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드림과 공공서비스 헌신으로 봉사
◼ 부모님으로부터 터득한 유산을 국가에 헌신
◼ 정치인의 꿈은 위대한 것이지만 ‘험난의 길’
◼ 3선의 하원의원과 상원 진출로 백악관 도전
“미국의 유권자들은 정치 지망생 개인의 단순한 정치적 야심만을 가진 직업 정치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목표와 지향점을 가지고 그것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입후보자가 왜 정치를 하기를 원하는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와 의지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의 핵심 목표와 배경은 아메리칸 드림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꿈은 아주 위대한 것입니다. 다만 모두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스토리를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 합니다.” <앤디 김 미연방상원 의원 당선자>
미국 역사상 최연소(42세) 대통령인 존 F. 케네디(John F. Kenedy)는 “뉴 프런티어” 기수였다. “뉴 프런티어”는 케네디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주장한 ‘새로운 개척자’ 정신을 말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는 미국 평화봉사단 이었다. 1961년 3월 행정적 명령에 의하여 착수되었고, 후에 의회에 의하여 공인되었다. 평화봉사단은 당시 한국 등 개발도상국들에 수천명의 미국인들을 보내어 그들의 생활 기준들을 늘였다.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때 비록 백인이었으나. 최초의 로마 카톨릭 신자였고 백인 사회에서 소수인종 취급을 당하던 아일랜드계였다. 그러나 그는 “뉴 프런티어”를 외치며 제35대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취임사에서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연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특히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케네디 이후 2008년에 최초의 흑인계 버락 오마바가 4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의 젊은세대들은 ‘우리 한인도 미국 대통령이 되는 꿈이 있다’고 외쳤다. 흑인계 오마바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여성 대통령 시대와 흑인 이외 소수인종 출신의 대통령도 꿈꾸게 됐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과 2024년 카말라 해리스의 여성 대통령 꿈은 일단 무산됐다.
최초 한인 연방상원 탄생 의미
2024년 미주한인이민 140여년 역사에서 최초의 한인 미연방상원이 탄생했다. 뉴저지주 출신 최초의 한인 3선의 연방하원인 앤디 김(42, Andrew Kim, 1982년 7월 12일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2024년 미대선 상원선거에서 당당하게 승리했다. 그는 2018년 당시 36세의 나이로 한인 최연소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으며, 3선의 하원의원으로 상원에 도전하여 42세에 나이에 연방상원 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자신의 정치 신념이 “아메리칸 드림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헌신”이라고 했다. 이제 한인사회에서는 2028년 미대선에 새로운 미국을 변화시키는 ‘뉴 아메리카’의 꿈을 심어줄 지도자로 앤디 김 상원의원을 기대하고 있다. 앤디 김 의원에게는 의미있는 일화가 있다.
트럼프 전대통령이 2020년 바이든 대통령과 선거 전에서 패배하자 “내 표가 도둑 맞았다.”며 지지자들을 부추겨 결국 2021년 1월 7일밤 폭도로 변한 지지 자들이 의사당으로 몰려가 마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의사당 폭거를 벌였다. 폭도들이 휩쓸고 지나 가 난장판이 된 연방 의사당을 한 젊은 의원이 묵묵히 청소하는 장면이 AP통신으로 공개돼 훈훈한 화제가 되었다. AP통신은 다른 의원의 말을 인용해, “그는 분명히 누구에게 보이 려고 그러는 게 아니었다”며 “긴 밤 속에 가장 가슴이 저미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 젊은 의원이 바로 앤디 김 의원이었다. 트럼프 지지 폭도들이 할퀸 의사당을 김 의원은 묵묵히 깨끗하게 청소했던 것이다. 코로나 시절인2021년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이후 의사당에 남은 쓰레기들을 치우는 것을 도왔던 앤디 김 의원은 당시 입었던 정장을 스미소니언 박물관측의 요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앤디 김 의원은 불과 36세에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돠어 한인으로서 최연소 3선 고지까지 오른 후 올해 연방상원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미국민 ‘뉴 아메리카’ 지도자 염원
앤디 김 의원의 2018년 첫 번 하원의원 도전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드라매틱한 선거전으로 유명 했다. 델라웨어강부터 대서양 해변까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인 뉴저지의 제3 선거구에 민주당 소속으로 처음 출마한 그는 중도파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백인이 85프로정도로 절대 대다수인 이 지역에서 그는 그 지역이 자신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뜨내기 후보로 표현하는 광고를 내보내는 현직 하원의원이었던 강력한 경쟁자를 상대해야 했다. 상대측은 얼음 위에 놓인 생선 사진에 그의 이름을 ‘찹수이’ 폰트(중국계 식당 등에서 사용 하는 글씨체)로 써서 얹은 메일을 지역 주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경쟁후보는 보험회사 이사 출신인 백만장자 톰 맥아더 의원이었는데 뉴저지 북부에서 이주했고, 2014년에 미식축구팀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 출신인 존 러년이 포기한 하원 의석을 차지했던 현직 의원이었다.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인 맥아더의원은 2017년에 상원에서 아슬아슬하게 좌절 된 오바마케어 폐지를 위한 공화당 하원의원들의 움직임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뉴저지 공화 당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트럼프의 감세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뉴저지의 높은 부동산세가 주택 소유자들에게 타격을 주기 때문이었다. 투표 마감 후 개표시 부재자 및 임시투표 7000여표에 대한 개표가 지연되면서 선거 당일에 당선 자가 바로 결정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부재자 개표가 계속되던 가운데 상대 후보를 앞서기 시작하자 그는 곧바로 승리를 선언했다. 상대후보는 은퇴자 커뮤니티들이 있는 공화당 성향 오션 카운티에서 주로 표를 얻으며 3만 100표 가량을 먼저 앞서가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필라델피아 교외 중 가장 민주당 성향이 강한 벌링턴 카운티에서 3만 3600표를 더 얻었다. 선거 당일인 2018년 11월 6일 개표에서 맥아더 후보에게 뒤지고 있다가, 선거 후 일주일이 넘은11월 14일 오후에 이르러서야 선거 결과가 확정되는 접전이었다. 앤디 김의원의 최종 득표율은 49.9%, 경쟁 자였던 톰 맥아더 현직 의원 후보는 48.8%였고, 김 의원이 1.1%포인트 차 로 불굴의 역전 승리를 이끌어냈다. 특히, 그가 출마한 선거구는 유권자 65만 명 중 백인이 85%, 한인은 300여 명에 불과한 곳이어서 그의 승리는 더욱 놀라운 감격을 안겨줬다. 당시 김 의원은 어린이부터 노인들에 이르는 다양한 수백명의 많은 봉사자 선거 운동원들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비 옷들을 입고 가가호호 지역구를 방문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백인85% 지역’에서 역전의 승리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에게 있어 미 연방의원이 된다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를 의미 한다. 