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취재] 23년형 선고 한덕수 몰락은 샤머니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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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 내란 우두머리 혐의 유죄선고…피할 수 없는 선고
█ 77세 한덕수 100살이나 돼야 출소…무속이 바꾼 인생
█ 개인 무속신앙이 사회적 영역에 들어오면 벌어지는 일
█ 무속이 국정에 통하지 않자 비상계엄이란 무도한 선택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기소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이진관 부장판사)는 21일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의 구형량(징역 15년)보다 8년이나 많은 것이다. 재판부는 또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한 전 총리를 곧바로 법정구속했다. 한 전 총리의 구속으로 인해 윤석열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김건희의 혐의들은 유죄선고를 면키 어려워졌다. 이들의 종말은 곧 무속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샤머니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데이터와 과학 그리고 전문가들의 조언이 아닌 점쟁이의 말을 믿고, 집무실을 옮기고 인사를 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사실 본국의 정치인과 판사, 검사들이 선거나 인사철만 되면 점집을 드나드는 건 오랜 관행이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드러내거나 국정에 반영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이들이 점쟁이들의 신력이라고 믿었던 것도 통하지 않자 비상계엄이란 극악무도한 선택을 했고, 결국 그것이 본인들을 주저앉혔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2021년 10월 대선판에 등장한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가 손바닥에 ‘왕’자를 그리고 나와 파문이 일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가 그려준 것이라고 무속 관련 의혹을 반박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본지는 윤석열의 무속 관련 의혹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이 기사가 윤석열이 수십 년 동안 맺어왔던 역술 관련 인연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기사였다. B선생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이 역술인은 윤석열의 부친인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도 알고 지내며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 왔다.

특히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까지도 꾸준히 왕래하며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조언을 구해왔다. 특히 윤석열이 사법고시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기업인과 함께 방문해 장래 일에 대한 조언을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역술인은 주로 윤석열의 운을 사주로 풀어내는데 능한 인물이다. 윤석열은 여러 차례 검사를 그만두려거나, 검찰총장직을 그만두려 했지만, 그때마다 수십 년간 알고 지낸 역술인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이 역술인이 “기다리면 더 큰 기회가 온다”라는 말로 그의 사퇴를 만류했다.

게다가 이 역술인은 윤석열의 처인 김건희 씨. 스폰서로 알려진 동해전기산업 황하영 사장이나 김 씨의 지인 C갤러리 대표 이 모 씨 등과도 오래 알고 지낸 인물로 그야말로 다른 역술인과 다르게 윤석열의 개인사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윤석열의 오래된 역술 신봉 인생은 대한민국 비극의 서막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역술인의 소개로 만난 김건희와의 결혼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선 국면에서 시작된 ‘무속 논란’은 단발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거 과정의 해명 공방을 지나 대통령 취임 이후까지 이어지며, 권력 주변의 비공식 조언과 공적 의사결정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가 과거부터 믿어 의심치 않아 왔던 역술의 힘이 국정 전반으로 스며든 것이다.

윤석열의 수십 년 역술 인생

논란의 출발점은 대선 캠프 시기였다. 공식 직함이 없는 인물이 캠프 주변을 오가며 정치권 인사들과 접촉했다는 보도가 이어졌고, 그 인물의 발언과 행보가 ‘무속’이라는 키워드와 결합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캠프는 개인적 인연일 뿐 선거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지만, 출입 정황과 관계망이 추가로 보도되며 비공식 조언의 범위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취임 이후에는 또 다른 계기가 등장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둘러싸고 역술인이 개입한 정황이 불거진 것. 논란의 초점은 특정 인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넘어, 공적 결정이 어떻게 설명되고 검증되는지로 옮겨갔다.

대통령 본인도 여러 차례 무속 의혹을 부인했다. 윤석열은 국정은 합리와 제도로 운영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의혹이 잦아들지 않은 배경에는 해명 방식이 있다. 비공식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뒤 사후적으로 부인하는 패턴, 일정과 인사, 의전을 둘러싼 설명의 부족은 확증 편향을 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혹은 증거가 있을 때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설명이 부족할 때도 증식한다.

