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년 삶은 모친 소니아 석 여사의 애국유산 승계
◼ “미국에서 산 날이 한국보다 길어도 마음은 한국”
◼ 장 박사 인생 좌우명은 ‘배고픈 사람 내가 돕는다’
◼ 어머니 故 소니아 석여사와 월남…휴전직 후 도미
오늘의 LA한인사회를 만들며 이끌어 왔던 1세대들이 한 두분씩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제는 살아있는 1세대의 큰 그림자들이 정말로 몇분 살아있지 않다. 그 마저도 병마에 시달리면서 한인사회에서 멀어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불과 지난 달에 모임에서 만나 LA한인사회의 앞날을 걱정하시던 분들이 별안간 고인이 돼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오늘의 LA한인사회가 자리잡기까지 중추적인 역할과 혼신의 노력으로 활동하신 치과의사 장기열 박사가 지난 5일 향년 88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1971년에 최초의 한인치과 병원을 개업하여 46년간 진료하면서 한인회, 한인치과협회장, 한인상공회의소회장 등 다양한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지난 2017년에 은퇴했다. 故 장기열 박사의 모친은 LA한인사회의 “애국 할머니”로 불렸던 어머니 소니아 석 여사이며, 고인은 모친 석여사의 애국유산을 이어가는 모전자전의 삶이었다. 소니아 석 여사는 지금의 LA한인회관을 비롯해 현 LA총영사관 관저 매입을 박정희 대통령에 건의한 끝에 이뤄낸 산물이었다. ‘소니아석 여사-장기열 박사’ 두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오늘 날 LA한인사회 건립의 선봉장이자 개척자 였음은 알리기 위해 두 분의 역사와 발자취 그리고 흔적들을 짚어 보았다. 故 장기열 박사의 장례는 오는 2월 25일 오전 9시 30분 헐리우드 포레스트 런에서 집전된다. <성진 취재부 기자>
지난해 12월 4일 용수산 식당에서 한인이민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 주최로 ‘코리아타운의 날(12월 8일)’ 축하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날 LA올드타이머 4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 장기열 박사도 참석해 동료 올드타이머들과 반갑게 정담을 나누었다. 그 자리가 장 박사에게는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타운 행사 참석이 되었다. 장 박사는 1971년 LA에서 한인치과 병원을 최초로 개업한 이후 바로 커뮤니티 봉사 활동에도 들어간 보기 드문 전문 의료인이다. 1972년 남가주한인회(현 LA한인회) 이사 활동을 시작으로 1974년 현 LA 한인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에 이사로 LA한인타운 경제 발전을 위해 뛰었다. 1974~1975년 한인치과의사협회장, 1979~1981년 까지 남가주한인상공 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한인상공회의소의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단체장을 하면서 단체 발전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많이 털어낸 ‘리더’로 상공회의소 이사들에게 지금까지 회자되기도 했다. 함께 일하는 임원들이나 관련있는 타단체 관계자들에게 ‘밥 사는 일’에 선두였으며 누구보다도 애국활동 선봉을 자임하신 큰 어른이시지만 오만하지 않고 늘 겸손하고 철저하고 엄격하게 자신과 LA한인사회를 사랑했던 분이다. 장 박사의 이 같은 삶에는 모친 소니아 석 여사의 영향이 기장 컸다. 1970-90년대 석 여사가 산 밥을 먹지 않은 한인회나 주요 한인단체 임직원이나 한인 언론사 기자들이 없을 정도로 ‘밥 사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몹시 닮아 장 박사 역시 어머니와 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 많았다.
