 맞을 때 상대편을 똑바로 처다 보는 것이 예의이다.) 시간이 흘러 사건은 1973년 6월 3일, 차이나타운의 중국 갱단 간부 입이탁이 백주 대낮에 총격을 받고 살해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차이나타운에서 10여건 이상 살인사건이 발생했는 데 한 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차에 다시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샌프란시스코 알리오토(Alioto)시장은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런 과정에서 문제 청소년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논 경찰이 살해 용의자로 여러 명을 잡아 들이는 과정에서 21세의 이철수가 억울하게 체포됐다. 당시 총기도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은 더욱 이철 수를 의심했다.

당시 자신의 여자 친구와 식사했던 이철수의 알리바이도 경찰에 의해 묵살되고, 심지어 서건 당시의 한 백인 목격자가 ‘이철수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제보도 묵살 당하고 끝내, 물증도 없는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 받고 듀엘 교도소로 보내졌다. 이철수는 복역 중 설상가상으로 교도소에서 백인우월주의자 갱단인 모리슨 니드햄(Morrison Needham)의 공격에 대응하다 정당방위 살인을 하면서, 이철수는 두번째 재판에서 사형선고 (1979년 3월)를 받고서 캘리포니아주의 사형수들이 복역하는 샌퀸틴 교도소 독방에서 21호 사형수로 독개스형으로 집행당하는 날을 기다리게 됐던 것이다. 여기에 이경원 대기자의 특종기사가 아시안 인권운동의 불을 당기게 되었고, 끝내 이철수는 무죄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감동케 한 전설적인 사립탐정 톰슨(Thompson)의 증거자료 수집과 죽음을 무릅쓰고 사건 현장을 증언한 스티븐 모리슨(Steven Morrison)의 정의로운 증언도 빼놀 수 없다. 1073년 6월 3일 차이나타운을 방문했던 스티븐 모리슨은 3발의 총성을 듣고,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청년을 보았다. 그 청년은 수염이 없었다.(당시 이철수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살인범은 턱수염이 없었다”

‘이철수에게 자유를’이라는 다큐 영화를 연출한 줄리 하(Julie Ha) 감독은 이 작품이 그녀의 생애 첫 작품이다. 그녀는 원래 이철수라는 한국 이민자 청년을 잘 몰랐다. 그녀가 영문 잡지 코레암저널 (KoreAm Journal)에서 편집장을 하면서 미국 언론에서 활약하는 이경원 대기자 (미국사회에서 는K.W. Lee로 불린다, 박스 기사 참조)를 멘토로 존경해 왔다.
한국계 언론인으로 미국언론계에서 전설적인 영역을 넖였던 이경원 대기자를 닮고 싶어하는 그녀는 원래 이철수 작품보다 멘토인 이경원 대기자 이야기(Story of K.W. Lee)를 작품으로 구상 했었다. 이경원 대기자는 사양했다.

그래서 멘토를 생각하며 이경원 대기자의 대표적 특종기사 이철수 사건(Free Chol Soo Lee)을 조명하기로 결심을 바꾸었다. 이 작품을 만든 줄리 하 감독과 유진 이 감독은, 이경원 대기자의 사건 파일, 충분한 기록 영상과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이끌었던 한인들과 특히 주도적 역활을 했던 일본계 랑꼬 야마다, 제프 아다치(Jeff Adachi)등등 운동가들의 설명, 그리고 이철수가 쓴 글에서 가져온 내레이션을 사용 하여, 종신형 및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에서 생존 싸움을 이어 가는 이철수 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이철수 사건은 이민자의 애환’

