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 나라은행 이사장은 행장 목치는 “저승사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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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의 찬바람이 남가주를 몰아치고 있다. “북가주 실리콘 밸리의 한국인 대부”로 불리는 이종문(78) 나라은행 이사장이 코리아타운의 은행가를 휘젖고 있다. 나라은행의 최대주주라는 세도와 돈의 위력을 과시하듯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은행장의 목을 가차없이 내리치고 있다. 국내에서 이종문 이사장은 미국에서 벤처기업가로 거부가 되어 “백만장자 자선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나라은행 직원들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최근의 나라은행 파동은 이종문 이사장을 우두머리로 박기서, 백제순 등 일부 이사들이 한패가 되어 양호 행장을 포함해 직원들을 달달 볶았다고 한다. 은행가에서는 이종문 이사장이 나라은행에서 한 때 자신과 죽이 맞은 벤자민 홍 신임 새한은행장과 과거 나라은행과 아시아나은행의 합병처럼 짝짜꿍으로 이번에도 두 은행을 합병해 거액의 이익을 챙기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과연 은행가의 “두 노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특별취재반


















이종문 이사장이 이번 양호 행장의 목을 친 것처럼 행장 갈아치우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1년 8월 당시 북가주 아시아나은행에 이사장인 이종문씨는 LA에서 영입한 박광순 행장(현 미래은행장)을 8개월만에 해임했다. 당시 박광순 행장은 이종문 이사장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그 후 이종문 이사장은 자신의 아시아나은행과 나라은행와 합병한 뒤 나라 행장이 된 홍승훈 행장(현 아이비은행장)을 3개월만에 해고시켜 나라은행 사상 최단명 행장 기록을 남기게 했다. 5년 동안에 3명의 행장 목을 친 것이다.
양호 행장은 나라은행이 일부러 행장을 물색하기 위해 에이전트에게 돈을 들여 전세계를 대상으로 물색해 영입한 행장이었다. 이종문 이사장을 선두로 이사회가 승인했다. 그렇다면 양호 행장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이사회가 뒷받침을 해야하는데, 이종문 이사장과 박기서 이사와 백제순 이사 등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양호 행장이 사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행장 보너스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 은행 직원은 귀띔했다.
양호 행장이 선정될 때도 진통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벤자민 홍 임시행장은 애지중지 해 온 민 김 전무를 강력하게 밀어 부쳤다. 여기에 박기서 이사와 현재는 물러난 스티브 김 이사, 백제선 이사들이 가세했다. 토마스 정 이사, 김용환 이사와 존 박 이사는 양호 행장을 밀었다. 이종문 이사장은 우유부단한 입장으로 양측 눈치만 살피다가 할 수 없이 양호 행장을 선택했다고 한다.


박기서는 최소 투자이사


이종문 이사장과 함께 양호 행장을 들볶은 박기서 이사는 실지로 많은 돈을 은행에 투자하지 않은 인물인데 벤자민 홍 전행장이 영입해 온 이사이다. 그는 이사들 중에서 가장 적은 투자를 하면서도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이사들의 투자분을 보면 이종문(217만주), 김용환(70만주), 존 박(42만주), 백제선(10만주), 박기서(9만주)이사 순으로 그가 꼴지이다. 현재 건축설계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한미박물관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여기서도 직원들을 들볶아 말이 많았던 인물이다. 박기서 이사와 백제선 이사는 당초 나라은행 소유지분이 없었으나 그동안 받은 스탁옵션이 12만주로 늘어나 16일 종가기준으로 200여만달러의 자산가치를 소유하게됐다.












