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5주년 특집2]언론인 이준영선생이 체험한 90일 북한 공산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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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북방 마을에서 북한 치안대 공청회도 참석
■ 낙동강 부근서 미군 B-29 편대 융단 폭격 목격
■ 미전투기 공습에 동행하던 친우 2명 피습 사망
■ 대구 근처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 눈물겨워

올해 6월 25일은 한국전쟁(1950-53) 발발 75주년이다. 6·25 전쟁 당시 대학 1년생인 전직 언론인 이준영(94)선생이 체험한 처음 90일 북한 공산치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역사 기록이다. 이준영 선생은 최근 자서전 초고를 끝냈는데 한국전쟁 발발 당시 18세의 대학 1년생이었던 이준영 선생은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을 따라 서울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가서 한국전쟁을 역전시킨UN군의 외관지역 대규모 융단 폭격도 목격하는 등 동료 친구 2명과 함께 동행한 이색 적인 체험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본보는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이준영 선생의 허락을 받아 6·25 발발 이후 인천상륙후 9·28서울 수복까지 90일의 기록을 3회에 걸쳐 소개하는데 이번에 2호를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기자>

▶지난주에 이어…『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3일 만인 6월 28일 함락 당한 서울에 있던 나는 친구 2명과 집을 7월 중순에 나선지 충청도를 지나 2주일이 지났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북한인민군사령부가 발표하는 전항은 믿을 수 없지 만 우리가 뚫고 가려는 전선은 대구 북방에서 교착된 것 같았다. 우선 북한 인민군을 볼 수가 없어 아주 이상했다. 인적이 거의 안 보이는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우리는 오래된 기와집들이 눈에 뜨이는 마을에 도착했다. 경상도에 많다는 기와 집 마을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기왕이면 가장 부자가 살 것 같은 집을 찾았다. 비교적 깨끗하고 큰 집을 발견해서 나는 그 집 대문 앞에서, 옛날처럼 ‘이리 오너라’하고 두어 번 불러 보았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며 점잖하게 생긴 50-60대 남자가 문을 열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셋은 함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소란스럽게 해드려 죄송 했습니다”고 우선 사과하고 서울서 내려 온 학생들인데 대구로 가는 길에 하루 신세를 좀 지었으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즉시 들어 오도록 했고 넓은 사랑 방 같은 방에 우리를 앉혔다. 우리 세 사람은 소속된 학교도 다 밝히고 언제 서울을 떠났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일본으로 밀항해야 겠다는 각오까지 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주인은 반가워하며 자기의 본관과 이름을 대기에 나도 덕수 이씨 본관과 충무공 후손임을 밝히고, 그 분의 가문과 우리 가문이 과거 관계가 있었던 듯한 일도 나누었다.

하루 밤을 그 댁에서 잘 보내고 융숭한 대접을 받은 다음 다시 남행 길을 재촉했다. 국도를 찾아 남쪽으로 가다가 오후 4시경 제법 큰 마을에 도착했다. 대로 변에 매우 큰 주택이 있었는데 대문 앞에는 ‘치안대’ 인지 ‘자위대’인지 간판이 붙어있었는데, 우리보다 한 두 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젊은이가 서울말을 쓰면서, 자기가 ‘대장’이라고 하며 우리 셋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불과 4일전에 그 마을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고 말하고, 자기는 서울의 을유문화사에 근무하다가 내려온지 4일 밖에 안 된다며, 이곳이 자기집이니 안심하고 쉬라고 하고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 온 자기에게 ‘치안 대장’을 하라고 졸라서 맡았지 만 집을 돌봐야 하기에 마지못해 대장 노릇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7시에 마을 사람들 가족 대표가 모두 마을의 공청회에 모이게 되어있으니 우리도 함께 가서 자기를 도우라기에 그와 함께 공청회에 갔다. 50여명 이상의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북쪽 공화국 정권이나 인민군에서는 아무도 그 모임에 안 나왔다. 그 치안 대장과 함께 그 자리에 동석한 우리 셋은 모두에게 인사를 받고 귀빈처럼 자리에 함께 하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저녁 7시의 공청회 시간에 맞추어서인지, 큼지막한 군용 배낭을 멘 2명의 젊은이가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모인 공청회 장소로 들어와 우리들 앞자리에 동석하는 것 이었다. 그 순간 나의 머리가 전광 석화처럼 움직였다. 그들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동무들은 어디까지 가시오?” 그러자 둘 중의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무슨 서류를 꺼내 서 나에게 주는 것이다. 나는 10초도 걸리지 않은 동안에 그 서류를 완벽하게 읽고 돌려주며, “이런 서류는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시오” 라고 했다. 그러자 옆 친구가 머리를 끄덕이며 서류를 내게 건넨 자의 얼굴을 보고 머리를 또 끄덕 끄덕했다. 그리고 나에게 대해 무엇을 물어보려는 기색이 보이기에 나는 즉시 “우리는 대구로 가는데, 시간이 필요해 오늘은 여기서 묵어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자기들은 “여기가 목적지라서 다 왔습니다”며 . “준비했던 식료품 등이 남아서 그것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순간, 속으로는 웃음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겠느냐?” 고 묻고 오중석 군에게 받게 하고, 바로 숙소로 가야 한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었 다. 그들이 보여준 증명서는 내가 처음으로 구경한 ‘정치 공작대 대원 증명서’와 함께한 ‘출장 명령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기 강양욱’ 명의로 발행됐고, 경상북도가 출장지로 돼 있었다. 나는 10초도 안 걸려 그 내용을 다 읽었으며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짐작에 그들이 비교적 순진한 것으로 미루어 평양의 대학생들인 것 같았다.