본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씨의 이야기를 사법적 맥락에서만 논의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이 사건이 그의 공정한 재심을 옹호하기 위해 세대를 초월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풀뿌리 사회 정의 캠페인이 발생한 과정을 더욱 파고 들고 있다. 그녀는 “우리는 이철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힘에 너무 강하게 느끼고 있다”면서 “저는 종종 여러분들의 심장이 뛴다면 이 다큐 영화가 당신을 감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이철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여파로 아시아계 미국인과 태평양 섬 주민(AAPI)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급증하는 가운데, 하 감독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집단 저항 운동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 에서 시청자가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난한 한국 이민자가 살인죄로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폭력적인 감옥 중 하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동안, 한 선구적인 한국 이민자 기자가 그의 사건을 우연히 발견하고 진실을 밝히는 활동에 전념했다”면서 “저널리즘적인 엄격함과 인간적인 렌즈로 가득찬 그의 기사는 이 나라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획기적인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을 촉발시켰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 기자가 이경원 대기자(K.W. Lee)이다. 줄리 하 감독은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수많은 한국인들, 특히 중년과 노년의 이민자들은 이철수 석방운동으로 하나로 뭉쳐 투쟁했으며, 여기에 또다른 아시안들과 미국인 운동가들이 단결했던 모습들은 감동이었다”면서 “이철수는 그가 체포되기 전부터 문제아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당한 차별을 보고 그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 관심, 사랑, 보살핌을 그에게 바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이철수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열정으로 싸우도록 영감을 주는 자석 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사랑하는 멘토 이경원 대기자(K.W. Lee)에게 감사하기 위해 개인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또 다른 사랑의 실마리 가 담겨 있다. 진실에 대한 사랑, 정의에 대한 사랑, 인간성에 대한 사랑, 공동체에 대한 사랑, 우리가 동료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특히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이경원 대기자는 ‘역사가 없는 사람들은 공허하다’고 말했다”면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고, 영감을 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하기를 희망하며, 이 역사로 사람들을 무장시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녀는 “더 정의롭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제 책임은 무엇일까? ‘이철수에게 자유를’ 이라는 유산은 계속될 수 있고 또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작품으로 만들면서 “오늘날, 새로운 관객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들 자신의 삶에서 이철수의 고통, 투쟁, 회복력과 연결시키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면서 “그리고 가장 특이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끌었던 이 독특한 저항 운동에 영감을 받았다”고 전했다. 또한 그녀는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장애물 앞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 공동체가 아시안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의 물결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이철수 사건은 이에 대한 매우 강력한 메시지이다.”라고 선언했다. 줄리 하 감독은 지난 6년 동안 이 다큐 영화를 만드는 동안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이철수가 일생 동안 겪었던 모든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명상했던 것을 기억하지만, 그는 매번 좌절 후에도 계속해서 일어섰다. 이철수는 더 이상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 그녀가 유방암 투병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고 다시 일어나 싸우고 싶도록 영감을 준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는 “이철수의 이야기의 힘을 안다.”면서 “40여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철수 사건은 오늘날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

“이철수는 사형수가 아니다”
“아시안 언론의 대부” 이경원(K.W. Lee) 대기자

이경원 대기자는1928년 한국 개성에서 태어나 1949년 말 고려대를 중퇴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웨스트 버지니아대와 일리노이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1955년 킹스포트 타임스에서 처음 일간지 기자생활에 발을 디뎠다. 유학생이었던 그가 기자가 된 건 우연이었다. 애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이승만 정권 장기독재를 비판하는 칼럼을 현지 언론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여권이 말소됐다. 비자까지 만료 되면서 국제 미아가 됐다. 그는 미국에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100곳이 넘는 언론사에 지원서를 냈는데 운 좋게 테네시주의 킹스포트 타임즈라는 지역 언론사에서 그를 채용했다. 70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유력 언론이자,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기자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한 ‘새크라멘토 유니언’(Sacramento Union)에 진출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주요 일간지 기자가 된 것이다.

당시 유일한 동양인 기자였던 그는 미국내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미국내 동양인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철수 사건’(Free Chol Soo Lee)을 들고 있다. 그는 1973년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잘못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수 사건’의 진상을 특종 보도(해 10년만에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서 사건담당 기자로 활동하던 1974년, 누명을 쓰고 형무소에 수감된 한인 청년 ‘이철수’를 만난다. 그는 판결이 잘못 됐음을 알고 이철수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전력한다. 당시 무려 120여 차례에 걸친 연속 보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철수씨에게 200만분의 1이라는 사형수 재심 재판을 받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를 석방하게 하는 쾌거를 이뤄 당시 소수민족에 대한 미국인들의 차별의식에 크나큰 경종을 울렸다.