그래서 장 박사의 좌우명이 ‘배고픈 사람 내가 돕는다’이다. 어머니 석 여사의 가르침이 장 박사의 삶의 토대가 된 것이다. 어머니의 커뮤티니 봉사활동 정신을 그대로 배웠다. 장 박사는 1936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만석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 소니아 석 여사와 한 지붕아래서 함께 산 삶은 80 평생에서 고작 1년뿐이었다. 서로가 바쁜 삶을 살았다. 생전의 장 박사는 지난날을 얘기할 적에 “지난 날을 생각해 볼 때 어머님과 한 집에 살아본 것이 고작 1년 정도인데도 항상 같이 산 기분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어머니 석 여사가 1948년 미국 유학길에 떠나자 학창시절을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서울사대 부고를 거쳐 1955년 서울 치대에 입학했다.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1963년 유학생 비자로 어머니기 있는 LA로 온 그는 비로 뉴욕에 갔다 유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1년 뒤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뉴욕 생할 당시 한인들이 많아 없었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길가다 동양인과 마주치면 “어이.. 엽전!”이라고 말을 걸었다. 만약 반갑게 쳐다보면 동포라고 생각해 달려가 악수를 청하고 함께 얼싸안기도 했다고 후일 술회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다시 LA로 온 장 박사는 고달픈 유학생활 끝에 1971년 1월 LA인근 로마린다 대학 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LA에서 치과를 개업한 첫 번째 1세 한인 치과 의사가 됐다. 한인이 직접 치과 병원을 개업하니 한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생전에 장 박사는 치과병원 개업 초기에는 미주한국일보 신문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말했다.
LA 최초 한인치과병원 개업
그당시 의료인들은 지금처럼 병원 광고를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병원 광고 규제가 풀렸지만, 당시 미국의사협회는 의사들의 광고 게재를 엄격히 규제했다. 당연히 치과병원의 광고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시절이라 장박사가 치과병원 개업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다 보니 한국 신문 기사 한 줄이 곧 광고가 된 셈이다. 환자가 많은 날엔 하루에 50~60명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장 박사의 치과는 그야말로 문전 성시를 이뤘다. 1972년 1월에 윌셔와 샌 앤드류스 코너(현재 라마다 인 호텔 자리)에 처음으로 치과병원을 개설했으며, 3년후에 올림픽가(4026 W. Olympic Bl. LA)로 이전하여 2017년 은퇴할 때까지 자리했다.
처음 개업 당시는 환자의 70%가 한인이고 30%가 백인, 흑인과 라티노 등이었는데, 은퇴 당시는 이 비율이 반대로 한인은 30%이고 비한인이 70%였다. 1997년 그가 은퇴할 때는 한인 치과 의사가 많아졌다는 환경이다. 한편 지금은 치과 분야에 임플란트 시술이 상식처럼 번창하고 있지만, 장 박사 시절 초창기에도 임플란트가 성행했는데, 그도 몇 년 하다가 중지했다. 1980년 당시 많은 임플란트 시술 의사가 법정 소송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창기라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했다. 생전에 장 박사는 “2000년 이후 치과 분야에 재료도 좋고 기술도, 기계도 좋아졌다.”면서 “이제는 치과재료 분야에서 Made in Korea가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치과 기공사들도 한인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46년 지킨 치과병원에 대한 애착
지난 2017년 3월 반세기 가까운 시간 46년 동안 일터였던 올림픽의 치과병원 문을 닫았다. 그가 치과 간판을 뗄 때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생전에 그는 죽을 때까지 할 걸로 생각했는데, 세월이 말렸다. 당시 그는 가까운 올드타이머들에게 “이제는 마음대로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다”면서 5년전 만해도 하루15-20명은 거뜬히 치료했는데 지금은 10명 치료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섭섭하지만… 시간이 됐구나라고 생각했고… 원래 평생을 치과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래하다 보니 환자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기도 해서….”라고 했다. 그는 개업 중일 때, 주말에 골프를 가더라도 반드시 병원을 들렀다가 가는 버릇이 있었다.
심지어 공휴일에도 병원을 가봤다. 그런 치과병원이었으니 문을 닫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장 박사는 전 생애를 통해 비록 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산 시간이 고작 1년이지만 어머니를 많아 닮았다. 어머니 소니아 석(한국명 석숙성, 1917-1997)여사는 1960-90년대 한인사회에서 다방면으로, 그리고 종횡 무진으로 활약하는 여걸(?)이었다. 한마디로 석 여사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미주 이민 역사에서 여성으로서 남성 단체장들의 열 배 이상 봉사자 였다. 석 여사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택시 운전사 그때 나이 16세 소녀였다. 그 후 그라이더를 탄 최초 여류비행사, 어떤 날은 모터사이클로 신의주 시내를 질주하던 여성이었다.
