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독점] 다시 주목받는 25년 전 이맹희 특별 인터뷰

이 뉴스를 공유하기



















 ▲ 이맹희 삼성家 장남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의 회장의 맏형인 이맹희씨가 이 회장을 상대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명 상속주식을 넘겨달라”며 소송을 냈다. 이맹희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이 회장 명의로 변경했다”면서 “삼성생명 주식 825만주와 이에 따른 배당금 등을 지급하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이번 소송가액은 7138억원으로 변호사 10명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일부만 반환 청구된 삼성전자 주식 규모는 57만주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소송이 이어질 경우 소송가액은 3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소송을 내면서 재계는 물론 사회전반에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맹희씨는 과연 누구인가에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맹희씨에게는 삼성왕국의 ‘비운의 황태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남인 그는 한때 그룹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제왕자리를 놓고 벌인 형제들의 ‘피 튀기는’ 전쟁에서 밀려나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배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본지는 지난 1986년부터 1년 동안 끈질기게 그의 행적을 추적해 독점 인터뷰한 기사를 1987년 9월 13일자 196호부터 198호까지 3주간에 걸쳐 독점 보도한 바 있다. 본지는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 그 어떤 언론에서도 실을 수 없었던 이병철 창업주와 한국비료밀수사건, 청와대 투서사건, 삼성왕권을 놓고 벌인 형제들의 전쟁 등 한국 최대의 재벌가 삼성의 비사(秘史)를 단독 공개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와 가족들로부터 제거당해 낭인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몰락한 황태자’ 이맹희씨의 비참했던 세월과 ‘왕권 다툼’을 그의 생생한 고백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이맹희 독점인터뷰’ 기사는 국내외 어느 언론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특종으로, 현재 소송건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맹희씨의 25년전 독점 인터뷰 기사를 다시 세상에 공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한국 최고의 재벌로 자타가 공인하는 삼성그룹 총수 이병철. 그는 부자지간의 혈육의 정마저 외면한 냉혹한 기업인인가?


이십대 청년시절 정미소업부터 시작, 양조업, 제당·제분업 등 주로 소비성 사업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해 오늘날 한국은 물론 세계 50대 기업안에 랭크되어 있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현재의 재벌총수가 되기까지 이병철은 이른바 삼분(三紛)파동, 사카린 밀수사건 등 국내외에서 여러 불명예스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켜가며 돈벌이에 집착, 막대한 치부 끝에 오늘의 삼성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돈벌이에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아내, 자식 등 가족과도 혈연을 끊는 비정한 기업인이었음이 밝혀졌다.


십수년째 부인 박두을 여사와 사실상 별거, 현재 ‘서울 용산구 한남동 70번지’에서 따로 살고 있는 이병철의 호화주택에는 가족들의 출입마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특히 장남 이맹희씨의 경우 부친의 집은 물론 부친의 근처에도 나타나지 못한 지가 12년이 넘어가고 있다. 심지어 이맹희씨는 매년 2월 12일에 열리는 부친 이병철의 생일축하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불운한 삶을 살고 있다.


이병철은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듯 부자지간의 정을 끊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자식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생활비조차 지급하지 않는 등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본보 취재팀은 최근 들어 급격하게 나돌기 시작한 이병철 회장의 중병설과 삼성의 새 후계자설 등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파헤치기 위해 1년여에 걸친 끈질긴 추적 끝에 장남 이맹희씨를 비롯, 삼성그룹을 둘러싼 많은 인사들을 접촉한 결과 위의 소문에 대한 내막과 진상을 확연히 밝힐 수 있었다.












 ▲본지 1987년 9월 13일자 196호에 실린 이맹희 독점 인터뷰 기사. 1년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그는 본지에 12년간의 통한의 유배생활과 삼성가의 왕권다툼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병철 회장은 6·25전쟁 직후 한국에서 필수적 생활필수품이었던 설탕, 밀가루 등 주로 소비재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 즉 ‘돈병철’이란 소리를 공공연하게 듣던 1966년, 이른바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사회의 여론은 이 사건에 대해 “밀수재벌 삼성”이라 빗발치는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고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씨를 비롯한 삼성의 몇몇 간부들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한국 제일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며 연일 사건을 대서특필해서 보도했고 국회 역시 철저수사를 당국에 촉구했다.


