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미일간지 한국기자로 최초 영자신문 창간
◼ 미언론 뮤지엄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안 언론인
◼ “아시안 아메리칸 언론계 대부”로 존경의 기자
◼ SF사형수 이철수…결정적 무죄 쾌거 이끌어내
2025년 설날을 맞아 미국 언론계와 사회에서 “아시안 아메리칸 언론의 대부”(Godfather of Asian American Journalism)로 존경받고 있는 이경원(미국명 Kyung Won Lee의 앞 글자만 따서K .W. Lee로 부른다 )대기자를 찾았다. 오는 6월 1일 그의 생일이면 98세가 되는 이경원 대기자를, 그가 은퇴 생활을 하는 북가주 새크라멘토(Sacramento)의 시니어 요양원 빌리지를 방문했다. 2층에 자리 잡은 그의 룸에 들어서자 거실 테이블과 책장으로 연결된 벽면은 온통 “이철수”(Chol Soo Lee) 포스터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취재기자는 속으로 “아…대기자님이 아직 은퇴를 하시지 안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일선 기자처럼 살아 가고 있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이경원 대기자는 취재기자가 “우리가 보내 주는 선데이저널 신문을 매주 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어쩌면 심층기사들이 그처럼 많은지 놀랬다.”면서 “사건과 관련한 실명 기사를 게재한 고발기사들이 철저한 기자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격려해주었다. 그는 새삼 자신이 1979년 LA에서 발행한 최초의 영자지 ‘코리아타운’(KoreaTown Weekly)을 상기시키면서 영어로 통하는 미국사회에서 영자 신문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소리 (Voice)가 미국사회에 울리지 않는다는 환경에서 과감히 창간했다면서, “당시 4년 동안 3명의 삼총사가 영자지를 만들었는데, 신문을 새크라 멘토에서 인쇄하여 핀토라는 차에 싣고 400마일이나 되는 LA로 날라와 전국에 뿌렸다”고 옛일을 말했다. 매주 LA-새크라 멘토 왕복 800마일을 4년간을 달렸다고 했다.
이처럼 영자지 ‘코리아타운’(KoreaTown Weekly)의 창간은 이경원 대기자의 ‘내일을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 대모험이었다. 신문의 목표는 뚜렸했다. 당시 한인타운에서 영자지가 창간되자 일본과 중국 커뮤니티를 포함해 타소수인종계에서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신문은 아무나 발행할 수 없다. ‘코리아타운’(KoreaTown Weekly)는 단 3명의 베테랑 기자 삼총사가 만든 당시 미국에서는 둘도 없는 신문이었다. 발행인 이경원 대기자는 이미 미국 서부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인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서 탐사보도 폭로기자로 25년간 유명세를 떨친 기자였다. 여기에 유니언지의 경제부장 출신인 스티브 차네카(Steve Chanecka) 그리고 랜디 하기하라(Randy Hagihara, 나중 LA 타임스 에디터로 활약. 2023년 작고) 등 3명이 한 팀으로 최소의 인건비 최대 효용을 내는 최고의 자유 언론인 셈이다. 특히 랜디 하기하라 기자는 취재 사진에 탁월했으며 나중 LA타임스에 영입되어 기자들을 훈련시키는데 열성을 보였는데 적어도 2천 여 명의 기자들을 훈련시키고 LA타임스 기자로 채용했다. ‘코리아타운’ 영자신문의 모토는 “The English language Voice of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한인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내는 영자신문)이었다.
‘K타운’ 영자지는 소설 같은 역사”
‘코리아타운’ 영자지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미국에서 이제 우리 자신들을 서로 발견할 때입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신문 발행의 의미를 담았다. <피, 땀, 눈물,그리고 자부심. 우리는 이민사회에서 많은 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나오는 질경이처럼 억센 민족입니다. 단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영어로 통하는 사회에서 영자 신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아메리카라는 용광로 속에서 할 말을 못하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는 바보료, 벙어리를 면치 못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삐걱대야 기름을 쳐줍니다.>라면서 궁극적 목표로 <우리 한인들은 개인적으로는 똑똑할지 모르나 집합체로서는 아메리카라는 용광로 속에서는 조각 조각 부서질 뿐입니다. 따라서 우라 코리안 아메리칸의 존재를 미주류사회에 각인 시키기 위해 이 신문을 창간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창간 취지에서 이 영자지를 통해서 고요한 나라 한국의 훌륭한 전통 유산을 미국 사회에 알리고, 미국주류사회에 우리 한인사회의 책임과 공헌을 정체성과 함께 인식 시키고, 고국과의 교류도 강화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이경원 대기자가 ‘코리아타운’ 영자지 역사에 대하여 회고담을 끝없이 취재 기자에게 설명하는 와중에, 신문 발행의 삼총사 중의 한 사람인 스티브 차네카 씨가 이경원 대기자를 만나러 왔다.