그 꿈을 처음 실현한 사람이 김창준 의원이다. 김창준 의원은 미국에서 태어난 동포 2세도 아니고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이민 온 1.5세대도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군대 를 다녀온 후 단돈 5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를 닦으며 USC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했던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한인정치협회를 구성하여 정치력 신장의 모델이 되었다. 1990년에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에서 시의원과 시장을 역임하고, 1992년에 캘리포니아 주 제41지구에 출마해 꿈에 그리던 연방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3선을 기록했다. 김창준 의원의 역사적 성공담은 수많은 한인 청년들과 미주 한인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2018년 앤디 김 하원의원 당선은 김창준 의원 이후 20년 만에 한인들은 감격스럽게 한인 연방의원 의 탄생을 보았던 것이다.
앤디 김의원은 미 의정계에 입성하기전,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트루먼 장학생’으로 발탁되었고 또한, 영국의 특별장학생인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 돼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 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고, 2009년 9월부터 미 국무부에서 이라크 전문가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2011년에는 미 중앙정보 국(CIA) 국장의 전략참모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프간에서 주둔해 근무했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부터 2015년 초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중동 담당 보좌관을 역임 했다. 이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의 전략 참모로도 일했다. 특히 2013년에는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전문가로서 오바마 행정부의 IS에 대한 폭격과 인도주의 지원을 담당하는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하며 미 국방 최전선에서 전략 전문가로 폭넓고 큰 활동을 했다.
하원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2018년 8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앤디 김의 선거 캠프를 직접 방문해 공식 지지를 선언할 만큼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앤디 김 상원의원은 이민 2세로 현재 중국계 부인과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두고 있다. 부모님 두분 다 이민 1세대이다. 아버지 김정한 박사, 어머니 장재순 여사는 함께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특히 아버지 김정한 박사는 고아 출신으로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MIT와 하버드 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유전 공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어머니 장재순 여사는 간호사 출신으로 평생 환자들을 가족처럼 돌보는데 헌신했다. 누나 모니카 김은 예일 대학교를 졸업 후 뉴욕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오바마의 신임을 받은 젊은 지도자
앤디 김 의원은 부모님을 자신이 가장 담고 싶은 인물로 공경하고 있다. 그의 부모는 항상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근면한 모습을 늘 보여주었고, 삶의 여러 면에서 모범적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부모는 그가 자라는 동안 사회에 대한 공공 서비스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암과 알츠하이머 퇴치를 위해 연구 하는 과학자와 간호사로 일하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는 두 분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런 삶이 그를 나라와 커뮤니티를 위해 일을 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정치에 투신한 동기도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한인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한인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국 인이라는 일체감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 공동체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당파 이 전에 사람은 다 서로 같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노력과 인내를 중히 여기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한인들의 그런 고매한 가치를 늘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다. 이후 옥스포드 대학에서 로즈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아내 Kammy를 만나 가족을 이루 었으며 그가 받은 교육과 노력으로 커리어를 쌓게 되자 그 간의 과정들을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한 사회환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 전략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백악관 에서 반테러 정책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가르찬 유산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공공부문에서 일하고 싶었고 그것이 그가 정치에 진출한 이유가 되었다.
특히 그는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또 그를 키워준 사회 공동체와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게 해준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하원의원 선거 출마 당시의 다짐을 늘 잊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 그는 의회에서 일하는 코리안 어메리칸으로서 커뮤니티에 직접 참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한다. 앤디 김 의원은 한국계 이민자의 아들이 연방의회 선거에 뛰어들어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 자체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더 높이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 특히, 부모님은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와 노력의 중요성을 늘 강조 하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한인 2세 및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권하고, 한인을 대변할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고,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저를 표본으로 삼아, 차세대의 코리언 어메리칸들이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년후 그가 ‘뉴 아메리카’를 외치며 앞장 서겠다는 의미로도 들렸다. <성진 취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