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코리아타운에서 펼쳐진 “우리는 하나다” 한 목소리
◼ 미주에서 거주하다 숨진 탈북민들을 위한 추모 예배도
◼ 탈북민 자녀에게 장학금 수여로 용기와 희망과 격려를
◼ 영국에 해외 최대 탈북민 거주지역 ‘리틀 평양’이 있다
“우리 애국가에 있는‘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구절을 노래하며, 한국전쟁에서 싸우신 UN참전용사님, 미국 땅에서 독립운동 하신 안창호 선생님이 넋을 기리며, 우리 탈북민들을 위한 날을 맞아 오늘 LA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를 함께 외치니, 다시금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말은 지난 12일 오후 3시 LA코리아타운 가든 스윗 호텔에서 개최된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미주 탈북민대회’에 초청 받은 북한 꽃제비’출신으로 탈북해 영국에서 정계에 입문하여 영국 보수당 정치인으로 공천을 받은 티모시 조 국장(영국APPG NK 사무국장,별첨 박스 기사 참조)이 행한 주제 강연의 일부이다. 그는 대한민국 애국가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강조했고, 6·25 전쟁에서 숨진 참전용사들을 기억했으며 미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편 도산의 동포사랑도 유산으로 담아낸 보기 드문 자랑스런 탈북민이었다. 그는 이날 강연을 통해 “한국과 영국 그리고 미국 등을 포함 전세계에 있는 탈북민들이 김정은 독재체제에서 신음하는 2500만 북한 동포를 구출하고,통일을 이룩하는데 재외동포 여러분과 함께 앞장서 나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티모시 조 탈북민은 3만 6천여명 탈북민 중에서 한국 이외 나라인 ‘의회 정치의본산’ 영국에서 최초로 공당인 보수당의 공천을 받은 탈북민으로 성공 가도를 가는 차세대 통일 선봉장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미주 탈북민대회는 NKIA 탈북민선교회(회장김영구), 민주평통 LA협의회(회장 이용태), 통일교육위원 LA협의회(회장 이순희), 미주북한인권통일연대(회장 권정순),탈북민자녀장학위원회(회장 조선환)의 공동주관으로 제1부 감사예배, 2부 기념행사, 3부 탈북민 자녀 장학금 수여식 등으로 진행됐다. 이날 남가주 지역 탈북민 가족 40여명과 LA와 타지역 한인사회 교계와 사회단체 25개 관련 단체 인사 등 약 160명이 참석하여 약 3시간 동안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를 소리 높여 노래하고 춤추고 합창했다. 이날 감사예배에서 한기형 목사는 “나는 이 땅의 그루터기”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탈북민 여러분, 우리는 남이 아니고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우리 모두 희망을 놓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자”고 기도했다.
제2부 기념행사에서는 특히 미국무부의 줄리 터너 북한인권특별대사의 축사가 영상으로 전했졌으며, 특별 초청된 영국 거주 탈북민 티모시 조 국장이 약 30분간 강연을 통해 북한에서의 ‘꽃제비’생할과 죽음을 넘나든 탈출과정과 중국에서의 선교사 도움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자력으로 영국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해 영국의 대표 정당의 하나인 보수당에서 공천까지 받는 정치인으로의 길을 가면서 앞으로 통일한국을 위한 대변자가 될 것을 다짐하는 각오를 밝혀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날 탈북민 예술인 이주하는 “홀로 아리랑”을 장고춤으로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날 탈북민 자녀 장학금 수여식에서 조선환 장학재단이사장은 탈북민 자녀 8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탈북민 자녀인 현 아리 군은 “아들이 아빠에게”에게보내는 감사의 말을 똑부러지게 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행사는 참석자 모두가 “홀로 아리랑”을 합창하면서 모두가 하나의 가족 하나의 한국인임을 다짐하고 통일을 염원했다.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미주 탈북민대회는 다음날인 주말 대한장의사에서 미주땅에서 숨진 탈북민들을 위한 추모예배를 올렸고, 우정의 종각에서 탈북민 가족 친목회로 ‘북한이탈주민 의 날’ 행사를 의미있게 치루었다. 이번 행사를 총괄한 NKIA 탈북민선교회 회장김영구 목사는 “탈북민의 날을 역사적으로 의미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 20여개 단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면서 “앞으로 통일의 그날까지 미주한인사회가 탈북민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날의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미주 탈북민대회 주최,주관,협력 단체는 다음과 같다.
