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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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에 이은 연속 6주>

반탁 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 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 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 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 1일 임시 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 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 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 대회를 열었으며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 반탁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갔고 그 가운데 백범은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백범은 1월 4일 좌파를 향해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 정부를 좌파가 참여한 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이어 임시 정부를 대신하고 정식 정부를 수립할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를 위하여 김원봉 김성숙 조소앙 조완구 장건상을 대외 교섭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여기에서 통일 전선을 추구하면서도 당시 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던 백범 노선을 살필 수 있다.

임시 정부의 법통을 전제한 모임에 좌파가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기란 힘들었으나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마당이어서 1월 7일 한민당·국민당·인민당·공산당의 4당회의가, 8일에는 신한민족당이 참가한 5당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무산되자 백범은 20일부터 5일간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할 것을 합의하고 이승만·김구·김규식을 중심한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키로 결의하였다. 이승만 합류에 임시 정부의 혁신계 인물인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이 탈퇴하여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멸체가 되었다.

2월 1일과 2일에 그러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군정청에서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위원으로 그들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는 사실상 민주의원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 좌파에서도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니 좌우익 조직이 구조적으로 정착해 갔다.
백범 김구의 인품은 소박하면서도 다양성을 포용할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사상은 다원주의에 근거하면서도 자주적 민족주의를 추구했고, 독립 운동의 경력으로 보면 시종 임시 정부를 지킨 유일한 지도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대표적 독립 운동자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인격과 사상과 경륜이 뛰어난 백범이지만 미소의 대립이 냉전 체제로 치달아 남북의 국토 분단으로 전이됨에 따라 정국도 좌우 구도로 고착되어 가는 것을 약소 민족의 지도자로서 극복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소 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리던 3월 20일부터 5월 25일까지 또 미군정의 알선으로 5월 25일부터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백범은 그것을 관망이라도 하듯 자체 정비에 나섰다.

4월 18일에 국민당(안재홍)과 신한민족당(권동진)을 흡수하여 한국독립당을 확대 개편하고 [백범일지]도 손질하기 시작하였다. 5월 18일부터 반탁 운동의 맹장 조소앙 신익희를 앞세워 민립대학 설립을 돕는 한편 독립 운동에서 신세진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에 투신한 이래 연고지를 찾아 은혜를 보답하는 여정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백범다운 행각이기도 했지만 70을 넘은 노경이기도 했다. 그러던 6월 3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발언이 들려와 그후부터 이승만과 반탁 운동을 함께 전개하면서도 노선을 달리했다.
즉 백범의 반탁은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난 2월 8일에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 협의회와 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했지만 6월 29일에는 이승만이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며 독주하는 등 이승만과의 노선 차이가 노골화되자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6월 30일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는 일이 백범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백범이 1931년에 만든 한인애국단의 작전을 완수하고 순국한 의열 동지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한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해를 봉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일을 끝마친 9월부터 조선 공산당이 지하 투쟁으로 전환하여 정국은 더욱 긴장된 가운데 대구 10.1사건이 터졌다. 한편 국대안 반대문제로 학원조차 시끄러웠고 11월 23일에는 좌파 3당이 통합하여 남로당이 결성된 숨가쁜 일이 연이어 일어나 백범으로서 이승만이 남한 단정을 발설하고 김규식이 좌우 합작 운동에 나서 3인 3색처럼 나타난 것을 우파의 분열로 보일까봐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해 들어서면서 더 참을 수 없어 1947년 1월 24일에는 백범을 중심으로 한 반탁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백범이 새삼스럽게 반탁투쟁위원회를 가결성한 것은 그에 앞서 1월 11일 하지 군정사령관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과의 왕복 문서를 공개한데 대한 조직적인 응수였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7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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