<선데이저널>의 오랜 취재를 종합하면 적어도 비공식 인물들이 권력 주변을 오갔고, 그 과정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무속 논란은 특정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 인연과 공적 권력의 경계가 어떻게 관리됐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정작 무속이 어떻게 국정에 반영됐는지는 의외인 곳에서 드러났다. 바로 인사였다. 윤석열은 취임하자마자 한덕수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한 차례 한 적이 었던 그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국민대통합 인사로 포장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덕수 부부가 윤석열과 김건희 못지않게 역술 신봉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내막은 지난해 4월 16일 본지 보도에 잘 나와 있다. 당시 본지는 <한덕수 대망론의 민낯, 그의 뒤엔 김건희 있다>란 기사를 통해 윤석열 부부와 한덕수 부부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낱낱이 해부했다. 이런 인연들이 한덕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후임으로 점찍었던 것이다.

당시 정가에 파다했던 한덕수 대망론은 윤석열의 아내 김건희와 한덕수의 아내 최아영이 무속으로 통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본국 고위공직자들이나 정치권 인사들에 따르면 최아영은 김건희 이상으로 역술을 맹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건희는 미술계에서 전시 기획자로 일했으며, 최아영은 화가다.

다만 김건희는 경력위조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최아영은 서울대 미대를 나왔다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역술에 관심이 많다. 어쩌면 김건희보다 더 오랜 기간 무속에 의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2·3내란의 핵심공범이나 다름없는 한덕수 총리는 자신의 대망론에 대해 손사래를 치지만 실제로는 수면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다는 것이 국민의힘 내부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김건희 뺨치는 한덕수의 무속 신앙

당시 본지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 한덕수 관련 일화를 소개한 적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정치권에 알려진 유명한 얘기 중 하나가 한덕수 대행이 김대중 정권에서 중용된 이야기다. 전북 전주 출신의 한 권한대행은 1997년 이회창과 김대중 양쪽에서 러브콜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고 선후배에 오랜 교분이 있어 당연히 이회창이었다. 넥타이까지 매고 이회창 캠프로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부인이 소매를 잡아 주저앉혔다. 그 선택으로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당시 최아영은 평소 잘 가던 유명 점집에 가서 이회창인지 김대중인지를 물었고, 역술인이 김대중으로 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의 선택으로 그는 김대중 정부 청와대에 파견을 가게 됐고,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승승장구했다.>

대통령 부부와 국무총리의 ‘무속 논란’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본국 사회가 합리와 제도, 과학과 책임을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오랜 전제에 균열을 냈고, 정치권력과 비합리적 믿음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무속 논란은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신뢰의 언어를 바꿔놓았다. 정책 실패나 인사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그 원인을 제도·능력·책임의 문제로 분석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조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랐다. 이는 권력 비판의 방향을 바꾸었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질문은 사라지고, 대신 음모와 추측이 공론장을 점령했다. 그 결과 합리적 비판은 힘을 잃고, 사회는 점점 설명이 가능한 정치에서 의심의 정치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개인과 배우자, 즉 윤석열과 김건희는 상징적 존재가 됐다. 실제 행위의 유무와 무관하게, 이들은 ‘무속 논란이 가능한 권력’의 얼굴로 소비됐다. 이 논란은 한국 사회의 분열을 가속했다. 한쪽에서는 “근거 없는 음해”라며 반발했고, 다른 쪽에서는 “의혹을 낳은 권력 운영 방식이 문제”라고 맞섰다. 토론의 중심은 사실 검증이 아니라 진영 논리로 이동했다. 무속은 어느새 정치적 낙인이 되었고, 상대를 비합리적 존재로 규정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공론장은 더욱 거칠어졌고, 사회적 신뢰는 추가로 소모됐다. 결국 대통령 부부의 무속 논란이 한국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속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의 설명 책임에 대한 집단적 각성이다. 정치가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될수록, 무속은 사적인 믿음으로 남는다. 반대로 설명이 부족할수록, 무속은 사회적 논란이 된다. 이 논란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민주주의에서 문제는 믿음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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