사태가 악화의 절정을 이루던 1966년 5월, 이병철은 기자회견을 갖고 “건설중인 한국비료를 완성해 국가에 헌납하는 동시에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수사는 계속되었고 검찰 당국은 한국 비료의 이창희 상무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및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 기소했으며, 성상영 부사장은 불구속 기소,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으로 최종 수사결과를 매듭지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아들 창희씨가 아버지 이병철의 속죄양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비등했다. 결국 이병철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 아들까지 감옥에 보내는 비정한 부친임을 사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의 이런 무자비한 냉혹성은 첫출발에 불과했다. 그 이후 이병철은 차남은 물론 장남 맹희씨를 버린 나머지 최근 들어 그의 4남5녀 자식들 모두(일본 첩소생 태휘씨만 제외)로부터 스스로 소외당하는 운명을 자초했다.


한편 이 한비사건의 해결을 위해 장남 맹희씨가 막후에서 수습활동을 벌였던 것은 지금까지 한국 매스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상 당시의 맹희씨는 삼성그룹 차원에서 일선에 나서 수습 총지휘를 했었다 한다. 이점 맹희씨는 “나는 조속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장기영 부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 성미가 팔팔하고 급한 김부장이 재떨이를 던지면 나도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삼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결국 이맹희씨는 이 사건으로 부친 이병철로부터 경영대권을 승계받고 삼성 총수직에 오르게 된다.


제일제당, 안국화재, 중앙매스컴 부사장 등의 자리를 맡아 삼성의 경영을 총괄하게 된 맹희씨의 당시 나이는 40대 초반, 경북중고교를 거쳐 일본 동경농대와 미 테네시대학원을 나온 맹희씨는 삼성 경영을 맡자마자 그때까지 아버지 이 회장이 다져놓은 경영체제에 새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맹희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비사건의 파문은 웬만큼 가라앉았지만 그 여파는 내가 경영을 맡았을 다시까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실추된 삼성의 이미지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고 밝혔다.


여기서 그는 “한비사건의 오욕을 우리가 씻자”는 기치를 내걸고 ‘삼성재건 5인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삼성 경영체제에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이병철의 측근 창업공신들은 강한 반발을 보였고, 자기들의 자리 안전 확보를 위해 반격에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한번은 맹희씨가 홍진기씨(전 중앙일보 회장, 86년 작고)를 불러다 무릎을 꿇게 하는 등의 사태도 일어났고 이에 악감정을 품은 홍진기가 그 뒤에 이맹희씨의 실각에 이은 유배생활에 복수차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맹희 제거에는 홍씨를 비롯 현 삼성비서실 소병해 실장 등도 적극 가담했고, 심지어는 맹희씨를 한국사회에서 완전히 고립, 매장시키기 위해 납치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맹희를 폐인으로 만들기 위해 실행되었던 이 납치극이 벌어진 것은 공교롭게도 이병철 회장의 중병설과 더불어 새 후계자설이 나도는 가운데 벌어졌는데 납치장소로서 부산의 모처가 미리 준비되었고 하수인으로 무술 고단자인 김상조, 부산 백병원의 이모과장 등이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납치극은 이맹희씨의 사력을 다한 기지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삼성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이맹희씨는 총수직 승계 6개월 만에 도중하차 당하고 말았다. 한비사건의 여파로 일시 뒷전으로 물러났던 이병철회장이 아들을 미어내고 다시 그룹총수로 롤백한 것이다. 이때부터 맹희씬느 아버지로부터 눈 밖에 난 자식이 되어 보이지 않는 냉대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룹총수로 롤백하던 당시 이병철 회장은 그 복귀 사정에 대해 “그룹에 혼란이 오고 본인도 체념해서”라고 그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밝힌 것과는 달리 맹희씨는 “어떻게든 한비사건의 오명을 씻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과정에서 의욕이 앞섰던 것이 잘못되었을 뿐, 부친의 뜻에 의해 ‘체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맹희씨는 “내가 삼성을 위해 일했을 때는 솔직히 내 개인의 치부를 위해 욕심을 부리거나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삼성재건5인위원회’가 이루고자 했던 일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결국 아버님께선 당시 내가 맡고 있던 5개 기업 중 2~3개만 맡으라고 권하셨는데 결국 내 스스로 물러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맹희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삼성을 떠난 맹희씨는 그뒤 본의 아니게 아버지로부터 결정적으로 불신을 당하게 된 이른바 ‘청와대 투서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병철의 자서전은 물론 삼성의 어떤 공식문서에도 일체 거론되지 않고 있는 이 투서 사건의 비밀폭로는 처음 차남 창희씨에 의해 발단되었다.


