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서 충청도까지 인민군은 본적도 없었다
■ 남침 북한군은 ‘증명서’도 발급 안한채 운영
■ 점령지 ‘인민위원회’상대로 사기를 친 배짱
■ 인민군 강제복무 대열에서의 구사일생 탈출
올해 6월 25일은 한국전쟁(1950-53) 발발 75주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언론사 연합신문-동양통신의 1953년 실시한 제1회 공채 기자였던 이준영(94)선생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 신분으로 기자가 되었다. 이후 합동통신으로 옮겨 국방부 출입기자단을 최초로 구성했으며 10여년간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5·16 혁명의 공식보도’의 주인공으로, 한국 현대사 군사정권을 취재하면서 박정희 장군을 포함해 기라성 같은 한국군 고위 장성들을 취재했다. 1980년대 미국에 이민한 이준영 선생은 LA 에서 첩보부 출신 연정(작고)선생과 김봉건(작고) 전재향군인회장, 그리고 한국전쟁 보도 특종기자 신화봉(작고) AP기자 등과 친분을 지녔다. 덕수 이씨가문의 충무공 12대손인 이준영 선생은 최근 자서전 초고를 끝냈다. 그 자서전에 한국전쟁 발발 당시 18세의 대학 1년생이었던 이준영 선생은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을 따라 서울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가서 한국전쟁을 역전시킨UN군의 외관지역 대규모 융단 폭격도 목격 하는 등 동료 친구 2명과 함께 동행한 이색적인 체험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본보는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이준영 선생의 허락을 받아 6·25 발발 이후 인천상륙후 9·28서울 수복까지 90일의 기록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내가 기억하기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은 6월 1일이 새 학기의 첫 날이 되는 역사상 유일한 해였다. 당시 내가 다녔던 6년제의 경기중학교는 1950년 5월 5일에 졸업식을 가졌다. 그해에 나는 서울대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문리과대학 문학부의 50학번 학생으로 첫 학기 수강 신청 마감이 6월 24일 토요일이던 것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 다음날 일요일 인 6월 25일이 북한 공산정권의 불법 남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나는 6월 26일과 27일에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등교했다.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26일은 어정쩡한 기분으로 강의를 듣고는 집으로 왔다. 그러나 다음 날 27일 등교하니 문리대 본부 앞에 교수와 학생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오래 전 일이라 모든 것을 기억을 하지 못하나, 손진태 학장의 연설 모습이 기억된다. 그리고 여러 명의 상급생들이 번갈아 가며 연설을 했는데, ‘의용군을 조직하여 북한군과 싸우자는 말’도 들렸으나, 캠퍼스까지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 때문에 심경이 몹시 착잡했었다. 그 26일과 27일 두 날이 서울대 신입생인 내가 그래도 제 발로 학교에 갔던 날이다.
인민군 의용대에서 기적적 탈출
그 후 며칠이 지났을 때 초등학교 시절 1년 선배인 김 모 서울대 수학과 2년생이 찾아와 ‘학교에 가보자’고 해서 등교를 해 보니 약 300-400명 정도가 모였다. 한 인솔자가 사전 설명도 없이 시가행진을 시켜 우리들을 종로국민학교로 데리고 갔다. 이유는 전혀 몰랐 는데 나중에 알려진 바는 강제로 인민군 의용군으로 데려가려 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으로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학우 성대현 군과 함께 기적적으로 탈출할 수가 있었다. 나는 줄을 서고 있던 중 앞을 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뒤로 걸어오며 대 여섯 명중 하나에게 작은 소리로 무엇을 지껄이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상대 학생에게 심사장으로 들어갈 때 좌회전 하는 곳에서 ‘당원이요’ 라하고 줄에서 빠져 나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성대현 군에게 조용히 전하고 ‘나를 꼭 따르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우리 줄이 문제의 좌회전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당원임을 자칭하고 성 군과 함께 줄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인파를 헤치고 정문으로 뛰어가면서 학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입구에 무장을 하지 않은 보초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도 뛰어가면서 ‘민학련에 급한 연락이 있다’ 하고 그냥 나갔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전쟁은 계속 중이고 험악한 세월은 젊은 나를 암담하게 만들어 갈 뿐이었다. 당연히 나가 서 해야 할 일도 볼 일도 없고, 경험도 없어 돌아다니며 행상을 할 처지도 되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7월 하순이 가까워 왔을 때, 친하게 지낸 초등학교 동창생과 동네에서 사귀어 아주 가까웠던 동갑내기 등 두 명이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다. 이들은 그 해에 서울교육 대학에 입학하여 장차 교직 생활의 희망을 둔 오중석 군이고, 또한 동창생은 손재주가 있어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조기석 군이다.