대구 근처에서 북한식 공청회 참석

우리가 다시 길을 재촉한지 8월16일에, 우리는 처음으로 낙동강에 다다르게 됐다. 강 상류라 서인지 폭이 넓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 너 명의 북한 인민군 병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상의는 벌거 벗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8월의 꼭 중순, 한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릴 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어려 보였다. 강에는 다리도 없어 어떻게 건너야 할지 막막해서 셋이 서있는데, 그 인민군 중의 하나가 “그리로 그냥 건너라”는 것이다. 탱크가 낙동강을 건느기위해 가마니에 돌을 담아 그곳 강물을 메꾸었다는 것이다. 우리 셋도 옷을 벗어 속옷 바람이 되어 옷 보따리를 머리위에 올리고 강을 건너갔다. 강을 무사히 건너간 우리는 우거진 나무 밑 그늘을 찾아 누어서 옷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햇빛이 뜨거워서인지 옷은 마르는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때에 별안간 하늘에 여러 대의 B-29 미 공군 대형 폭격기 편대가 멀리서 날아가는데 계속 비행기 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폭격기들의 엄청난 편대를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우리 셋이서 몇 대나 될 것인지 세어봤다. 그 사이에 거리는 좀 떨어졌지만 폭격기들이 폭탄을 떨어트리는 폭음이 울리는 것이 요란하게 들렸다.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96대까지 세었던 것 같다. 어디를 폭격 했는지 그 때는 몰랐는데 내가 추후 알아 본 바 그것이 바로 제2차대전 이후 최초로 미국 공군의 왜관지역 전면 융단 폭격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 날 우리 셋은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큰 전투 장면의 하나를 멀리서 목격했던 것이다. 유엔군은 이어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바꾸었으며, 우리가 목격한 그날 폭격은 인민군 주력을 섬멸 하는 전투였다.

B-29 폭격 편대와 엄청난 공습을 들은 다음 우리는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 대구 북방의 팔공산을 보면서 남하 하는데 인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나 세 청년은 조심 하면서 발길을 움직였다. 아직 해가 높이 떠있는 대낮에 상당히 큰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마을로 들어 갔다. 그 마을에는 전투가 있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이상하게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마을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셋은 계속 걸었다. 그 마을의 중심부 같은 곳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도망을 갈 수도 없어서 앞에 가 보니 배낭을 멘 우리 또래의 두 젊은이가 비어 있는 점포 마루턱에 앉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를 보고 “어디를 가느냐?”고 경상도 사투리 섞인 질문을 했다.

우리는 약속했던 대로 모든 대화는 내가 맡아서 했다. 그것이 경상도 땅임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집이 대구에 있는데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다 가 대구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학생이라면 신분증 좀 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 증명서도 없는 우리는 6년제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아직 증명서를 못 받았다고 대답했 다. 그리고 혹시 나 해서 유효기간이 지난 경기중학교의 내 사진이 붙어있는 ‘학도 호국단’ 수첩을 참고하라고 건넸다. 내 수첩을 본 그는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기의 증명서 라며 보라고 나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의 증명서를 보고 나는 그들이 그곳 사람이 아니라서 우선 안심했다. 그는 서울의 ‘성북 구 민주청년동맹원’으로 경상북도에 다녀오라는 출장 증명서까지 있었다.

나는 증명서를 돌려 주며 ‘민청원이시군요’ 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잘 보라는 것이다. 내가 자세히 보니 그의 증명서에 붙은 사진의 빛이 인주가 아닌 붉은 잉크로 그어져 있기에 웃으며 ‘가짜네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한 5명 이 모두 웃었다. 마음이 놓였다. 새 동지들을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이름은 권오경 이고 동국대학교 정치학과 3학년이며 또 한 친구는 배두진으로서 성균관 대학 2학년 이라했다. 권 씨는 경산, 배 씨는 대구가 집이라고 했다. 권 씨는 이어 ‘경상도에는 빨갱이가 많은데 서울 말하면서 대구에 산다면 믿는 자가 없다’ 면서 이제부터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들이 말 할 것이니 우리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다.

