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5주년 특집 마지막회] 언론인 이준영선생이 체험한 90일 북한 공산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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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영병을 앞세워 북한 고위 간부 행세로 위장해
■ 낙동강에서 다시 서울로 인민군 트럭 세워 타고
■ 인민군 트럭에서 ‘유엔군 인천공격’ 뉴스에 흥분
■ 9·28 수복으로 북한군 치하 악몽의 90일에 해방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이 남침하던 그 당시, 경기중학교를 막 졸업한 이준영(94) 선생은 나이 18세로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입학한지 첫 수업 3일째 북한군 탱크가 서울을 함락하는 참담한 사태를 목격했다. 그 상황에서 친구 2명과 서울을 탈출해 남쪽으로 북한군이 지나간 지역을 따라 끝내 낙동강 전선에 이르러 친구 2명이 전투기에 폭사 당하는 운명도 맞이하면서 다시 서울 로 돌아와 감격과 비극이 교차한 6·25 첫3개월을 보냈다. 했다. 이준영 선생은 최근 6·25 전쟁을 포함, 자신의 90여 인생을 자서전으로 기록했는데 본보는 올해 6·25 전쟁 75주년을 이 선생의 허락을 받아 6·25 첫 3개월을 3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이번호에 마지막을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1950년 9월 초 낙동간 전선 팔공산 바로 북방에서 친구 2명을 잃은 우리 셋을 마을 사람들은 그날부터 마을 변두리에 작지만 깨끗하게 꾸며놓고 사는 한 50대 과부 아주머니 댁에 안내해 보내면서 ‘불시에 공산당들이 와서 조사 할 지도 모르니 잘 숨어 있으라’고 했다. 그날부터 내가 별안간 고열에 신음하게 됐다. 나는 그때까지 그러한 고열로 고생한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증세에 마을 사람들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다며 마을 정미소 주인댁에 금계랍이 있다며 그것을 친절하게 직접 구해다가 나에게 먹였다. 그 덕에 나는 약 1주일 누어서 앓다가 병석을 떠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시간 이후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잘 들렸고 비행기 소리만 나면 몸이 딱 굳어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증세가 생겼다. 거짓말같은 항공기 공포증이 발병한 것이다. 그 증세는 9·28수복을 맞자 신기하게 감쪽같이 없어졌다.

당시의 전투상황 속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 등 전혀 모르는 가운데, 그날 만나 자연스럽게 새로 꾸며진 세 청년은 ‘우무실’ 골짝이 피난살이 공동생활을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별로 높지 않은 두 산 사이 골짝이 언덕에 걸쳐 퍼져 있는 그 마을은 거짓말 같이 너무 평화 로웠다. 그러다가 추석을 보름 쯤 앞두고 나는 마음을 바꾸어 남하를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 살 결심을 하게 되어 두 친구에게 뜻을 전했다. 산 중이라서 날씨가 내려가 추위를 느끼게 되어 내 가방을 뒤져보니, 어머니가 직접 짠 털 스웨터가 있었다. 모르고 있다가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가 짜 주신 털 스웨터는 눈물이 나게 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예감했을 어머니의 직감적인 사랑이 내 마음을 아련하게 했다. 새로 만난 두 친구와는 가족 이상의 감정으로 2주간이 넘게 가족처럼 지내고 헤어졌다.

나는 다부원 북쪽 국도로 서울을 향해 급하고도 빠른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급히 걸었다. 그러다가 1킬로 쯤 걸어서 제법 커 보이는 마을이 앞길에 모습을 나타냈다. 멀리서 보니 경찰지서 같은 건물 이 앞 길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별안간 다발총을 멘 인민군 병사 하나가 뛰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누구냐’고 묻고자 하려는데 그 인민군 병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북 악센트가 아니라 서울 말이었다. 나에게 ‘선생님’하고 첫 마디를 꺼낸 다음 놀랍게도 ‘제가 모시고 갈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해 하니까 몇 백 미터를 지나 인적이 없어지자 말을 꺼냈다. 자기는 서울에서 단국고등하교 3학년에 다니다가 별안간 의용군에 끌려가 ‘탱크’병이 됐다는 것이다. 탱크를 몰고 내려 왔다가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탱크는 부서지고 함께 했던 상사는 전사했는데 자기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며 소속부대가 어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기회에 탈주해서 서울로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다발총을 하나 훔쳐서 공안대에 앉아 나 같은 사람을 만나 무사하게 서울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나를 당(黨)의 고위층으로 위장시켜 자기는 나의 호위병이 되면 무사히 서울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세상에 이런 기적이 또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내심 놀랬다.