내가 집에서 맞이하자 두 친구는 너무 기뻐하며, 소식이 끊겼던 그 동안 지낸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 두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 그동안 시골을 찾아다니며 식료품들을 사서 서울로 날라와 장사를 하며 살아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시골에 다녔는데 북한 인민군은 거의 구경을 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또 자기들처럼 장사하는 사람 들도 너무 많아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검문 등 신분 조사를 받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며, ‘인민군 하는 꼴이 아주 엉성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얘기를 나에게 소상하게 한 다음, ‘본론에 들어 가자’며, ‘우리는 그들의 지배를 받으 며, 이 땅에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항이지만 그 얘기를 들으니 그럴 것 같았다. 그런 얘기를 강조한 그들은 나에게 ‘거지같은 이 땅을 떠나서, 어떻게 든 전선을 뚫고 남쪽으로 탈출하자고 그 의논을 위해 왔노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너의 둘과 함께라면 나도 든든하다. 그런데 쉽지가 않을 터인데…” 하고 말하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하하고, 만일 그 이전에 부산까지 북한군에게 빼앗긴다면, ‘일본으로 밀항이 라도 하자’ 고 했다. 그러면서 나만 함께하면 자기들은 아무 걱정이 없다 고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도저히 살아가기 어려운 앞날을 생각하며 암담한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 중이었기에 나를 믿고 찾아 온 두 친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우리는 3일 동안 준비하고 날짜는 잊었으나 7월 말경 용감한 세 청년은 서울 집을 나섰다.
3명 청년들과 남행길 도전
한강을 건너기 위해 파손된 천호동 다리 밑에 도착해 보니 도강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넘쳤다. 모두가 공산 치하에서 겪어야 하는 치사한 생활을 위해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바빠 보였다. 두 친구는 자기들도 많이 다닌 길 이라고 했다. 한강을 건너 광주로 향하는 남행길을 여러 시간 걸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내 부모님의 피난살이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에게 친구들과 함께 남행의 목적과 계획을 설명 드렸다. 다 들으신 두 분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엉뚱한 우리 셋의 뜻을 무어라 평할 내용 을 못 찾으셨을 것이다. 하루 밤을 잘 지내고 도시락을 싸 주신 부모님과 작별하여 남행길을 걸었다. 나는 지도 상으로만 알고 있던 처음 걸어보는 길이었다.
그 당시는 넓지는 않지만 대부분 포장이 되어있어 걷기에 편했다. 경기도의 끝인 장호원까지는 밥을 사먹으면서 걸어야 했다. 충청도에 들어서면 인심이 좀 후해 질 터이니 참자고 웃으며 행인이 그치지 않는 길을, 밥은 사먹으며 계속 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남행길에 뜻 하지 않게 검문을 당했다. ‘자치대’인지 ‘치안대’인지 이제는 그 이름 기억이 불확실하나, 충청도에 들어서기 훨씬 앞서 허술한 간판 앞 건물에 서있는 한 젊은 이로 부터 “누구냐?”는 검문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크게 멀지 않은 마을 이름을 대고 ‘서울에 공부하러 갔다가 해방이 됐다기에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다른 것은 묻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그것을 보고 우리 셋은, 남침한 북한군은 아직 무슨 증명서 같은 것은 발행을 하지 않고 있음을 확신했다.