✦공동주최: NKIA탈북민선교회(회장김영구), AKUS한미연합회총본주(회장김영길), 민주평통OC-SD(회장 설증혁) ✦주관단체: NKIA 탈북민선교회(회장김영구), 민주평통LA협의회(회장 이용태), 통일교육위원 LA협의회(회장 이순희), 미주북한인권통일연대(회장 권정순),탈북민자녀장학위원회(회장 조선환) ✦협력단체: AKUS한미연합회(LA, South West, State of Missouri, Tuson Arizona, Phenix Arizona), 남가주 6․25참전유공자회, One Korea 재단, 건국대통령이승만기념사업회, 대한민국역사지키기 운동본부,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 미주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CBS-TV 기독교방송, 미주기독 일보, 미주 3․1여성동지회, 미주여성코랄, 월드쉐어USA, 일천만이산가족 위원회, 남가주기독교 협의회, 남가주육군동지회, 한미맥아더장군기념사업회, 미주기독한의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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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반역자의 아들에서 영국보수당 정치인이되기까지…
‘티모시 조’를 아시나요?
◼ 탈북민 티모시 조 영국 APPG NK 사무국장은 누구?
북한에서 꽃제비 출신 탈북민 티모시 조씨는 2008년17세 청소년 시절에 2차례 탈북에 4차례 감옥 생활로 죽음 직전에 자유대한으로 탈출한 후 다시 꿈을 안고 영국으로 이주하여 16년을 자립정신으로 영국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여 영국 보수당 공천을 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지난해는 찰스 3세 영국 국왕,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정치인이 되었다. 탈북민 티모시 조(Timothy Cho) 영국 APPG NK 사무국장을 소개할 때마다 따라 붙는 이야기다. 그는 영국 의회에서 북한 문제에 관한 초당파 의원 모임인 APPG NK(All Party Parliamentary Group on North Korea)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 탈북민이다.
APPG NK는 탈북민의 자립을 돕고 북한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영국 의회 내 의원들의 모임으로, 북한의 인권 문제는 물론 한반도에 긴장감을 초래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티모시 조 국장은 북한 인권 현황은 물론 한반도 내 무력 도발 등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 브리핑도 담당하고 있다. 그는 북한 인권 개선과 탈북민의 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목소리가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활동하여 UN에서 초청받고, 미국 백악관에서도 초청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영국으로 간 동기는 고향에서 가장 먼 땅으로 떠나야겠다 마음에서다. 티모시 조의 부모는 모두 북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북한의 왜곡된 역사 교육에 회의를 품고 탈북했다. 홀로 남은 소년 티모시 조는 길에서 잠을 청하고, 음식을 주워 먹어야 하는 이른바 ‘꽃제비’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그에게 가난만큼이나 힘든 것은 북한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생활이었다. 군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탈북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 당했다.
의무복무제인 북한에서 가족 문제로 인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험은 그를 짓눌 렀다. 북한에 남아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도 가족들 역시 자신과 같은 ‘반역자의 자식’이란 딱지가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탈출을 결심하게 됐다. 탈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번의 탈출 시도 과정에서 네 번의 감옥 생활도 경험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가 접한 북한 인권의 실상은 아직도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아픔이다. 길에서 사망한 노숙자, 아사한 아이들, 심지어는 총살 장면도 목격했다. 등을 맞댄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잠들었던 옆 사람이 아침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때도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북한을 탈출한 티모시는 이후에도 ‘머리 뒤에서 누군가가 계속 쫓아오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고향에서 가장 먼 땅으로 가고 싶었던 그가 지도를 폈을 때 눈에 들어온 나라 가 바로 영국.
티모시는 다시는 한반도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영국으로 떠났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기까지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언어의 장벽이었다. 처음 대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과제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왔지만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해 펑펑 울기도 했다. 단어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 우리말 뜻을 메모하며 학교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국 생활을 이어 나가던 어느 날 티모시는 한 탈북민의 인터뷰 영상을 접하게 된다. “영어를 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확성기를 들고 북한의 실상을 세상 사람 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한마디의 대답이 치과의사가 되려던 티모시의 발목을 잡았다. 이틀 밤을 몸부림치며 잠도 자지 못했다.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겠다는 각오로 북한과 가장 먼 곳으로 떠나온 티모시. 그는 결국 자신의 고향, 그곳에 살고 있는 2,500만 주민들을 대변 하기 위해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티모시는 이후 영국 의회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각 지역마다 3명씩 선출 하는 지방의원에 도전한 티모시는 2021년 처음 출마한 후 3년간 매해 보수당 후보로 출마 했다. 첫 출마한 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후보가 되기 전에도 다른 후보의 선거 유세를 돕고, 유권자들과 이야기도 나눴지만 막상 스스로 후보가 되고 보니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티모시가 도전한 지역은 영국에서도 노동당 지지가 강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런 탓에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유세를 위해 어느 집 문을 두드리자 한 남자가 뛰어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를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티모시를 세워놓고 20분가량 보수당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티모시는 하지만 그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보수당의 어엿한 후보로 인정받아, 당을 대표 해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만히 유권자의 불만을 들었고 이후 담담히 자신의 배경과 정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 했다.