그는 일본 유학 2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7년간의 택시 운전사와 자동차 부품업으로 돈을 벌었다. 근져는 6·25전장 발발 전인 1948년 미국에 유학하여 노스캐롤리나 장로교 대학을 다니다가 1950년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륙횡단 철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6·25 한국전쟁소식을 들었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구호물자 모금 활동은 미국 신문에서도 다루어 주었다. 그녀가 많은 구호물품을 모았으나 국내로 수송할 돈이 없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해서 해군 군함으로 구호 물자를 수송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최초로 김치공장을 시작해 돈을 벌었다. LA로 이주하여 1962년에 처음으로 미국부동산 브로커 라이선스를 취득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한국인들에게도 돈을 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964년에 캐딜락을 구입해 DMV에 건의해 자신의 자동차 프레이트 번호판을 ‘KOREAN’로 허가 받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부터 한인타운에서는 “애국 여성”이란 별명이 나왔다. 세계적인 명소 디즈니랜드의 ‘스몰월드’가 탄생하면서 세계 각국의 인형을 설치하는데 한국인형도 장식하도록 당시 톰 브래들리 LA시장의 협조를 받았다. 그런데 처음 설치된 한국인형이 국적 불명의 인형 모습이었다.
그 당시 석 여사는 취재기자에게 도움을 청하여 다양한 한국 인형 모습을 디즈니 기술진에게 제공하여 면모를 살리기도 했다. 특히 석 여사는1965년 미국에서 최초로 한국 말 방송 KTYM FM 103.9 MC ‘라디오 코리아’ 방송(현재 라디오코리아 방송과 명칭이 같았다)을 할 수 있는 재정적 후원자였다. 또 그는 한국인들을 위한 단체 묘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던 중 여성으로 최초로 1971년 남가주한인회(현재 LA한인회) 제4대 회장이 되어 한인들을 위한 본격적인 봉사를 벌였다. 1972년 조국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에 최초의 선수단장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모친 소니아석 여사의 눈부신 활동
이 무렵 LA한인회관 건립도 추진했다. 당시 한인회에 자금이 없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호소하여 지원을 받고 자신의 기여금과 함께 주변의 힘을 모아 부동산 브로커의 실력으로 오늘의 LA한인회관을 구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가주한국외환 은행 초대 지점 건물, 대한항공 미주본부건물 등도 그녀의 손을 거쳐 갔다. 이 당시 장 박사는 그림자처럼 어머니 석 여사의 활동을 돕는 봉사자였다. 석 여사는 남가주한인회장이라는 직함 외에도 전국체육단 단장, 대한부인회 회장, 한국 노인회 회장, 동포 모국 방문단 단장 등등을 포함 LA 톰 블래들리 시장 당시 최초 한인 커미셔너, LA시장특별고문, 닉슨 대통령 당시 미공화당가주부위원장, 가주유산위원회 부회장 등으로 포함 무려 약60개의 직함을 지녔다.
그래서 그녀가 활동 당시 동포들은 LA 총영사 이름은 몰라도 “소니아 석 여사”의 이름을 알았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애국심과 동포사랑으로 이어져 오다가 1996년 7월 8일 향년 80세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하늘도 무심했던지 석 여사 별세 후 엄청난 장마비가 내렸는데, 그 바람에 지하 창고까지 물이 넘처 석여사의 각종 귀중한 자료들이 물에 잠기는 수난을 당했다. 석 여사는 헐리우드포레스트에 영면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발간됐지만, 여러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의LA한인사회의 진정한 영웅이자 전설이다. 한편 故 장지열 박사는 생전에 “한국보다 미국에 산지가 더 오래 살아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어떤 날 그를 만나면 “1970-80년대와 오늘날이 달라진 것이 있다 면 무엇일까? 라고 물어 본 적이 있는데, 대뜸 “먹거리가 달라졌다”며 “고향 평안도를 생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