폭격으로 잃은 두친구의 유품을 챙기며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는 그곳이 선산군 해평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라며 이곳에 친척이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인민군이 들어와 난리가 나서, 고개 넘어 ‘우무실’ 이라는 산 동내에 마을 사람들 이 모두 피신한 것 같다며 이 마을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해가 떨어지면 ‘우무실’ 산 동내로 가자고 했다. 우리 일행은 당연히 함께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대구 북방 팔공산 까지는 50 킬로미터 정도 된다며 전선이 팔공산 북쪽에서 교착돼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최전선 바로 북방 공백 지대에서 우리는 3명이 5명으로 늘어난 새 집단이 된 것이다. 5명의 청년들은 그 때 그런 곳에서 마음을 풀고 인생사가 겪은 여러 얘기를 모두가 기탄 없이 나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날 처음 만났지만 모두 서로가 백년지기 같은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권오경 씨는 마음이 대단히 포근한 청년이었다.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그곳 사정도 대단히 밝았다. 난생 처음으로 경상도 땅을 밟아보는 우리 셋을 위해 너무나 잘 해주어 곧 그가 의지가 되었다. 고개 넘어 ‘우무실’이라는 마을과 ‘백이실’이라는 마을에 관해서도 많은 설명 으로 우리를 안심시키며 철저히 막힌 최전선이 뚤릴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사정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직도 해가 있던 중 보따리를 들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높지는 않지만 고갯길은 겨우 한 사람씩 걸어야 할 정도로 좁아졌다. 다섯 청년은 자연히 한 줄로 서서 고갯길을 서서히 걸어 올라갔다. 제일 앞에 길 안내를 맡은 그날 만난 권, 배 두 청년이 나섰고 15 미터 쯤 떨어져 오중석 군이 뒤따랐고 조기석군 다음으로 내가 뒤를 따랐다.

바로 그때 멀리 팔공산 부근 상공을 비행 중으로 보였던 세이버 제트 미 공군 전투기 한 대가 우리 가 걷는 언덕 길 상공에 날라 와서 저공비행을 시작했는데 지상 200 미터로 짐작되는 상공까지 날라 왔을 때 나는 젊은 백인 조종사의 얼굴을 뚜렷이 보았다. 그리고 순간 우리 편을 만난 것 같은 기쁨을 느껴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우리는 한 편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전투기가 우리를 향해 기관포를 쏘는 것이다. 포성이 나는 동시에 내 앞에 서 무슨 말을 하려던 조기석 군이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나 자신도 위험 을 느껴 나무가 몇 구루 있는 언덕 아래 골짜기로 뛰어내려 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이제 죽을 때를 만났다는 생각만 들었다. 10 미터 쯤 비탈을 정신없이 내려가는데 사람의 몸 하나 들어 갈만한 구멍이 신기하게 눈에 띠었다. 나는 무작정 생각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서 두 다리를 꼬부 리니 몸이 90% 정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8대의 전투기가 교대로 우리가 있는 지상으로 하강해서 폭격을 가하고 상공으로 나르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나는 눈을 감고 ‘어머니…’를 외쳤다. 전투기들은 무서운 소리를 동반하며 하강하고 상공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숨을 쉬었다가 그런 일을 되풀이 하는 동안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사이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전투기 소리가 끝났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만 18세의 나이로 그 무서운 상항에서 내가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다. 0.1%의 기적이 아니라 0%의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굴 안에 누어 맥이 빠져 늘어져있는데 그날 만난 권 씨의 목소리가 들렀다 ‘아이고…’ 하며 어서 나오라는 것이다. 권, 배 두 사람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나를 보고 놀랬다. 내 얼굴과 입은 옷의 앞이 모두 피투성이로 무섭게 변해 있던 것이다.

내 앞을 가던 조기석 군이 첫 피격에 목을 맞아 그의 골과 피를 내가 뒤집어 쓴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 그리고 10미터 앞에는 온 몸에 여러 발의 포격을 받은 자욱이 잔인하게 뚜렷한 오중석 군이 엎드려 죽어 있는 시신으로 있었다. 우리 셋은 말이 안 나왔다. 그런데 나와 권, 배 씨 등 세 사람은 온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두 친구의 유품, 유품이라고 해야 별것도 아닌 것이 들어있는 휴대품 들인 가방을 셋이서 챙겨 우선 마을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약 30분 걸려 ‘우무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30 여명의 남자 주민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아이고, 댁들이 고생을 했구려’ 하며 주민들은 우리를 위로하며, 그 곳은 최전선 작전 지역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발견만 하면 발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낮에는 일체 움직이지 않고 밤에만 다닌다는 것이다.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은 모두 더 남쪽인 팔공산 쪽에만 모여 있는지 이상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을 사람 들이 이튿 날 새벽 5시경 우리를 데리고 사건 현장에 가서 나의 두 친구의 시신을 간략 하지만 현장 에서 간략한 장례를 치루고 매장했다. 한국전쟁 1950년 8월 16일, 나는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우무실’ 근처에서 친구 두명의 죽음을 겪은 비극에서, 또다시 나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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