증명서가 없이 다닐 수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장호원을 마지막으로, 세 청년은 충청도 괴산 근처에 들어섰다. 이제부터는 민심이 좋을 것이라는 농담을 나누면서 언덕길 같은 곳을 넘는데 길가에 나무마루가 있는 한옥을 발견 하여 쉬어 가자고 하며 셋이서 마루에 걸터 앉았다. 그러자 잠시 후 집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40세 정도로 보이는 인상이 좋은 남자가 “누가 왔느냐?” 며 마루로 나와 우리를 만났다. 그리고는 “서울서 왔을 것인데 어디 멀리 가느냐”며 그는 “여기서는 인민군 구경도 못했는데 어떠냐?”며 여러 얘기를 물어보는 것이다.
우리도 기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를 안으로 안내해서 식사 대접도 하고 “가는 길이 멀 터인데 자고 가라”며 그 날 밤 숙소까지 제공했다. 역시 충청도 인심이 매우 좋다는 것을 셋이서 느꼈다. 다음 날 남행길을 재촉했는데 인민군 같은 것은, 길을 떠난 날부터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마음속으로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날 오후 무렵, 남행 길 오른 쪽으로 좁은 길이 나 있는 입구에서 오랜만에 5-6명의 젊은이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먼저 그들 앞으로 다가가서 ‘저 곳에 무엇이 있느냐’고 당당하게 물었다. 그들은 바로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있다”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적지에서의 두번째 위기 탈출
우리 셋은 약 200 미터 쯤 걸어 올라가 보니 초가집을 발견하고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사무실처럼 차려 놓아 제법 넓은데 대표자 자리 같은 곳에 한 젊은 청년 한 명이 앉아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눈에 뜨이지 않았 다. 그래서 “모두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그날 모두 농가에 가서 익어가는 벼에 이삭이 몇 개씩 있는지 조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남침한 그들은 북한에서 하던 식으로 벼 이삭이 몇 대씩 박혀 있는지를 조사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속으로 “웃기는 놈들”이 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북한군 조직을 목격했다. 그 젊은이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현지 인민위원장이라고 대답하기에, 나는 시침이를 떼고 “우리는 중앙에서 내려와 청주로 가는 길이라며 수고 하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하고 나가려는데, 친구 오중석 군이 장난기가 동했는지 위원장에게 “우리는 도중에 지원을 받으며 가고 있으니 쌀을 좀 도와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위원장은 두 말도 없이 반 말 쯤 되는 쌀 주머니를 즉시 준비해서 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오 군은 “충청도가 담배 고장이라고 들었는데 입 담배 있으면 좀 줄 수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다. 위원장은 이것도 두 말없이 우리에게 내 놓았다. 그리고는 “영수증이나 한 장 써 주시요” 라며 약간 꾸겨진 흰 종이 한 장을 내 밀었다. 오 군이 그 종이를 받아 영수증이라고 적고 내역을 적은 다음 ‘중앙당부’ 라고 적어 나에게 서명을 부탁했다. 내가 간단히 서명을 해 주었더니 인민위원장이 ‘감사하다’기에 “수고 하라”는 말을 던지고 인사를 받으며 바로 그곳을 나와 한 5킬로미터 정도 길에 나와 세 청년은 크게 웃었다. 우리 셋 중에 담배 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을 헤매며 쪼들려 지내다가, 인심이 후하다는 충청도에 들어서서 ‘인민위원회’를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걷다가 충주호가 된 강가에 도착해 8월의 더위를 피해 커다란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며, 다음으로 갈 방향계획을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문제의 ‘인민위원회’ 문을 나선지 한 시간 가량 지난 무렵 같은데, 갑자기 미군 전투기 한 대가 문제의 건물을 폭격하여 화재가 발생 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초가집에 북한 인공깃발을 높이 걸어 놓았던 탓에 하늘에서 눈에 띄어 군사 시설로 알고 폭격해 버렸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늘이 도와 우리 셋은 적지에서 위험을 면했다. 나에게는 적지에서 두번 째 위기 탈출인 셈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