1966년 한비사건으로 구속 되었다가 이듬해인 1967년 감옥에서 풀려나온 창희씨는 아버지 이회장의 애정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3남인 건희씨에게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중앙매스컴의 평이사였던 건희씨는 장인 홍진기씨의 적극 비호 아래서 이른바 이병철-홍진기-이건희로 이어지는 ‘3두 마차’의 주자가 되어 있었고, 이런 그룹의 흐름을 안 창희씨는 이를 “삼성 이씨에 대한 역성(易姓)혁명”으로 간주, 이를 바로잡는다는 명분하에 투서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동생인 3남 건희는 물론 아버지 이병철 회장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 투서가 청와대로 날아들자 사건의 여파는 삼성그룹은 물론 한국 재계사회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이사건은 곧바로 이병철 회장의 친권에 대한 강력한 반발 내지는 도전으로 풀이되는 충격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이 ‘청와대 투서사건’의 내용과 자세한 내막은 다음호에 밝히기로 하고, 차남이 일으킨 이 사건에 왜 장남 맹희씨까지 휘말리게 되었는지 그 궁금증부터 풀어본다.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제보한 어느 취재원은 ‘창희씨는 일을 벌이기 직전, 형 맹희씨를 자기집으로 불러서 그 사실을 알렸다. 깜짝 놀란 맹희씨가 아우를 간곡하게 말렸으나 창희씨는 막무가내였다. 맹희씨는 화가 난 나머지 집 밖으로 나와 창희씨의 벤츠 승용차를 두들겨 박살내버렸다“고 전했다.


이 사건이 터진 뒤 최근 당시를 회상하며 맹희씨는 “다 지나간 일 누구를 원망해 본적도 없다.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 부친께선 나의 무고함을 아셨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그 투서사건으로 창희씨는 물론 맹희씨까지도 아버지 이명철 회장으로부터 ‘억울하게’ 파문을 당한다. 그룹내의 모든 직책이 박탈된 것은 물론 아버지의 주변에 일체 나타날 수 없는 중벌을 당한 것이다.


파문 당한 아들 중 창희씨는 그뒤 도미 후 다시 귀국한 1773년 ‘마그네틱 미디어 코리아’란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 생산업체를 창업, 현재의 ‘새한미디어’로 개칭 작년 9월 기업공개를 한바 있으며 이로 인해 부친과는 일단 화해에 성공했다. 그러나 반면에 장남 맹희씨는 투서사건 이후 지금까지 부친의 생일축하연에는 물론 일체의 생활비 지급까지 끊긴 채 불우한 나날을 살아와야 했다.





