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여년전 척박한 땅에 ‘한국책방’ 열어 문화민족 알려
◼ ‘LA한인축제’ 창시하여 미국 사회에 한국 정체성 함양
◼ LA시의회 올림픽과 버몬트에 ‘김진형 박사 광장’ 명명
◼ LA코리아타운 ‘역사의 전설’…’고인의 큰 업적에 감사’
해마다 추석절 전후로 LA코리아타운에서 펄처지는 LA한인축제는 지난해로 50주년을 맞았는데 해외 한인사회의 최대 축제이다. 50여년전 척박한 한인사회에서 ‘우리는 자랑스런 한인 문화 민족이다’라는 기치로 축제를 창시한 장본인이며, 바로 ‘코리아타운’ 개척자의 대표적인 주인공인 올드 타이머 김진형 회장이 별세했다. 김진형 회장은 지난 주말 26일 새벽 7시 30분 향년 90세 일기로 소천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오는 8월 2일(금) 오후 3시 로즈힐 메모리얼 체플에서 엄수될 예정이다. 지난 주말에 들려온 김 회장 소천 소식에 타운의 원로들은 “충격을 받았다”며 애도를 보냈다. 오늘날 ‘코리아타운’(Koreatown)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이면에는 김진형 회장의 개척자 정신이 원동력이 됐다. 50여년전 ‘코리아타운’(Koreatown)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고, 한인들도 많이 없던 시절에 이민 생활의 고달픔으로 살아가던 때, 마켓이아니라 최초로 한국서점을 올림픽가에 열었다. 책을 사려던 한인들도 거의 없던 시절에 한국책방을 열었으며, 주위 미국인 상점에 “한글간판 달아주기” 캠페인을 벌여 미국사회에 “한인문화민족”임을 상기시킨 인물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공과가 있었지만 큰 의미에서 공이 훨씬 많았던 큰 인물이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한인 이민자들의 표상 김진형” “LA 코리아타운의 전설 ‘인간 김진형’으로 불린 김진형 회장은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K타운이 있다’라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생전에 그는 고향 땅 코리아를 떠나서 해외 최대 한인촌 LA코리아타운에서 추석잔치로 벌어지는 LA한인축제가 다가오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곤 했다고 생전에 선데이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술회했다. 그는 한국국제관광공사에서 근무하다가 1968년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그 당시는 국내나 미국 이민사회나 모두 가난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제2의 이민자로 LA에 정착한 그는 불과 4년 만에 지금의 코리아타운 한복판인 올림픽 거리에 ‘한글서적센터’를 차렸다. 그리고 ‘한글간판 달기운동’을 벌였다. 지금은 한류의 상징이고 번영의 코리아타운이지만 당시 LA일원에는 한인 동포가 고작 5천명 정도였다. 그리고 한인 상점도 별반 없었다.
고인이 있었기에 K타운이 존재
그 척박한 LA땅에 한글이란 우리 글을 심은 것이다. 우리 상점도 없는데 한글 간판 달기 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아메리카 땅에 미국인들이 개척정신으로 오늘의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든 원동력을 그는 꿰뚫어 본 것이다. 우리 한인도 할 수 있다라는 그의 집념을 불살랐다. 그 집념은 한국인 정체성을 살리자는 것이다. 1972년에 한글 간판달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코리아타운 번영회를 조직했다. 바로 코리아타운을 만들기 위한 활동 단체인 셈이다. 당시 이민 온 한인동포들은 2세 교육이 중요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2세 교육을 시키려면 1세대가 알아야 공부를 시키는 것인데, 영어도 못하고 노동만 하니까 2세 교육이 안됐다.
그래서 김진형은 1세대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세대들을 공부시키려고 하니 할 수 있는 방법이 책방이었다. 그래서 72년도에 현재 한인축제 코리안 퍼레이드를 하는 올림픽과 하버드 블루버드 중간지점에 <한국서적센터>라는 책방(서점)을 냈다. 당시 시사영어사 대표를 만나 돈이 없으니 후불로 내고 1세대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미국생활에서 바로 영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펴고 있던 그는 다시 1974년, 미국에 온지 6년만에 ‘코리안 퍼레이드’라는 엄청난 역사를 창조했다. 지금은 코리안 퍼레이드가 전세계에 알려진 “해외한인축제 1번지” 이지만 1970년대 초에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한다는 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편 것도 “차이나타운”과 “리틀 도쿄”를 가보고 그곳에 자기들 글자를 간판으로 한 것을 보고 크게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글을 세우고 우리의 문화를 전파해야만 진정한 코리아타운이 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코리안 퍼레이드’를 통해서 우리의 소리(Voice)를 내는 것이다. 그 한인의 울림소리를 문화를 통해서 미국 땅에 전파시키자는 것이다. 퍼레이드도 주위 다인종 다민족과 함께하는 퍼레이드를 생각했다. 1972년 첫 코리안 퍼레이드를 하려고 하니 반대하는 한인들이 무척 많았다.