놀랍게도 유권자는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사람이 보수당 후보로 나왔다며, 혹시나 당이 아닌 후보를 보고 투표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팸플릿을 놓고 가라고 이야기했다. 그 후 아쉽게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680여 표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마음을 바꾼 유권자가 7%에 달했다. 목소리는 커녕 존재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던 북한의 꽃제비 소년이 영국의 정치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운 순간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영수교 140주년을 맞아 열린 행사에 초청받았다. 그는 행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북한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찰스 3세 국왕과 탈출 과정과 영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한때 꽃제비였던 티모시 조 국장은, 현제 영국 대학에서 만난 결혼한 중국계 부인과 아들 딸을 둔 4인 가족의 가장이다.자신을 버리고 북한을 탈출한 부모도 용서했다. 이제 그의 꿈은, “북한에도 영국과 같은 의회가 생겨 북한 주민들도 이곳 친구들처럼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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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탈북민 타운 “리틀 평양”
영국의 도시 뉴몰든에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정착해 살고 있다.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탈북 민이 한 지역에 모여 사는 곳이다. 미국보다 많다. 복음기도신문에 따르면 영국 런던의 한인타운으로 불리는 뉴 몰든역 일대의 탈북민들은 일단 한국으로 빠져 나왔지만 다시 ‘탈남’해 영국으로 온 사람과, 탈북해 바로 이곳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다. 이들은 영국에서는 북이건, 남이건 상관없이 ‘코리안’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 ‘북한’을 의식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장점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에서는 2017년부터 탈북민 지원단체 ‘커넥트:북한(Connect:North Korea)’이 이들이 영국 생활에 정착할 수 있도록 영어교육과, 생활상담과 카운셀링 외에 탈북자의 경험과 현실을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다.
최근 일본 NHK방송이 영국 런던의 한인타운으로 불리는 뉴 몰든역 일대에 탈북민 500여 명이 정착하면서 ‘리틀 평양’이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탈북민들이 한국이나 미국을 등지고 굳이 영국을 택한 이유는 북한이 적으로 간주하는 미국 등으로 갈 경우, 두고 온 가족이 위험할 수 있다 는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최근 ‘해외 정착한 탈북자들’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통해 탈북민들이 난민 지위로 미국에 입국한 숫자는 감소했지만,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을 중심으로 가족이민, 취업이민 등의 형태로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 중국으로 탈북한 김씨는 2006년 미국의 탈북민 구출 단체인 ‘링크(Link)’의 도움으로 중국 심양 주재 미국 영사관을 거쳐 2007년 미국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 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조지 W.부시 전 대통령이 설립한 부시 센터 인권 증진팀에서 ‘조셉 김’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 씨의 사례처럼 미국은 2004년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인권법에 서명하면서부터 탈북민들이 난민 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됐다. 2006년 5월, 처음으로 6명의 탈북민이 난민 지위를 받고 미국에 입국한 후 2019년 8월 현재까지 218명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2017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미국에 입국한 탈북 난민 수는 급감했다. 이유는 첫째,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에 발표한 ‘입국금지 행정명령’ 대상국에 북한이 포함된 점, 둘째, 북·중 국경 경비의 강화로 탈북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난민으로서 미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다른 국가에서 온 모든 난민과 동등하게 기본적인 법률·재정적 지원을 받아 노동 허가증을 받고, 1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 미국 정부의 지원 은 중단된다. 미국 입국 탈북자들은 그 이후, 한인 사회나 자선단체, 교회 등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약 2000~3000명이던 탈북민이 지금은 100가정 정도로 줄면서 탈북민 사회가 크게 위축됐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10년 전부터 캐나다에 정착해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이민·난민국의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 한다.’는 결론에 따라 난민 지위 상실이 결정돼 탈북민들의 난민 신청 기각과 추방으로 캐나다를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