인민군 탈영병이 다가와 ‘모시고 가겠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다발총을 맨 호위병까지 거느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위 인사로 둔갑 하여 길에서 인민군 병사들도 많이 지나쳤으나 항상 당당하게 굴었다. 나는 어느 곳을 지나는지도 전혀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 해가 떨어지면 그는 이상하게 민간인들이 비교적 많이 모여 어떤 사람의 감독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곳을 잘 찾아 나를 모시고 가서 비교적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그는 말하며 나를 깍듯이 경호하는 것이다. 몇 날이 지났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가 충청북도 충주의 어느 사과 농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잘 익은 사과가 있으면 신세를 져 보자며 함께 농장 안으로 들어가 젊은 여 주인을 만나 사과 좀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승낙하고 잘 익은 사과 한 봉지를 따서 주고 돈을 받지 않았다.

대낮에는 가급적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기에 어느 날부터 밤에만 북행을 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반공세력이 활동을 하려하는 공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즉시 행동에 옮겨 밤에만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지명은 알 수 없으나 경기도의 여주 남쪽 같은데 어느 대로변 넓은 마루가 있는 집에 쉬게 되었다. 총을 맨 군인과 함께 하니 순순히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 자리에 함께 앉았던 서너 명의 촌로들 이 얘기를 주고받는데 머지않은 어느 동리에서 어제 반란이 일어나 인민 위원회를 태웠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나누면서도 우리에게는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 2~3일 후 쯤, 둘이서 밤길을 걸어 나섰는데, 군용 트럭이 서너 대 지나갔다. 그 길은 분명히 간선 도로가 아닌데 인민군 트럭들이 서울 방향으로 북상하는 것이다.

그 가짜 인민군 경호원이 나에게 의논했다. 앞으로 저 트럭을 세워서 타고 가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 밤길에 간간히 전조등을 안 켜고 북상하는 트럭을 발견한 우리는 트럭을 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얘기를 나눈 끝에 나의 동행이 남쪽에서 오는 트럭을 기다렸다가 차가 가까워지자 총을 들고 제지를 명령했다. 당연히 트럭이 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트럭에 올라 타면서 인민군들이 다수 타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랬다. 그들은 강제로 뽑힌 의용군들이 분명한데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이 나누고 있는 얘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이는 뉴스에 접해 놀랬다.

어째서 이 도로로 가느냐고 한 병사가 묻자 다른 병사가 대답하기를, 용인(龍仁)쪽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길이 막혀 이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 인천(仁川)이 곧 당하겠다는 소식이 있다는 말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직감적으로 미군이 인천 공격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속으로 이제 살았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얘기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민군의 병력 수송 트럭을 얻어 탄 덕에 한 두 시간 만에 서울의 천호(千戶)대교 다리 밑 한강 모래사장에 도착한 것이다. 트럭은 천막으로 완전히 싸여 있어서 밖을 내다 볼 수 없어 몰랐는데, 민간인인 나는 무조건 내리 라고 하여 할 수없이 동행과 악수로 작별하고 별안간 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학생 병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민간인은 군용 트럭에 타고 도강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인민군 트럭에서 ‘유엔군 인천 공격’ 뉴스 듣다

혼자 트럭에서 내려 처음으로 밖을 보니, 강북의 서울은 완전한 불바다가 아닌가. 천호대교는 다리가 끊겨 군용 트럭은 군인들을 태운 채 배에 실려 도강 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헤어지게 되어 너무 기뻐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한시 바삐 부모님 피난살이 집에 가서 만나 뵈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 학생 병사와 불바다가 된 서울의 천호대교 밑에서 9월 중순 야반에 별안간 헤어져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잘 있으라는 말을 할 여유도 없는 시간이 되어 우리는 별안간 갈라섰고 그 후에는 소식을 서로 전할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한강 이북 서울 상공은 불바다를 이루었던 시점이었음으로 정확히 기억은 하지 못하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 후 무렵의 9월 15일 경이 아닐까하고 회고하게 된다.

멀리서 포성이 들렸었는 지의 여부는 기억에 남지 않고 있다. 남쪽으로 한 시간 쯤 내려갔을 때 그 길을 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어 용감하게 내가 먼저 ‘누구요’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걱정을 했다. 그날 밤 나는 세 번 그런 경우를 겪었으며 수백 명의 민간인이 줄을 서서 동쪽 산을 향해 가는 것도 보았는데 그것이 북쪽으로 납치 돼 가는 행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100명 이상을 데리고 북상하는 인파를 두 번 만났으나 항상 선수를 쳐서 무사히 넘겼다. 그러므로 나는 그 날 밤, 밤을 세어 움직인 것이다. 시간이나 거리의 길이는 기억하지도 못하나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 같은데 내가 가는 반대편에 약식으로 세운 건물 같은 것이 있으면서 죽창을 든 보초들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오른 쪽으로 가는 소로 길이 마른 논 사이에 보이는데 그 소로가 바로 부모님 피난살이 집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아닌가.

