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공방전2] LACMA 미술관 <한국 보물>전시 ‘위작’ 논란의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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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CMA “한국의 보물 기증자는 ‘명성황후’ 후손” 애매한 설명
◼ “스미스소니언 박물관도 인정한 수집품이다”진위여부 안밝혀
◼ 장박사 “한국전쟁 관련 미술품 애정 갖고 모은게 원동력”주장
◼ 삼성가 이부진 LACMA이사에 영입되면서 ‘위작’ 논란 불거져

미서부에서 최대 미술관으로 알려진 LA카운티 미술관(LACMA, LA County Museum of Art)은 최근 LACMA 이사인 체스터 장 박사(Dr. Chester Chang)가 기증한 35점의 ‘한국 보물들’이 미술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한국 미술품 기증이라고 지난 6월 6일 성명서에서 밝혔다. 장 박사는 앞으로 총 1,000여점의 소장 작품을 LACMA에 기증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LACMA는 체스터 장 박사가 기증한 35점의 ‘한국 보물들’을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특별전시했다. 그러자 서울에 중앙일보가 이 전시회가 시작된 2월에 ‘전시된 작품 중에 이중섭과 박수근 그림이 위작이다’는 보도를 시작으로 ‘위작’ 논란이 제기되자 LACMA 측은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고 ‘위작’ 이라는 제기에 ‘다시 한번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곧이어 LA-CMA는 성명서에서 현재 ‘위작’ 이라는 논란에 대하여 이를 일축하고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중앙일보와 달리 상반된 주장을 했다. 이로서 ‘위작’ 논란은 제2막으로 넘어섰다. 과연 체스터 장 박사가 기증한 작품들이 ‘위작인지, 실작인지’ 논란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체스터 장박사의 실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별취재반>

이 같은 ‘위작’ 논란은 현재 LACMA에서 2006년부터 한국계로는 체스터 장 박사가 유일한 이사(Board Member)로 활동했는데, 지난해 3월 LACMA의 새로운 이사로 고 이건희 삼성 총수와 홍라희 전 삼성리움미술관장 부부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선임되면서 불거졌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후손 집안인 체스터 장 박사와 삼성가와 삼성리움 미술관의 후손 이부진 사장이 LACMA를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흐름에서 불거졌다는 소리가 문화 예술계에서 나오고 있다.

LACMA가 사실관계 밝혀야

‘위작’ 논란이 불거진 LACMA ‘한국의 보물들’ 전시회는 체스터 장 박사(84, Chester Clarence Chang, 장정기)가 지난 2021년 LACMA에 기증한 한국 고미술과 근대미술 컬렉션 100여점 가운데 고서화와 근대미술품, 수석 등 35점을 추려 선보이는 전시회였다.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들 외에 한국 근대회화의 선구적 작가인 김관호 (1890~1959)가 50년대 북한에서 그렸다는 초상화와 풍경화, 월북 화가 이쾌대(1913~1965) 의 월북 이후 풍경화, 조선 후기 불화와 청화백자 등이 선보였다. LACMA는 전시 공간에서 체스터 장 박사를 “미술관의 전 이사회 구성원이며 19세기 말 조선 고종임금의 왕비 ‘명성황후’의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기증자인 체스터 장 박사는 2021년 기증 당시 박수근· 이중섭 그림을 포함한 한국 근대미술품들의 출처에 대해 1960~1970년대 초 한국에서 주한미군 등을 통해 구입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LACMA에 ‘한국 보물들’을 기증한 체스터 장 박사가 경기고등학교 재학중인 1950년대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어떻게 그 엄청난 보물들을 수집했을까에 궁금증과 의문을 지니고 있다.

