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그것이 알고싶다’ 국군포로 장무환 북한 탈출기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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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에 북한 탈출해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 도움청하니…

‘도와줄 수 없다’ 거절

LA코리아타운에 거주하는 아리 김씨는 지난13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45년 만의 귀가-죽은 자의 생존 신고’라는 부제로 한 국군포로 탈출 이야기를 보면서 “계속 울면서 시청했다”면서 “어쩌면 인생이 너무 기구하다”면서 그 프로그램 사이트(https://youtu.be/74DPfi1YMKU)를 주위 친지들에게도 알렸다고 했다. 이날 방송에는 모델 이현이, 배우 장현성, 배우 고아성이 이야기 친구로 등장해 그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이날 방송으로 6.25 전쟁의 상처의 하나인 국군포로 문제가 다시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고, 당시 김대중 정부가 국군포로 송환 문제에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다시한번 조명됐다. 물론 지금의 정부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 한국전쟁 당시 북쪽으로 끌려 가는 국군포로들.

▲ 한국전쟁 당시 북쪽으로 끌려 가는 국군포로들.

지난 13일 SBS의 ‘꼬꼬무’의 이야기는 1998년 11월 18일에 방송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의 600회 특집 ‘국군포로 장무환-50일간의 북한 탈출기’를 재조명하는 프로였다. 이날 국군포로 장무환 이야기를 다룬 가운데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 직원의 대응이 다시 지탄을 받았다. 1998년 당시 탈북해 중국에 있던 국군포로 장무환씨의 절박한 도움 요청을 쌀쌀맞게 거절 했던 주중 한국대사관 여직원의 태도 때문이다. 방송에서 장씨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국군포로’라고 밝힌 뒤 “좀 도와줄 수 없는 가 해서..”라며 도움을 요청하자 대사관 여직원은 “아, 없어요”라며 퉁명스럽게 답한 뒤 전화를 끊어 버린다. 1998년 처음 방영 당시에도 네티즌들의 분노가 방영 2일만에 20만 건이 넘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북경반점’이란 아이디는 “대사관ㅋㅋㅋ 해외에서 대사관이 도움이 될꺼라는 상상은 절대 금지!! 해외생활 21년째, 규정때문에 안된다는 말 나도 많이 들었음. 규정대로만 할꺼면 AI가 업무 보면 되지 그 영사년은 왜 나와있는거야? ㅆ ㅑ ㅇ”이라고 글을 올렸으며, ‘Eallie’라는 아이디는 “ 해외 에서 영사관에게 도움을 구해도 솔직히 영사관한테 도움받지 못한다. 외국에 살고 있는데 규정 따지고 본인들 책임 아니라고 하고 전화도 피하고 그게 영사관이다.”면서 아예 해외공관은 믿을 곳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SuperJylee’라는 아이디는 “그 여자 누구냐?! 예전엔.. 그런식으로 대사관에서 국민들을 대했다고? 그것도 국군 포로였던 사람을?”이라고 했으며, ‘ams sungmon’은  “진짜 볼때마다 새롭고 놀라워 짜릿한 나라야 ㅎㅎ”라고 비꼬았는데, ‘최의현’이란 아이디도 “와! C8이다. 외교부 공무원 대사관 이 뭐하는 곳이냐 자국민 보호를 위한 장소 아닌가”라고 힐난하고 있다. ‘권도연맘39’이란 아이디는 “영상을 보고 정말 답답해서 남깁니다…장무환 씨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있으셨을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ㅠ”이라고 했으며, ‘캐딜락’이란 아이디는 “일본대사관에 도움을 요청 했었어야죠.”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rollei kim’이란 아이디는 “현재 대한민국은 중공의 노예국입니다~당연히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은 중공 공산당의 은혜로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망친 장하성이 대사로 있었던겁니다ㅋㅋㅋ  당근 국군은 대한민국의 적으로 간주하고 대한민국 국민은 절대 안도와 줍니다. 중공 시진핑에 충성을 다하고 중국몽을 함께 하는 자들의 것이죠”라며 울분을 토했다. 장무환 국군포로가 탈출한 1998년 당시 외교부는 그같은 일이 있었던 것을 인정하며 “앞으로 국군 포로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여직원은 정식 외교관이 아닌 업무 보조 직원으로 이미 퇴직한 것으로 외교부측은 밝혔으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사관녀”의 막장 드라마에 네티즌 분노