특히 한인 언론계가 반대를 많이 했다. 당시 퍼레이드 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다. 퍼레이드를 하려면 보기 좋은 행진대가 지나가야 하는데, “행진대도 없는데 왜 굳이 하려고 하느냐”면서 반대 의견이었다. 반대한 사람들은 “퍼레이드를 해서 한국을 망신이나 시키지 말라”고 까지 했다. 당시 일본타운에서 실시한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일본 무예 ‘가라데’를 하는 사람들이 100명이 지나가는 데 모두 일본사람들이 아니고 흑인, 백인 등 미국인은 물론 다른 인종들도 끼어 있었다. 복장만 일본 가라데 도복이었다. 퍼레이드 참가자도 일본 여자 무용단과 북치는 일본 사람들이 있지만 그 다음에 전부 찬조 출연으로 멕시칸 행진, 백인, 흑인 등이 나왔다.
첫 코리안 퍼레이드의 감격
김진형은 이를 보고 우리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이기에 타인종들과 어우러져야만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사회라며 우리 퍼레이드를 반대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식으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강행을 했다. 그가 번 돈을 투자했기 때문 이다. 그래서 LA한인축제가 최초로 시작됐다. 처음 1974년 코리안 퍼레이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와 손으로 흔든 태극기를 2000개를 샀다. 우선 처음이라 많이 나와야 2000명 정도 관객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코리안 퍼레이드 를 하는 데 순식간에 태극기가 다 없어졌다. 경찰 집계로도 3만 명이 구경 나왔다고 했다.
당시 LA경찰국에서 ‘코리안 퍼레이드’ 신청 도로허가를 받을 때, 경찰이 ‘관중들이 몇 명 정도 참관할 것 같은가’라고 문의해 많이 부풀려 3,000명 정도 올 것이라고 했다. 첫 퍼레이드 날짜가 1974년 11월 3일 일요일인데,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이민자들이 갈 때가 없으니 생활 정보라도 얻으려고 일요일에 다 교회로 모인다. 미국사람들이 오전에 예배를 보면 오후에 한인들이 교회를 빌려 그곳에서 모였다. 예배가 끝나면 오후 3시쯤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오후 3시에 코리안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지금도 코리안 퍼레이드는 오후 3시에 시작한다. 당시 11월 3일 오후 2시가 됐는데도 올림픽 거리에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초초해 망신 당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오후 2시 40분정도 되니 모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구름 때처럼 모였다. 3만 여명이 모인 것이다.
대형 태극기를 5~6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나가니 한인들이 태극기를 보고 엉엉 울었다. 고향이 그리워서였다. 그가 한글간판달기 운동을 시작하는 도중 영세한 한인 8명을 모아, ‘코리아타운 번영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상인들의 활동단체인 상인번영회를 생각해 번영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앞에 코리아타운이라는 말을 붙였다. ‘코리아타운’(Korea Town)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생전의 그의 추억담을 소개한다. “당시 영어로만 돼 있는 미국 사회에 한글간판을 붙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안 되겠다고 생각해 미국 상점에 가한글간판을 달면 한국사람들이 찾아 온다고 설득해 올림픽가와 버몬트와 웨스턴가에 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글간판이 세워지니 한국 사람들이 찾게 돼 장사도 잘 됐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늘게 돼, 자연스레 한국 사람들을 모이게 되고 한인타운 형성에 발판을 마련했다.”