이같은 특종 이전에도 그는 미 남부지역 인권문제를 고발하고 애팔레치안 탄광 광부들의 진폐증 실태를 알리면서 미국내 특종기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이경원 대기자는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안 제임스 레스턴, 테드 터너 등과 함께 20세기 미 언론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00여명의 언론인”으로 선정됐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했다. 따라서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에 ‘언론인 500명’ 명단에 올랐다. 미국 내셔널 헤드라 이너스 클럽, AP 특종상, 미국을 빛낸 500 언론인 중 하나, 동양인 최초의 미 주요 일간지 기자 등등의 경력으로 미국 언론계에서는 그를 “아시안 언론의 대부”라고 부른다. 이경원 대기자는 지난 2016년 5월 모교인 고려대 후원으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사연을 담은 <외로운 여정-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 하와이에서 유카탄, 쿠바까지>를 한국어로 출간했다. 그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민 2세들은 돈도 못 벌고 영어도 서툰 아버지 세대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한국을 잊고자 했지만, 젊은 3세대들은 다시 한국을 기억하길 원한다”며 “그들에게 이민자 1세대가 겪은 삶의 여정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이철수 사건’이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 캘리포니아주에서 이중언어 교사 채용 의무 제도가 생겨난 것은 ‘이철수 사건’ 때문이었다. 이철수 사건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민자 학생들이 100명이 넘는 공립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중 언어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서 형사 사건에서 소수인종 이민자들이 관련된 재판에는 이민자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중요한 판례가 생겨났다. 한편, 사건의 당사자인 이철수는 자유의 몸 이후로 사회 적응에 실패하여 마약남용 등으로 일시 복역도 하는 등 청소부 등으로 어려운 삶을 살다가 위장병으로 2014년 11월 18일 사망하였다.

이철수 사건은 당시 미국 백인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벌을 선고 받은 개인에 대해서 재미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미국내 일본계 아시안계 백인들 시민 사회가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를 받아 낸 사건이었다. 아울러 이철수 사건을 계기로 전 재미 한인들이 하나로 단결해 구명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재미 한인 사회가 단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사회에서도 아시안의 인권차별 소송의 승리를 가져온 첫 케이스였다. 이철수 사건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을 처음 보도한 이경원 대기자는 원래 미서부의 가장 오래된 일간지 ‘새크라멘토 유니언(Sacramento Union)’지의 탐사 보도국 책임기자로 활동하다가, 신문사를 은퇴하고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 인권과 정의에 대해서 미국의 주요 대학들을 순회 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이 당시 하바드대에서 이경원 대기자의 강연을 들었던 대학생 김도형(Do Kim)씨는 나중 변호사가 되어 현재 코리아타운에서 인권변호사 겸 ‘K.W. Lee Leadership Center’를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인권 운동을 지도하고 있다. 또한 이철수 구명위원회에서 활동한 한인 청년들 중에 인권과 정의 운동에 앞장서는 변호사와 정치가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김익창 박사(작고)와 부인 그레이스 김 여사와 함께 처음 주도한 유재건 변호사는 이철수 사건 후 한국 정치계에서 크게 활동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이철수 구명위원회에서 봉사자로 활동하던 대학생들 중에도 나중 코리아타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던컨 이 변호사를 포함해, 데니스 김, 케네스 이, 추숙남, 심영식 등이 변호사가 되었고, 일본계 월렌 후루타니(Warren Frutani)는 정치인으로 성장해 캘리포니아주 하원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

PBS에서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 시청하기

‣ 5월 22일까지 PBS YouTube에서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에 대한 뉴스 공유(한국어 자막 있음!)
‣ 7월 22일까지 PBS 앱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에 대한 뉴스 공유 (한국어 자막 있음!)
‣ 4월 24일(프리미어 타임)부터 5월 23일까지 PBS YouTube에서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를 스트리밍 하여 시청할 수 있다.
‣ 4월 24일(프리미어 타임)부터 7월 22일까지 PBS 앱에서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를 스트리밍하여 시청할 수 있다.
– 감독: 줄리 하(Julie Ha)/ 310-351-9802/ 이메일: [email protected]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