LACMA 측은 체스터 장 박사가 ‘명성황후’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며. 그는 ‘명성황후’의 동생 뻘이며 민씨 세도가의 좌장 민영휘씨의 외 증손자로 그동안 수많은 보물과 유물들을 한국의 박물관은 물론 LACMA를 포함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하와이대 한국관에 기증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체스터 장 박사의 재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한 작품당 수십억 원이 넘는 작품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의문을 품는다. 파이럿 교관출신이 장 박사가 그런 엄청난 한국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물론 구한말 대감집이니까 집안에서 물려받은 작품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장박사 집안을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과연 체스터 장박사는 누구이며 그의 집안 내력과 족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역사에서 ‘명성황후’는 1873년 고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친정을 시작한 후 자신의 친정 식구들과 함께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 일본 제국주의에 사주를 받은 사무라이들에게 무참하게 암살 당한 비운의 왕비로, 뮤지컬에도 소개된 황후이다. 이러한 그녀의 친족을 “민씨 척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흥 민씨 세도가 중에서 민영휘가 있는데,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이다. 이 같은 민씨 세도가의 좌장격인 민영휘의 손자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민병도(1916-2006)인데, 바로 체스터 장 박사의 어머니 민병윤씨의 친오빠이다. 다시 말하면 체스터 장 박사의 어머니는 민씨 세도가의 대표인 민영휘의 손녀이다. 한편 체스터 장 박사의 외삼촌이 되는 민병도는 할아버지 민영휘가 철저한 친일행위자였지만, 반면 민병도는 철저한 애국자로 일생을 보냈다. 민병도는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나온 후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했으며 친부 민대식이 창설한 동일은행 취체역을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3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 할 때 발기인을 맡는 등 젊은 나이에도 조선 실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병도는 한평생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문화예술 지원활동을 펼쳤으며, 광복 후 거의 혼란기에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 몽양 여운형, 민세 안재홍, 손기정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사인 ‘을유문화사’를 창립하였다. 한글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정의에 대한 개념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본격적인 문화활동을 시작한 민병도는 동시에 도서출판과 문화진흥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민병도는 일제 치하에서 한글을 익히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한 글씨 책과 어린이 그림책, 최초의 어린이 주간지, 최초의 어린이 문학지등을 펴내며 어린이 문화보급에 특히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조선아동문화협회 병설 직매점 문장각 개점, 박물관총서 간행, 학술지 월간학풍 창간, 국제연합(UN)출판부 한국총대리점 업무 개시, 조선말큰사전 완간, 플루타크 영웅전 간행 등 미군정청 시기로부터 나라의 기틀을 삼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체스터 장 박사 ‘명성황후’ 직계 후손

민병도는 해방 직후 뜻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재계 인사들의 뜻을 모아 1945년 국내 최초의 교향 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현제명, 계정식, 임원식 등과 창설하였다. 그후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 취임하여 증권파동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도의 갑작스러운 2차 통화개혁 조치에 대한 금융 산업을 수습하였다. 이후 정부의 무리한 어업차관 도입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시도에 대해여 반발하여 사직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은행 독립 정신의 표본” 이라는 금융계의 평가가 있다.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 퇴임 후에는 1965년 남이섬을 인수하여 “푸른 동산 맑은 강은 우리의 재산, 성심껏 다듬어서 후손에게 물려 주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세워 남이섬에 수천 그루 나무 심기와 문화예술 지원에 수십 년간 쏟았다.

1978년에는 미술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시민단체인 <현대미술관회>를 김수근, 설원식과 함께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민간 문화예술기반 확대에 힘썼다. 이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 회장과 학교법인 휘문의숙 이사장을 역임한 민병도는, 2006년 타계할 때까지 남이섬의 큰 어른으로서 항상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를 손수 심고 가꾸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어린이들이 누릴 문화적 씨앗을 음악, 미술, 문학, 교육, 수목원예 분야에서 평생 뿌리고 가꾸어 온 공로를 인정해 1975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조부 민영휘와  친부 민대식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반면 민병도 본인은 수록에서 제외되었다. 민병도를 외삼촌으로 둔 체스터 장 박사의 가정은 자연스럽게 많은 문화 예술품을 지니게 된다.

