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용봉 박사 6.25 무공훈장과 71년의 남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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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에서 살아남아 수출산업의 역군이 되기까지…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LA한인사회의 원로 정용봉 박사(94) 가 71년전 6·25전쟁 중에 결정된 무공훈장을 71년이 지나 뒤늦게 가슴에 달자 전쟁터에서 사라진 전우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이 흘러도 무공훈장은 녹슬지 않고 밝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지난 7월27일 LA총영사 관저에서 개최 된 무공훈장 전수식에서 국악 예술인 심현정(인강판소리 아카데미원장)이 구성지게 부르는 <전우 야 잘자라>를 함께 따라 부르던 정 박사는 마지막 소절“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 에서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부르지를 못했다. 노병의 눈앞에 70여년전 그 전투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모습이 70여년만에 눈앞에 어른 거렸기 때문이다. LA한인 원로 노병에게 전해진 무공 훈장 소식은 국내외로 훈훈한 화제를 낳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 6·25 당시 정용봉 소위

▲ 6·25 당시 정용봉 소위

LA코리아타운에서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전하는 ‘토요풍류’(KTYPR)의 유선모 선생은 “세월은 흘러도 훈장은 남는다”는 말로 소화했다. 간결한 구절속에 71년의 세월을 담았다. 한국에서 국군포로송환 운동을 벌이는 물망초 재단의 박선영 이사장은 “훈장 수여 소식을 보도한 영상을 보니 눈물 겹도록 아픈 전쟁의 역사”라면서 “국군포로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훈장 주인공인 정용봉 박사와 전쟁 중 같은 부대였던 8사단 16 연대 소속 전우인 하와이주 6·25 참전 용사회 장관수 부회장은 “늦게나마 무공훈장이 전수되어 너무나 기쁘다”면서 “전우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지나기를 바랄 뿐”이라고 전해왔다. 육군종합학교 동료 전우인 황규복 선생도 “청춘을 전장터에서 보냈는데 이제 백발의 전우를보니 시간의 흐름이 야속할 뿐”이라는 소회를 밝혔다. 정용봉 회장이 설립한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에서 인턴 활동을 한 후 최근 가주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노현정씨는 “정 박사님의 활동은 우리 젊은 세대가 이어 받아 가야하는 역사”라면서 “정 박사님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우리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남가주 예비역기독군인회장 김회창 목사는 “한인사회의 원로 정 박사의 무공훈장 소식은 우리 모든 동포에게 경사이며 기쁜 일”이라고 했다. 6·25참전용사 정용봉 박사는 1927년 경남 김해군 진영에서 태어나 1958년 미국에 유학해 몬타나 대, UCLA등을 거처 서든 일리노이대에서 명예박사 학위(경제학)를 받았다. 정 회장은 1961년부터 LA에 거주 하면서 한인으론 처음으로 가발 사업에 진출해 한국 수출산업에 크게 기여했는데 현재 까지도 윌셔가에 ‘His & Her Hair Goods’이라는 가발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3년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당시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당시 로즈 퍼레이드에 한국 이민역사를 표현한 꽃차를 출품해 수상도 하는 등 미국인들에게 한인 이민역사를 알렸다. 그는 2004년 LA에서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설립해 미의회에서 청문회 등을 통해 6·25 전쟁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장기간 억류 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고 UN과 국제형사 법정 (ICC)에 북한 공산정권을 최초로 고발했다. 2009년에는 국군포로송환운동 활동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그는 2015년에 한국전쟁과 국군포로문제를 담은 저서 <메아리 없는 종소리>(부제: ‘우리는 왜 국군포로송환 운동을 벌였는가)를 펴냈으며, 2019년에 이를 영문판 <The Bell Tolls, No Echo>(번역 John Cha)를 간행했다.

“LA코리아타운 이민 역사의 산증인”

그는 한인타운 금융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 나라은행 (뱅크 오브 호프의 전신)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인은행들의 대형화에 기초를 닦는 등 한인사회에서 많은 활동으로 LA코리아타운 이민 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박경재 LA총영사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6·25 전쟁 정전협정 제68주년을 계기로 7월 27일 관저에서 이종돈 보훈담당 영사의 사회로 진행한 전수식에서 6·25 참전 유공자 정용봉 박사에게 71년이 지난 무공훈장을 전수하였다. 이어 박 총영사는 정용봉 박사 무공훈장 수여를 기념하는 오찬회를 베풀고 다시 감사를 표했다. 이자리에서 정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와 박경재 총영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6·25 전쟁터에서의 고뇌를 피력하면서 당시 포로가 된 8만 여 명의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정의로운 해결책이 수행 되기를 소망했다.