이경원 대기자는 “우리가 영자지 만든 이야기는 사실보다는 소설처럼 들릴 정도로 많은 사연이 담겨있다”라며 “ 4년 동안 우리 3사람은 한인사회를 위한 영자신문 창간 원조(“3 are the Founding fathers of Korean journalism in America”)”라고 말했다. 차네카씨는 LA와 새크라멘토를 오가며 신문을 제작 당시의 한 토막의 들려주었다. 하루는 새크라멘토에서 인쇄된 신문을 핀토차에 싣고 LA로 달려오다가 LA에 가까운 곳 언덕을 내려오다가 과속으로 고속도로 경찰(HP)에 정지명령을 받았다. 경찰은 운전자의 면허증을 검사한 후 차안을 살펴 보다가 신문 뭉치들을 보고는 이상히 여겨 차네카씨는 ‘코리아 타운’이라는 영자 신문을 매주 LA에서 취재 편집을 하고 인쇄를 새크라멘토에서 제작을 하여 지금LA로 배달 가는 중이라고 설명하자, “수고 많다”면서 티켓을 발부 않고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며 추억담이라고 들려주었다.
‘베테랑 3인이 만든 영자신문’
이경원 대기자는 1950년 3월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친척 조카들 앞에서 평소 그에게 시심을 불어넣어준 강릉 매부가 되는 친척 시인 김영랑의 시를 달달 외우다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 즉시 김영랑 시인의 시 전편을 번역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 시절, 일제에 결사 항거한 부친(독립유공자, 이형순)의 아들 답게 미국 신문에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칼럼을 연재하면서 그의 귀국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이경원 대기자는 1973년 ‘CNS’ Copley News Service) 특파원으로 잠시 한국을 방문했고 회갑이 지나서야 정부 초청으로 귀국, 한동안은 서울의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Korea Herald)’의 편집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기자가 갖춰야 할 윤리 도덕과 취재 방법 등을 중심 으로 한 철저한 교육’을 실시해서 후배들의 존경을 모았지만 이미 그의 한국어 실력은 안타깝게도 한국인의 마음을 노래한 깊은 서정 세계의 ‘영랑의 시’를 번역하기엔 녹이 슨 후였다.
미국에서 동양인(Asian)으로는 최초의 미국 주류언론의 저명한 탐사보도 기자(Investigative Reporter), 한국인 이경원 대기자는 미국 언론인들이 “20세기 중 가장 탁월한 기자 중 한 분”으로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Washington, DC)’ 교외에 있는 ‘알링턴 언론 기념관’(Newseum’s Journalism History Gallery in Arlington, VA.)에는 전 미국의 5만여 명의 기자들 중 지난 20세기에 가장 훌륭했던 기자 5백 명의 부스(Booth)속에 유일한 동양계로 1997년에 헌액되었는데, 흉상에는 “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선구적인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인 이경원 대기자는 50년간 주류 일간지와 아시아계 주간지의 기자, 편집자,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최초의 미주 한인 영문 주간지인 코리아타운 위클리 (Koreatown weekly 1979-84)를 창간하고 편집했으며, LA에 본사를 둔 미주 한국일보 코리아타임스(Korea Times) 주간 영문판(1990-92년)을 편집장을 맡았다.
아시안 언론계 기자들 사이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저널리즘의 학장”(Dean of Asian American Journalism)으로 평가 받는 이경원 대기자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갱단 살인 사건에 대한 탐사 시리즈를 통해 사형수 이철수의 재심과 최종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새크라멘토 유니온(Sacramento Union) 기자로 가장 잘 알려져 왔다. 이 사건은 나중에 할리우드 영화 ‘트루 빌리버’(True Beliver)에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백인들 시각에서 사실을 왜곡하야 아시아TV 기자단이 공동으로 <정의는 묻노라> (A Question of Justice)라는 다큐멘타리를 제작해 균형된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이철수씨 구명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리 이철수’(Free Cholsoo Lee·이철수에게 자유를)가 지난 2023년 미 방송계 최고 권위 상인 에미상을 받으면서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한인 줄리 하 감독과 유진 이 감독이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로, 2022년 미국 최대 독립영화제 인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으며 지난 2023년 미 방송사 PBS에서 방영됐다.
인권운동 상징 ‘이철수 사건’ 쾌거
이경원 대기자가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미국 역사상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부정 폭로기자요, 미국 사건기자의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기자이기 때문이다. 1973년, 이경원 대기자는 명확한 증거도 없이, 동양계 부랑아인데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마땅한 변론인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갈 <사형수 번호 21번>인 18세의 한인 소년 이철수의 억울함을, 지금은 없어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중의 하나인 ‘새크라멘토 유니온’지(Sacramento Union, 1851~1996)에 시리즈 기사로 연재함으로써 사형집행전에 석방하도록 만든 엄청난 대기자다.
당시 전 미국의 TV와 신문은 이경원 대기자의 이 쾌거를 일제히 보도함으로써 미국인들의 머리에 ‘한국 출신 K. W. Lee(이경원) 기자’를 크게 각인시켰다. 지금 Google에 들어가 “K.W. Lee”만 두드려도 엄청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 캘리포니아 주 의원들과 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은퇴연금법’을 주물럭 거려 납세자들도 모르게 은근슬쩍 은퇴연금을 올려놓은 사건을 “황금빛 지붕(The Golden Dome=캘리포니아 주 정부 청사의 별명, 청사의 지붕 색깔이 금빛)”이라는 제목으로 몇 달에 걸쳐 연재해서 이 기사는 수많은 라디오 토크쇼(Radio Talk Show)의 주제가 되었고 부패한 공무원과 권력자들을 사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