맹희씨는 “삼성을 떠난 뒤 미국 콜럼비아대와 일본 동경농대에 1년씩 유학했다가 귀국한 뒤로는 줄곧 책이나 보며 이곳저곳 떠돌며 다녔다”고 밝혔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지난 12년간 부산, 대구, 동해안의 외진 바닷가 영해 등지를 전전해온 한국 제일의 재벌 장남인 맹희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는 “얼마 전에 크레딧 카드를 신청했다가 내 앞으로 된 재산권이 없어 발급을 거절당했다”고 했고, “생활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에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굴지의 재벌 맏아들로서 웃지 못할 비참한 일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돈 1천원이 없어 버스차장에게 망신당한 적도 있었으며,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가 겪어야 했던 지난 십여년 유배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다음호에 밝히기로 한다. 단지 그가 살았던 지난 한 맺힌 세월은 누구가의 모함처럼 ‘주유천하’가 아닌 대의를 품은 ‘와신상담’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그룹은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이상한 변수 요인이 발생하고 있다. 작년 홍진기 중앙매스컴 회장의 갑작스런 작고 이후, 이병철 회장의 건강 악화설, 교통사고를 당한 이건희 부회장의 약물 중독설 등이 한꺼번에 겹친데다 최근 들어 일본 소실 태생의 이태휘(35세)씨의 막강한 그룹내 위치 부상과 장남, 차남의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작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이태휘 이사는 삼성에 입성하자마자 짧은 시간 내에 그룹내에서 막강한 실력을 행사, 비서실 상무의 자격으로 삼성 계열사 사장들로부터도 브리핑을 받으며 퇴짜를 놓는 등 그룹 간부들의 애를 먹이고 있으며, 부친의 총애를 업고 최근에는 제일제당의 대주주가 되면서 삼성그룹의 막강한 새 실력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게이오대학을 졸업, 두뇌가 명석한 편으로 알려진 이태휘 이사는 현재 서울 남산에 있는 1백평 짜리 외국인 아파트에서 일본인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삼성 직원이 여러명 파견돼 살림을 돕1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그의 등장으로 이병철 일가, 즉 직계자녀들 사이에선 마땅치 않은 시선들이 오가고 있고 최근에는 실제 큰 어머니격인 박두을 여사도 날벼락 같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세상에 알려질까 쉬쉬하는 이 사실은 다음호에 자세히 밝히기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나 삼성의 제왕인 이병철 회장의 중병설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또 교통사고 이후 회복을 이유로 그룹 경영 일선에서 벗어나 있는 이건희 부회장의 교통사고 사건의 진상과 그 후유증의 실체는 무엇인지, 또 일본 태생 이태휘 이사의 등장과 더불어 이병철 회장의 유고시 최대의 재벌그룹 삼성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기타 그 상세한 내막은 다음호에 밝히기로 한다.


<본보는 이 ‘삼성시리즈’를 통하여 이맹희씨의 실각 및 납치사건, 후계자 이건희씨의 마약중독 및 교통사고의 진상, 엘리베이터걸 임신소동, 홍진기씨의 사망, 후계자을 둘러싼 형제들간의 무서운 음모와 간교, 일본첩의 아들 이태휘의 등장들을 적나라하게 연재한다.>

















 




 




1953년 5월 8일 일본에서 태어난 이태휘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다. 이 회장은 일본에 들르면 당시 대학에 다니던 맹희 창희 건희 등은 찾지 않고 소식 태생의 아들 태휘만을 불러 관심을 나타냈다. 태휘 역시 머리가 좋고 붙임성있게 아버지 이회장을 따짐으로써 더더욱 이회장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병철 회장의 일본 현지처이자 태휘의 생모는 장남 맹희씨와 비슷한 연배로 이회장이 상당한 재산을 떼어줘서 큰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다.


게이오 대학을 나온 직후 아버지 이회장의 부름을 받았으나 태휘는 처음 이를 거절했는데 그를 총애한 이회장이 적극적으로 삼성에 불러들였다. 태휘씨는 삼성에 입성하자마자 그룹안에 힘의 진공(眞空)부분이 있음을 캐치했다. 즉 후계자로 지목된 이건희 부회장이 공식석상에 일체 나오지 않는 등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고 이부회장의 공식석상에 정재은(5녀 명희씨의 부근) 사장이 대신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머리좋은 태휘씨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그뒤의 삼성그룹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태휘 이사가 등장하자 얼마 안 있어 삼성그룹은 그룹내 요직에 대한 대폭인사 이동이 단행되었다. 그중 가장 큰 이변으로 나타난 것이 정재은 씨의 삼성물산 사장으로의 인사이동이었다.