▲ 1988년 당시 장무환씨와 대사관 직원 통화

▲ 1988년 당시 장무환씨와 대사관 직원 통화

4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1998년 당시 국군포로 장무환, 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1998년 8월 포항의 한 제철소 중장비 기사로 일하는 장영욱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신상 정보를 확인하며 당신의 아버지를 데리고 있다는 의문의 전화. 그리고 이 전화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면 일주일 내로 중국으로 오라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사실 장영욱 씨의 아버지인 장무환 씨는 45년 전 이미 사망한 사람. 이에 가족들은 45년 동안 꼬박 꼬박 제사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것.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영욱 씨는 사촌 형에게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을 부탁했다. 이에 영욱 씨의 사촌 형 장영웅 씨는 자신이 장무환이라 밝히는 이에게 증거를 대라 일렀다. 그러자 전화 너머의 남자는 고향 마을과 집안 족보, 대소사 등을 쭉 다 읊었던 것. 그리고는 가족들에게 “나 좀 집으로 데려가 줘. 일주일 안으로 꼭 와야 해. 일주일이야”라고 당부했다. 가족들이 혼란스러운 사이, 장무환 씨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에게 전해졌다. 당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박종성 PD. 그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수상한 남자를 만났고, 여러 경로로 확인한 끝 에 그가 45년 전 죽은 장무환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SBS PD의 방문에 반가워 눈물까지 흘린 장무환이었다.

그는 그제야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행적을 공개했다. 지난 45년간 북한에 갇혀있다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는 것. 그는 목숨을 걸고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가족들과 아내, 아들 을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국경 마을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북한군이 수시로 검문하는 지역에서 언제 잡힐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가족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자신에게 와달라 부탁했던 것. 이에 아내와 아들은 곧바로 중국으로 날아가 그를 만났다. 생전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 어리둥절한 아들과 큰 충격을 받은 듯 한 발자국 뒤에서 관망만 하는 아내. 그리고 그의 아내는 긴 시간 침묵하다 힘겹게 입을 열어 북에 아내와 자식이 있는지 물었다. 아내는 23살에 남편을 잃고 주변에서 재혼을 권유해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다”라며 45년 동안 억척스럽게 혼자 견디어 왔기에 남편의 행적은 남다른 의미였다. 또한 북에 가족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비롯된 질문이기 도 했다. 이에 장무환은 북한에서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없었다고 했고, 이에 아내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고 살아 돌아온 남편을 살갑게 대했다.

 ‘포로로 잡혀 갔는데 ‘전사자’로 등록돼다’

그런데 장무환은 어쩌다 북한에 가게 됐던 걸까? 이야기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강릉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한 장무환. 그러나 이후 건강 문제로 8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6.25 전쟁으로 인한 재입대. 특히 그는 고향 울진에 들이닥친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인민의용군에 차출되어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몇 개월 후 허술한 감시를 틈타 금강산에서 울진 까지 걸어서 도주하고 이후 아내 순남 씨와 결혼했다. 전쟁통에 싹튼 사랑 속에 아들까지 태어나고 행복한 날만 계속될 줄 알았지만 1951년 11월 다시 입대 영장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국군에서 그를 불렀던 것.

▲ 살아 돌아온 장무환씨가 전역보고를 하고 있다.

▲ 살아 돌아온 장무환씨가 전역보고를 하고 있다.

그는 정전을 앞두고 한국 전쟁의 마지막 전투 중 최전선으로 이동하게 됐고, 전투가 끝난 후 북한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인 7월 27일 종전, 그리고 아내 순남 씨에게는 남편의 전사 통지가 전해졌다. 이에 가족들은 시신도 찾을 수 없지만 무환 씨의 묘를 만들고 45년 동안 꼬박꼬박 제사를 올리고 곁을 지켰던 것. 영화나 드라마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을 당한 장무환은 국군 포로로 45년을 북한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한 것이다. 이에 장무환은 주중 대사관에 연락을 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한숨과 도와줄 수 없다는 것뿐. 믿기 힘든 조국의 거절에 무환 씨와 가족들은 절망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탈출할 생각만 했고, 택시로 기차역으로 이동해 기차를 타고 항구가 있는 도시로 가서 배에 올라 인천으로 가는 방법을 생각했다. 첫 번째 관문은 은신처를 벗어나는 것. 그런데 갑자기 은신처의 집주인이 장무환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1만 달러(당시 한화 1400만 원의 가치)를 내놓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고 가족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약 2천불 돈을 지불 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승용차를 처음 타 본 장무환은 멀미에 고통스러워했고, 기차역에서는 혹시라도 공안에 들킬라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나 기차에 무사히 오른 장무환 일행. 장무환은 18시간이라는 장거리 여행에 그간 북한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영화 드라마 보다 더 기구한 운명의 삶