▲ 71년만에 무공훈장을 전수 받은 정용봉 박사(왼편)가 박경재 총영사의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 71년만에 무공훈장을 전수 받은 정용봉 박사(왼편)가 박경재 총영사의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한편 이날 국민의례로 시작된 전수식에서 심현정 국악인은 애국가를 선창했으며, 이종돈 영사는 경과 보고를 통해 이날의 무공훈장은 6·25 전쟁 당시 육군종합학교 제8기생으로 임관, 육군 중대장 (제8사단 제16연대 제1대대 제4중대)으로 양구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당시 정용봉 소위에 대한 무공훈장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용봉 소위는 당시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1계급 특진과 무공훈장이 결정 되었지만, 미국 유학 길에 오르면서 훈장을 수여 받지 못하고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밝혔다.박경재 총영사는 이날 축사를 통해 “제68주년 정전협정 기념일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여 늦게나마 무공훈장을 전수하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고, “마침 정전기념일에 한동안 단절됐던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복원되었고, 이를 계기로 남북 대화 및 북미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잘 진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축사 순서에서 박창규 한미은행 전 이사장은 “정용봉 박사님은 6·25 전쟁 때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서 오히려 살아남았던,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살아오신 분”이라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또한 김재권 재향군인회 미서부지장은 향군을 대표하여 “정 박사님 같은 참전용사분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면서 그분들의 조국사랑의 정신을 후세들이 이어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무공훈장의 주인공인 정용봉 박사는 답사를 통해 “6·25전쟁 때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하였고, “전쟁 중 약 8만여명에 달하는 국군포로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가슴 아프 다.”고 하면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해 국군포로들이 송환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 1950년 8월 정용봉 박사는 당시 전시사관학교로 불린 육군종합학교 제 8기생으로 입교해 그해 10월에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해 강원도에 주둔한 육군 제8사단에 배속됐다. 그 제8사단 16연대 1대대 4중대(중화기 중대)에서 당시 중대장이 전사한 바람에 정 소위가 이를 대행하고 있었다.

육군종합학교 졸업과 동시 임관 후 전투 참가

원래 육군 8사단은 원래 유엔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하다시피 했다. 재편성된 8사단은 장교도, 사병도 대부분 신참으로 채워졌다. 부대원들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1950년 12월 26일, 국군 제8사단은 양구 지역 650 고지를 확보하기위해 국군 제 8사단 예하 16연대와 21연대가 투입되었다. 그 고지는 철원 왼쪽에 있는 쌍둥이 고지였다. 그때는 이미 북한 인민군이 아군이 올라가는 고지 바로 앞의 그와 비슷한 높이의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제16연대는 정용봉 소위가 선두가 되어 인솔하였다. 16연대 중화기중대는 연이어진 전투에서 당초 166명인 중대원이 고작 32명이 된 일반 소총 소대의 36명 정원보다 적은 병력으로 이미 중화기 중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 였다. 중대는 고지의 8부 능선에서 우측으로 (동해 쪽으로) 내려가 상 기슭과 소양강이 맞닺는 낮은 지역에서 현재 위치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에 진을 치고 적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12월 26일)밤 11시쯤 되어 적의 포탄이 날라 오기 시작하면서 곧 양쪽 진영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의 중기관총의 유효사거리는 약 500 야드 정도로 이미 아군과 적의 거리가 500 야드 이내의 유효사거리 권내에서 접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조금 지나 아군 쪽 고지에서 인민군이 “만세” 하는 함성들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 무공훈장