‘Koreatown-코리아타운’ 장본인
1981년에 미주한인이민사에 새로운 역사가 이뤄졌다. LA에 ‘코리아타운’이 법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미국은 지방자치제가 제도화 돼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역의 시의원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미국인들처럼 공개적으로 정치헌금을 내고 지역 시의원들과 교류를 텄다. 1972년 당시 현재의 LA 코리아타운지역구 10지구 시의원 데이비드 커닝햄(David Cunningham)에게 선거자금, 정치자금 등을 기부하면서 친해졌다. 1978년에 커닝햄 시의원에게 지금 한인타운에 한글간판도 많이 달렸는데, ‘코리아타운’이라는 행정경계를 설치해 달라고 신청했다. 3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 결과로 데이비드 커닝햄 시의원이 솔선해서 81년도에 LA시의회에서 ‘Koreatown-코리아타운’ 행정경계를 발의해 역사적인 통과를 하게 됐다.
지난 2013년 9월 18일 오전 10시 마침 제41회 LA한인축제가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 LA시장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코리아 타운’의 허브 지역인 올림픽 불러버드와 버몬트 애비뉴 교착점에 ‘김진형 박사 광장, Dr. Gene Kim Square’이라는 표지판을 세우는 현판식이 열렸다. 이 현판식은 김진형 회장의 40년 이민생활에서 코리아타운의 개척자로서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가 정열을 바쳐 가꾼 ‘코리아타운’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 김진형의 전설이 창조됐다. 김진형 명예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당시 한국국제관광공사에서 근무하다가 도미, LA근교 말리브의 페퍼다인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1년을 수료했다. 2006년 한국의 한서대학교에서 행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LA 코리아타운 번영회 초대 회장, 퍼레이드 초대 회장, 재미 대한체육회 후원회장, 남가주 호남향우회 명예고문, LA 경찰국 경찰허가 심사위원회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다. 지난달 29일 코리아타운가 등 스윗 호텔에서 ‘LA코리아타운과 한국의 날 축제-인간 김진형의 꿈’(저자: 민병용)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올드타이머들이 많이 찾아와 축하잔치를 벌였다. 제41회 LA한인축제가 개막된 지난 2014년 LA시의회(당시 의장 허브 웨슨)는 코리아타운 올림픽 경찰서 (당시 서장 티나 니에토)에서 ‘김진형 광장’ 명명식을 가진 직후 한인타운 중심부 올림픽-버몬트 교차로에서 표지판 공개행사를 진행했다.
LA시의회는 이미 지난해 2013년 김진형 박사에 대한 ‘Dr. Gene Kim Square’ 명명 조례안을 웨슨 시의장과 미치오파렐 시의원의 공동발제를 만장 일치로 의결한 바 있다. 타운에 제일 처음 세워진 세미리 박사 광장을 제외하고 LA 한인타운 내에 동포 이름을 딴 광장이 생긴 것은 김진형 회장이 처음은 아니지만 LA코리아타운 초석을 일군 산증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다른 사람보다 의미가 크다. LA한인타운에 밝은 한 올드타이머 K씨는 ‘김진형 박사 광장 명명식’이 다소 늦어진 속사정에 대해 “사실 김 회장의 공로가 워낙 많고 출중하여 명명식 추천 후보에 이름을 올린 후배들이 먼저 명명식을 갖도록 일부러 일정을 늦추어 양보했다”라는 미담을 전했다. 한인사회 원로로서 김진형 박사의 평소 마음 씀씀이라고 K씨는 전했다.
하나둘씩 사라지는 K타운의 영웅들
‘김진형 광장’이 탄생하는 자리에서 당시 허브 웨슨 LA 시의회 의장은 축사를 통해 “김진형 박사는 LA 한인사회의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LA시 발전에 공헌 위대한 시민”이라며 “특히 LA 한인축제를 창시하고 한인타운 지역이 ‘코리아타운’으로 지정되는데 앞장서 왔다”며 “매일 수만명의 시민들이 이 교차로를 지나며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진형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인사말로 화답했다. “1968년 미국의 꿈을 안고 LA에 정착한 저는 당시 차이나타운과 재팬타운을 돌아보고 우리 한인 동포들이 가장 먼저 해야할 급선무가 코리아 타운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섰습니다. 이런 저에게 힘을 실어주신 LA시 정부와 우리 동포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마음을 머리 숙여 전합니다. 오늘의 이 영광을 우리 한인 커뮤니티에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민족이 어울려 다양성을 살려나가는 미국사회 발전에 계속 기여하겠습니다. 웨슨 LA시의장과 미치 오파렐 제13지구 시의원이 조례안을 공동 발의해 시의회를 통과하도록 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제 故 김진형 회장은 LA코리아타운의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