국군 포로가 되어 북한에 온 그가 끌려간 곳은 바로 아오지 탄광. 그는 60세까지 탄광에서 노역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탄광촌의 생활은 상상보다 더 참혹했다. 겨울 기온은 기본이 영하 30도, 옷 한 벌로 사계절을 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어 쥐를 잡아먹는 병사도 있고 산에서 아무거나 뜯어먹다가 급사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갱도가 무너져 사망하는 일도 다반사 였으나 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그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 그는 “분명 우릴 데리러 오겠지, 곧 올 거야. 전쟁도 끝났다니 포로 교환을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포로 생활 1년이 지난 어느 날 포로 교환이 이미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 당시 북한은 국군 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며 포로 교환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무환과 같은 포로는 최소가 3만, 많으면 6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자아냈다. 국군 포로로 북한에서 노역을 한 이들은 “조국이 있다는 걸 항상 생각하고 부모 형제 만나겠다고 그런 결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국가적으로 해결하겠지 하고 기다리다 보니 세월을 다 보냈다”라며 지나간 시간들에 억울함을 토로했다. 또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에도 국군 포로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없어 크게 서운 했음을 고백했다. 국군 포로는 “나라를 위해 6.25 전쟁 3년 동안 목숨 걸고 싸웠는데 하늘이 무너지 는 것 같지”라며 괴로워했다. 장무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앞으로 10년이라도 재미나게 잘 살아봅시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장무환은 “단 하루를 살아도 재밌게 살면 되지”라며 행복해질 날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인천으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필요한 여권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여권을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각 부처를 돌아다닌 아들과 조카. 정부의 대답은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무환은 북한 주민이므로 그의 입국에 정부가 도움을 주는 것은 자칫하면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며 가족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일렀다. 이에 좌절한 가족들. 그런데 의문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남서울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는 것. 이에 가족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호텔로 갔고, 그곳에서 의문의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장무환의 가족들에게 은밀하게 노란 봉투 하나를 건네고 사라졌다. 노란 봉투에 싸인 것은 바로 장무환의 여권. 정말 극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지만 가족들이나 취재진들은 여전히 그 남자의 정체 는 알 수 없다고 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의문의 남자가 주고간 ‘장무환 여권’으로..”

여권을 들고 중국으로 간 조카, 그는 삼촌과 함께 배에 올랐다. 출국 심사를 하는 순간 직원은 장무환의 여권에 입국 도장이 없는 것을 의심스러워했다. 이에 장무환의 조카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배 째라 식으로 왜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너희가 찍지 않은 것이다 라며 버텼고 이에 실랑이가 길어졌다. 길어지는 실랑이에 다른 손님들은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직원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장무환의 여권에 출국 허가 도장을 찍어줬다. 그렇게 북한에서 탈 줄 한지 50여 일만, 한국을 떠난 지 45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는 입국 이후 신분 복원을 위한 절차를 진행했다. 또한 면역식을 통해 45년간의 군 생활 을 마무리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던 장무환.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아들을 불러 자신이 한 가지 거짓말을 했음을 고백했다. 사실 그는 북한에 5명의 자녀가 있고 손주까지 보았다는 것. 그는 결혼 을 원치 않았으나 북한에서 정책적으로 강제 결혼을 시켰던 것이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랐다. 장무환의 아내는 남편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고 그의 행복은 그가 남편과 함께 한 사진들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아 행복하다는 아내는 장무환과 14년을 함께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차에서 했던 약속을 지킨 셈. 그리고 이후 장무환도 건강이 악화되며 2015년 세상을 떠났다. 특히 장무환은 건강이 좋아지지 않으며 꿈에서 자꾸 어딜 갔다 왔다고 했다. 북에 있는 동안 가족을 그리워했던 그는 사실 남쪽에 있는 동안에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며 미안해하고 그리워 했던 것. 일평생을 이산가족으로 살다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아들은 아버지의 묘비에 남북한의 가족 들 이름을 모두 새기며 더 이상 그가 외롭지 않기를 빌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국군 포로 중 조국으로 돌아온 이는 총 81명이지만 이들 중 조국의 도움을 받은 이는 한 명도 없고 2010년 이후에는 더 이상 탈출한 국군 포로는 없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 냈다. (출처: SBS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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