어머님이 피난하시던 당시의 일원동 작은 마을로 통하는 길이 눈에 띄었다. 나는 길을 건너 보초가 서있는 가건물 비슷한 곳으로 향해서 붉은 완장에 죽창을 들고 서있는 보초 앞에 딱 버티고 섰다. 그리고 수고한다는 말을 엄숙하게 뱉고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 에 있는 저자들은 무어요’라고 일부러 물었다. 그는 나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반동들입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길 건너 소로를 가르치며 ‘저 길이 건너편 마을로 가는 길이 맞는 거요?’라고 당당하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저 마을을 잠간 둘러 볼 일이 생겨서 그런다고 당당히 말했 다. 내 태도와 말에 보초는 아무 소리 못하고 ‘네’라는 대답만 했다. 그래서 나는 수고들 하라고 그들에게 말하며 즉시 길을 건너 마을로 향했다. 등골에서 땀이 흐르는 느낌이 있었다. 그 자들이 안 보이는 곳에 도착해서야 나는 ‘후휴-’하고 숨을 내 쉬었다. 모든 난국을 무사히 끝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이제야 살았다는 감회가 가슴을 덮쳤다. 나는 선천적으로 길 눈이 밝아서 그런지 부모님 피난살이 집을 금새 찾았다. 하늘의 끔찍한 도움이 확실한 가운데 가족 상봉의 목표를 성취하는 천행을 이룩한 것이다. 해는 아직 안 떴으나, 동이 틀 때의 밝음이 덥힌 시간이었다.

북으로 끌려가는 납북자 대열도 목격

나는 약간 열려 있는 대문을 더 열고 안으로 가만히 발길을 들여놨다. 마침 그때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어머니’ 소리가 입에서 나오려 하는데 즉시 나를 알아 본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급히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재회가 이루어 진 순간이다. 어머니는 함께 다녀간 두 친구는 어찌되었 느냐고 먼저 물으셨다. 나는 두 친구를 잃게 된 경위와 올 때 겪은 얘기를 우선 간단히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75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 나의 부모형제 모두는 내가 겪은 엄청난 고생 얘기를 그 후 한 번도 나에게서 자세히 들은 바가 없다. 부모님은 내가 그 험하기 짝이 없는 상항 속에 겪은 일을 끝내 자세히 알 수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나신 것이다.

아버지가 보이시지 않아 물어보니 피난처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피신 중이시라고 했다.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색출,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일제히 숨어있는 중이라고 말하셨다. 내가 오면서 본 잡혀 있는 청년들이 그 마을에 거주하는 청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방 문 밖에 나가서는 안 되고 여기 숨어있는 것이 알려져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함께 피난 온 나의 어린 동생들도 나를 본 일이 없이 9·28이 돼서야 만나, 놀라고 기뻐했다. 어머니는 10여 일간 나를 이불에 싸서 아무도 모르게 구석에 숨겨 놓았었던 것이다. 부모님 피난살이 집 주인도 내가 와서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어느날 어머니가 기쁜 기색의 목소리로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시어 숨어있다가 나왔다.

9·28 수복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서울 집을 지킨 여동생들이 걱정되어 그날로 서울 집을 향해 피난 집을 나섰다. 교통 수단이 있을리 없었다. 천호대교에 도착해서 얼마 전 민간인이라고 쫓겨나 평화스럽게 트럭을 내린 행운 도 생각이 났었다. 초만원 상태의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드디어 동생들이 고생스럽게 지킨 서울 집에 도착했다. 동생들과의 재회를 기뻐했다. 일요일인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쑥 밭이 된 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으로 교착된 전선을 뚫고 남하하고자 했던 세 청년의 꿈이 비극적으로 깨져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만 18세의 청년이 약 3개월이 지나 다시 희망을 본 9·28 서울 수복을 맞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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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인사 드립니다

보잘것 없는 나의 인생에서, 나 이전의 모든 선배 인생들과 함께 처참하게 겪은 6·25 전쟁은 우리 민족 모두가 잊을 수 없는 비극입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내가 겪은 진실을 부모님께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도 없었고, 내 자녀들을 비롯한 내 인생의 후배들에게 얘기해 줄 기회를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항상 애독해 온 <선데이저널> 덕분에 90대 중반의 나의 인생의 자취를 남길 귀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글을 읽고 위로해 주신 여러분과 <선데이저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5년 7월 4일 이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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