그전까지 삼성전자 경영을 맡아 삼성전자의 성공적 경영에 큰 공적을 이뤄 이회장의 신임은 물론 같은 전자업계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이회장의 사위 정재은 씨는 인사이동 이후로는 어찌된 일인지 그룹내에서의 위치가 뒷무대로 밀려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로 정재은 사장은 태휘씨가 오고나서는 건희 부회장의 공식석상에 대리 참석하는 일이 없어졌으며 그뒤 갑자기 온다간다 말없이 한달여 동안 출근조차 하지 않아 그룹 내외에선 그의 신상에 대해서 무슨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정사장은 시골에서 지내며 많은 생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한편 정사장의 부인이자 이회장의 막내딸로 가족 중 가장 부친과 허물없는 사이였던 명희씨(신세계백화점 상무) 역시 이런 일이 있고나서 아버지 이회장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 일설에 의하면, 부친 이회장과 친하던 명희씨가 왜 부친과 멀어졌는가 하는 이유로, 삼성의 모 계열사 주식을 둘러싸고 명희씨가 이를 부친에게 요구하자 이회장은 이를 들어주기는커녕 “너는 신세계백화점을 줬는데 왜 또 달라고 그러느냐”고 처음부터 노여움을 보였다고도 한다.


가장 가까웠다는 막내딸마저 부친과 사이가 소원해지자 정작 가장으로서 이병철 회장은 건희와 태휘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남4녀 자식들로부터 ‘비정한 아버지’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 란 소리를 듣게 된다.


실제로 이병철 회장은 요즘 한남동 사저에서 무척 고독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소 자식들에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유교적 덕목을 가르쳐왔던 아버지로서 정작 사업으로는 평천하 하였는지는 몰라도 제가(濟家) 만큼은 되지 않은 셈이었다고 하겠다.


한남동 저택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이회장의 고독한 고뇌의 마음속을 간파한 사람이 태휘씨였다. 그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골프를 치러갈 때도, 무슨 일을 할때도 늘 아버지 이회장의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 해서 태휘씨는 그렇지 않아도 다른 자식들과 소원해진 이회장으로부터 절대적인 총애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막내아들 태휘이사를 어느 정도 아끼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음의 사건으로 입증된다.


한국에 온 태휘씨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박두을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태휘씨의 전화를 받은 박여사는 “지금 몸이 불편하니 다음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거절하고 자리에 누워 있는 박여사에게 또 다시 전화가 왔다. 태휘씨는 지금 곧 떠나겠다고 재촉해서 말했다. 이에 참다 못한 박여사가 “몸이 불편하다는데 예의도 없이 왜 자꾸 오겠다는 거냐”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그러자 태휘씨는 ‘장충동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 이회장에게 고자질했고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병철 회장은 즉시 차를 타고 장충동집으로 달려갔다.


아내 박여사를 일으켜 세운 남편 이회장은 진노가 극도에 달해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화장대를 박살내고 TV를 집어던져 부셔버리는 등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남편 이회장의 난폭한 행동을 피해 박여사는 다급한 나머지 신발까지 벗어 들고 맨발로 집 바깥으로 달아나야 했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의 걸음을 장충동집의 23살 난 가정부가 못 쫓아갈 정도였다. 감히 누구도 못 말리는 상황에서 이회장의 실력 행사가 계속되자 이를 보다 못한 가정부가 나서서 그를 말렸다.


그 일이 있고나서 이회장은 이유야 어떻든 자기 마누라를 그렇게 난리쳤으니 자식들 보기도 민망한 노릇임을 스스로 깨달았는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불러다 앉혀놓고 요령 부들의 설명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교는 박여사 역시 마찬가지로 들어야 했다. 그것도 남편이 아니라 당신의 3남 건희로부터였다. 다음은 장남 맹희씨의 증언이다.