특히 ‘명성황후’와도 민씨 종친 집안으로 자연스럽게 궁중 보물을 지니게 되었는데,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이후 왕실을 정리하면서 많은 보물들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가풍에 체스터 장 박사는 어머니가 소장한 보물과 함께 고미술품 수집에 자연 관심을 두었다. 체스터 장 박사의 활동의 한 예를 소개한다. 지난 2014년 7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스미스소니안 박물관에서 발행한 책 ‘한국전쟁 시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품들, 체스터와 완다 장 컬렉션’(Undiscovered Art from the Korean War, Exploration in the Collection of Chester and Wanda Chang)은 1950년부터 1953년 전란의 시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예술품 60점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중섭, 박수근, 김관호, 변관식 등 유명 작가의 미술작품들도 있지만 무명의 기능공들이 제작한 철제, 은제, 목각인형, 도예, 자수 등도 다수 포함돼 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의 후원으로 발간된 이 작품집은 2014년 11월 13일 워싱턴 DC에서 미 국방부 산하국방대학원이 주최하는 미국 영웅상 시상식 갈라(American Patriot Award Gala)를 위해 제작된 책이다. 국방대학원이 매년 11월 수여하는 영웅상은 그 해 미국의 영웅 한 명을 선정하는 영예로운 상으로, 역대 수상자들이 조지 W. 부시, 힐러리 클린턴, 로버트 도울, 로버트 게이츠, 헨리키신저, 존 매케인, 콜린 파월 등 대단한 인물들이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2011년에도 체스터 장 박사가 소장한 한국 도자기에 대한 책 ‘정체성의 상징, 체스터&완다 장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Symbols of Identity, Korean CeramicsFrom the Collection of Chester and Wanda Chang)을 펴낸 바 있으며, 앞으로도 장 박사가 소장한 1,000여점의 한국 유물 관련 책을 계속 출간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민씨 집안 궁중 보물을 지닌 이유

그는 “전쟁 당시 한국에서는 누구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으며 아무 물자도 없던 시절이라 화가들은 카드보드나 접시에 그림을 그려 팔았다고 전했다. 이어 “그때 피난지 부산에 일본인들이 두고 간 가마가 있었는데 거기서 굽는 벽걸이 접시 같은 기념품에 배고픈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주고 얼마간 돈을 벌었습니다. 이 작품들이 PX로 들어가 외국 군인들에게 팔렸고, 많은 미군들이 이것을 미국으로 가져와 집안에 장식했으니 이것이 한국이 처음 벌어들인 외화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문화가 최초로 해외에 전파된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책에 소개된 예술품들은 당시 주한 미군들에게 팔렸거나 고위 장성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훗날 체스터 장 박사가 수집한 것들이다.

체스터 장 박사가 그런 물건을 알아보고 그 중요성을 간파할 수 있었던 안목은 고교시절 박상옥 미술선생 때문에 갖게 된 것이다. 체스터 장 박사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다가(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첫 영사관 개설을 위해 LA총영사관에 파견된 장지환 영사가 부친이다) 1953~57년 잠시 한국에 들어가 산 적이 있는데, 이때 부산 피난지의 경기고교 2학년 재학 시절에 담임이며 화가였던 박상옥 선생으로부터 한국 미술과 예술에 관해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군부대 PX와 한국 경질 도자기 회사들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리며 자신의 예술혼을 지켜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하는 장 박사는 그러한 경험들이 훗날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미술품은 아주 작은 것이 라도 애정을 갖고 모으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전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쟁의 포화 속에 살았던 화가들이 아무도 전쟁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지적한 장 박사는 “문제는 이런 미술품이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체스터 장 박사 ‘위작’ 논란 충격

체스터 장 박사는 이 시기의 한국 예술을 처음으로 조명한 이 책의 공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내 아시아 문화역사프로그램의 연구원들인 트레버 메리온(Trevor Merrion), 재스퍼 바흐-퀘스바스 (Jasper Waugh-Quasebarth), 로버트 폰시온(Robert Pontsioen), 그리고 총 책임자인 폴 마이클 테일러(PaulMichael Taylor) 디렉터에게 돌렸다. “앞으로도 한국과 미국 두나라의 성공적인 협력으로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는 전쟁이 되기를, 또 거기서 피어난 예술이 ‘잊혀진 예술’ (Forgotten Art)이 아니라 한국 미술사에 한 챕터를 차지하는 기억되는 예술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체스터 장 박사는 ‘원래 물려받은 집안의 유물이 많았지만 어려서부터 수집이 취미였던 지금까지도 수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수집하고 나누는 것이 나의 삶”이라는 그는 그동안 기증한 것 만도 수백 점이 넘지만 앞으로도 더 기증하고, 더 수집하고, 어쩌면 작은 박물관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할 생각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베이커스 필드에 거주하는 체스터 장 박사에게 이번 ‘위작’ 논란은 청천벽력의 충격이었다. 현재 부인 완다 장(부친 김양욱 기장은 대한항공의 조종사로 KAL최초로 100만 마일을 비행한 전설의 조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이 중병으로 가정적으로도 걱정인데 이중삼중의 고통이 그를 압박하고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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