▲ 무공훈장

아군의 고지가 적에게 박살 난 모양이었다. 정용봉 중대는 속수 무책이었다. 상대편 고지까지는 둥근 능선이라 사격해봐야 아무 소용 없고 또한 1개 소총소대의 벙력도 안되는 정용봉 중대 인원 으로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화약지고 불 속으로 뛰어 드는 격이 었다.정 중대장은 아예 아군이 후퇴하면 그 뒤를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패배한 아군을 추격하는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정 중대 앞으로 지나가면서 그 중 한 명이 눈속에 파묻쳐 있는 아군 쪽으로 따발총을 한번 갈기고는 그대로 앞을 지나가버렸다. 그러니 아군(16연대)이 동료 아군 쪽으로 후퇴하지 않고 사태가 급하니 낭떠러지가 있는 산을 바로 뚸어 내려 아군 앞쪽으로 지나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후퇴한 셈이었다. 정 중대장 부대원들은 이제 고스란히 적의 후방에 남은 셈이다. 정 중대장은 선임하사(중사)를 불러 “부하들을 후퇴시켜라. 한 사람씩 가라고 하라” 하고 정 중대장은 전원이 후퇴한 뒤 현장에 혹시 부상자가 남아 있는지를 점검한 후에 폭이 약 6미터쯤 되는 얼름판이 된 소양강을 건너 도로 쪽으로 뛰어 가는데, 그때 정 중대장은 왼쪽 다리가 너무 불편해 잘 뛸 수가 없었다. (긴장한 바람에 왼 왼발의 부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사력을 다해 뛰면서 조금 가는데, 갑자기 인민군 한 명이 바짝 따라 오면서 장총을 쏘면서 “동무 서!, 동무 서!”하며 따라왔다. 정 중대장은 그때 지니고 있던 칼빈 소총을 한 손으로 뒤를 돌아 보면서 쏘면서 도망쳤으나, 서로의 거리는 점점 좁아져 가는데 이번엔 또 한 다른 북한군이 더 나타나 두 명이 따라왔다. 정 중대장은 이제는 ‘꼼짝 없어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뒤로 보고 쏜 내 카빈 총이 “찰각”하면서 탄창이 빈 것을 알렸다. 그의 주머니에는 많은 총알이 있었지마는 그것을 탄창에 격발시킬 촌각의 시간이 없지 않는가? ‘자살도 못하고 꼼작 없이 포로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포로가 될 순간에 어머니 모습 떠올라 기적이

그러자 웬일인지 여태껏 바짝 따라오던 두 명의 인민군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는 이내 슬금 슬금 뒤걸음을 치고 있었다. 정 중대장은 ‘이상하다’ 생각하여 앞쪽을 보니 저 멀리서 아군(제1대대)이 나타났다. 아군은 정 중대장 부대원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으니 정 중대를 찾기 위해 나섰던 것 이었다. 그때가 새벽 4시 정도였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만일 그때 아군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타났다면 그는 꼼짝 없이 생포 되었을 것이다. 구조를 받은 정 중대장은 왼쪽 다리 부상 등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여려 병사들에 의해 긴급 8사단 야전 병원으로 후송 되었으나 그 곳에서도 치료 할 수 없어 그대로 후송되어 당시 마산으로 이전한 ‘수도 육군 병원’에서 명예제대 할 때까지 약 1년반 치료를 받았다. 그때 입원 중인 정 중대장에게 무공훈장이 결정 됐다는 특명과 약장은 수여 받았지마는 그는 별로 가뻐하지도 않았다. 그의 부하 들을 다 잃은 그에 게 훈장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정용봉 박사는 그후 1958년에 미국 유학 오면서 무공훈장을 찾지도 않고 왔는데, 2010년경에 당시 재향군인회 미서부지회 김봉건 회장이 한국 방문길에 육군본부에 갈 일이 있다며 정 박사에게 “육군본부(육본)에 무슨 부탁이 없느냐”고 묻기에 “육군종합학교 때 부터 가장 친했던 전우 한 사람인 권덕명, 그 사람의 소식을 좀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LA에 돌아 온 김봉건 회장은 정 박사가 문의한 권덕명 전우는 제 8사단 소속, 소령으로 만 기록 되어있고 그 후의 기록은 전무라는 사실만 전해주면서 그 대신 육본에서 정 박사 에게 결정된 무공훈장이 그대로 육본에 있다며 정용봉 중위에게 전달해 주기를 바란다며 김봉건 회장에게 부탁해 정 박사에게 전했다. 하지만 정 박사는 그 훈장을 평생 한번도 착용해 보지 못했다. 이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경재 총영사는 예우를 갖추어 한국전쟁 종전기념일인 지난7월 27일을 기해서 무공훈장을 정용봉 박사에게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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