『어머니께서 그 일을 당하시고 몸이 더 편찮았습니다. 그런데 동생 건희가 찾아왔어요. 생전에 장충동 어머니께 잘 오는 법이 없던 건희가 웬일로 왔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다고 해요.(그때 맹희씨는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건희는 다짜고짜 어머니를 붙들고 설교하기 시작했답니다. 몸이 불편해 잘 앉지도 못하시는 어머니를 자식이 되어서 설교를 하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지…. 무슨 이야긴가 하면 “어머니가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집안 망신시킨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알아듣게 간단히 말하고 돌아가면 되었을 텐데 5시간을 어머니를 붙들고 횡설수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소리를 해 노인을 괴롭힌 겁니다. 세상에 우리 팔실 넘은 어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맹희씨의 계속되는 말에 의하면 태휘씨가 오고나서 장충동에 생활비 지급도 끊겼다면서 , 아버지 이회장이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엄명까지 한 터여서 더욱 어머니의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이태휘 이사는 서울 남산의 1백평짜리 초호화 아파트에서 일본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데 한국생활이 아직 서툴다는 이유로 삼성 직원 2명이 파견되어 생활을 돕고 있다고 한다.


이태휘 이사가 앞으로도 계속 우리나라에 살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는 일본으로 되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삼성그룹 후계자 승계와도 관련이 있어 그룹 관계자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그는 얼마 전부터 한국국적 회복수속을 밟고 있어 그의 거취는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태휘이사가 국적 회복 수속을 밟고 있는 것은, 다른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이회장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부친 이회장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


따라서 현재한국 국내법상 주식취득과 재산 상속이 금지되어 있어 이 문제를 확정짓고 나야 태휘씨가 부친 이회장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태휘씨는 제일제당 대주주가 됨으로써 위의 상속문제를 일축, 부친 이회장의 총애가 얼마만큼 깊은 것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삼성의 후계자설에 대한 또 다른 변수 요인은 바로 장남 맹희씨와 차남 창희씨에 대한 것이다. 차남 창희씨는 최근 자신이 이룩한 기업 ‘새한미디어’를 기업공개하고 공기업으로서의 대외 이미지를 강화하는 등 재기를 꿈꾸고 있다.


또한 ‘새한미디어’의 성공으로 상당한 사업가적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비록 ‘투서 사건’을 일으켜 눈 밖에 난 자식이지만 자식의 성공을 좋게 본 이회장은 한때 소병해 비서실장을 새한미디어의 감사로 선임하는 등 관심을 나타내 주기도 했다.


그후 이회장이 차남 창희씨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거나 계열 기업을 방문하는 일이 적지 않게 눈에 띄기도 했다. 삼성그룹 정례 사장단회의에 그룹에서 어떤 직책도 없는 창희씨가 참석, 눈길을 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차남 창희씨는 부친 이회장과의 화해에 성공한 것이었다.


재계 일각에선 이런 창희씨를 놓고 한때는 ‘삼성 후계체제’와 관련, 변수가 생기지 않았느냐 하는 그럴듯한 소문들이 재계에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이런 창희씨의 재등장과 관련해 “삼성 경영체제에 변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희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삼성 경영체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한때 창희씨의 이런 등장은 태휘씨가 삼성에 입성하면서 쑥 들어가게 되었다. 삼성에 들어온 태휘씨의 막강한 그룹내 파워는 이회장 다음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창희씨는 존재는 묻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 경영측면에서 창희씨가 아일랜드에 합작공장을 건설하고 새한미디어를 기업공개하는 등 이미지를 강화시키자, 삼성그룹 현 체제내에서 더 이상의 팽창을 우려, 새한미디어를 삼성그룹에 합병시키려고 하자 창희씨가 이를 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런 소문은 최근 들어서 “창희씨의 삼성 출입이 금지되었다”라고 까지 파다하게 퍼져있다. 즉 창희씨가 동생의 그룹 후계자 승계에 불만을 품고 동생 건희씨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퍼뜨렸기 때문에 “삼성 출입이 금지되었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 故 이병철 회장

한편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사후 후계자 승계 문제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있다는 사람으로 장남 이맹희씨를 꼽고 있다. 사실 삼성그룹 이병철가의 지계 자녀들 중에서 장남 맹희씨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도 드물다고 하겠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투서 사건’ 이후 아버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지금까지 십수년을 ‘버린 자식’이 되어 대재벌의 맏아들로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맹희씨였다.


“평생을 서자(庶子)보다도 더 굴욕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다 지나간 일, 누구를 원망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최고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때 삼성을 맡아 경영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맹희씨의 이 말은 불과 6개월 만에 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황태자로서 지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뼈가 있는 시사로도 들린다. 이는 주위에서 스케일이 크고 보스 기질이 강하다고 알려진 맹희씨의 최근 움직임과도 무관하지 않는 데서 그 까닭을 찾아볼 수 있다.


맹희씨는 비록 삼성의 뒷무대로 사라졌지만 그의 많은 친구들은 현재 한국 정계 재계를 움직이는 실력자로 등장했다.


우선 맹희씨의 경북중, 경북고 동기생(32) 친구부터 살펴보자. 경북고 32회 동기들 중에는 현재 한국의 정계 관계 재계의 강자들이 수두룩하다.


노태우 민정당 총재, 정호용 국방장관 등 제5공화국 주도세력이 그의 동기생이며 친구간이다. 그 외에도 김윤환 대통령비서실장, 권오기 동아일보 주필, 정춘택 산업은행총재, 구본호 KIET 원장, 전상호 삼성데이터시스템 사장 등 여러 분야에서 중추급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평소 맹희씨의 성격과 대인관계로 미루어 짐작하면 어떤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이 유고시, 이들 장남, 차남이 어떤 생각과 움직임으로 나설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물론 삼성 비서실 측에서는 이미 법률적으로 ‘이건희 부회장 승계’가 결정지어졌다는 점에서 별다른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수인 이별철 회장 자신은 자꾸만 ‘건희 승계’를 재천명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인 자기가 살아있는 지금도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는 판국이니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의 일단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회장의 유고시 후계자문제를 둘러싼 해결의 핵심을 홍진기 회장의 작고로 새로 영입된 신현확 삼성물산회장과 이병철가(家)의 전가족이 참여하는 가족회의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으로 관측되어진다. 이 가족회의에서 결정된 사람, 즉 가족회의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고 지지를 받는 사람이 삼성그룹에도 큰 영향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가족회의 등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부친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이미 분배된 삼성의 각 기업체를 가진 자녀들에 의해 삼성그룹은 공중분해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주력기업을 둘러싼 상속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임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결국 주력기업인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헤게모니를 누가 쥘 것인가에 따라서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결정되어진다고 보겠다.


가장(家長)인 이병철 회장으로서는 이 같은 자식들의 재산다툼이 극히 못마땅할 것이나 이는 한편으로 가장으로서 그만큼 자식 관리에 실패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평생을 온갖 풍상을 겪으며 때로 부정축재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사업에 몰두, 오늘의 대재벌 기업인이 된 그이지만 ‘돈’만으로는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 제일의 재벌그룹이자 거부인 이병철 회장에 대한 평가 역시 앞서의 이런 관점에서 조명하고 또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재조명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지난해 KBS 신년 특집프로로 방영된 이병철 회장과 일본 경제단체연합회 이나야마 오시히로 회장의 특별대담을 통해 이병철회장이 기업인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밝힌 다음의 말을 들어보며 대미(大尾)를 장식하기로 한다.


“새해에는 내 나이 만 일흔 여섯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공연히 마음 졸이고 번민했던 것이 특히 후회스럽게 느껴진다. 요즘의 세태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점점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해에는 사람들이 반목보다는 이해를, 가시 돋친 언쟁보다는 훈훈한 대화를 나누는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서로가 동시대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전환하는 새로운 행진을 시작했으면 한다. 이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나의 소망이다.”


대담을 하는 그 시간, 부친 이회장으로부터 버림받고 십여년 동안이나 떠도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장남 맹희씨의 눈에 비친 TV 속의 이회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