사실 양호 행장은 나라은행에 취임하면서 전임 벤자민 홍 행장이 저질른 회계상 오류를 시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여기에 벤자민 홍의 최측근 민 김 전무 등을 포함한 전위대 직원들의 비협조도 큰 짐이 되었다. 은행의 발전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려 해도 이종문 이사장을 포함 박기서 이사와 백제순 이사 등의 조직적인 방해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하여 존 박 이사와 김용환 이사 등은 “이사회가 너무 경영진을 간섭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여 이종문 이사장 일파 이사들과 대립각이 세워지게 됐다. 나라의 외부 컨설팅 그룹측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이들 2명의 이사 자질을 문제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질문제에는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다고 했다. 한인은행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언어 문제는 개인의 험담으로까지 비춰지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종문 이사장은 이사회 참석시 은행비용으로 최고급 호텔과 1등석 비행기를 이용해왔다고 한다. 행장 목을 치는 것이 다반사인 이종문 이사장은 동포사회를 보는 눈도 달랐다. 지난 2003년 나라은행과 아시아나 은행의 합병계획이 발표됐을 때 북가주 한인사회 일각에서 “아시아나 은행이 한인사회와의 ‘30만주 환원’약속을 져버린 배신행위”이라며 “법적 대응도 강구하겠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은행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동포사회가 단체소송을 검토하기는 당시로는 처음이다.
아시아나 은행 활성화를 위해 참여했던 북가주 한인사회의 일부 고문들과 이사들은 이종문 이사장이 북가주 한인사회와의 약속을 위반해 일방적인 합병을 추진했다며 은행과 이사장을 상대로 단체소송을 검토했었다. 컴퓨터 분야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종문 당시 아시아나 은행 이사장은 실리콘밸리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이 되면서 지역 한인사회참여에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동포사회를 얕보는 이종문


그러다가 이종문 이사장은 주주들의 내분으로 바람잘 날이 없는 아시아나 은행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그는 이사장이 되면서 300만 달러를 은행에 투자하고 말썽 많은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해 은행 정상화에 나름대로 노력했다. 또 한인사회에 대하여 ‘은행에서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종문 이사장은 동포사회에 대하여 ‘30만주 환원(300만 달러어치)’을 공약하면서 동포사회가 은행을 키워 주도록 호소했다. 한인사회와의 유대와 은행 활성화를 위해 동포사회 유지들을 은행고문이나 이사로 영입했다.











이에 동포사회에서도 은행 키우기에 나섰다. 신규 구좌 개설 등으로 ‘아시아나 은행 활성화’를 도왔다. 당시 북가주 동포사회는 이종문 이사장이 아시아나 은행에 동참한 것에 대해 크게 고무됐다. 우선 무엇보다 재력이나 신용면에서 미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때 아시아나 은행은 좋은 실적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동포사회는 은행의 이익에서 사회환원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행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종문 이사장은 자신의 힘으로는 은행 경영이 한계에 다 달았음을 실감했다. 주위에서도 “은행에서 손을 떼는 것이 낫다”라는 권유를 많이 받게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느닷없이 ‘나라은행과의 합병’이란 소식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아시아나 은행의 고문 중의 한 사람은 “아시아나 은행은 북가주 동포사회의 자존심이 걸린 금융기관이다. 우리들은 은행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뛰었는데 우리와는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은행을 팔아 버린 행위는 배신이다”면서 “특히 이종문 이사장은 대주주로서 30만주 사회환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나 은행 초창기에 이사로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 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약 1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쳤는데 하루 아침에 은행을 팔아 버리다니 무책임하다”면서 “은행 경영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 나고 새로 구조조정을 하여 은행을 살려야 한다”고 밝혔다.
일부 고문들과 이사들의 법적소송 움직임에 대해 지역의 한 변호사는 고문들의 주장대로 아시아나 은행이 고문제도를 도입하면서 은행의 실적이 양호하면 30만주를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면 이번 케이스는 사기혐의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을 내 놓았다고 했다.
당시 합병을 두고 아시아나 은행의 일부 주주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 대해 이종문 이사장측은 “자칫하면 휴지조각이 돼 버릴 아시아나 주식을 합병으로 오히려 주가상승을 시켰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일부 한인들도 ‘30만주 한인사회 환원’이라는 공약에 대해서는 은행이 발전적 확장으로 이종문 이사장이 계속 나라은행의 최고실력자가 되기 때문에 기대해보자는 입장도 보였다. 하지만 이같은 북가주 동포들의 염원이 실현됐는지는 의심스럽다.


합병의 미스테리


지금까지도 당시 왜 나라은행과 이종문 이사장이 주도하는 아시아나은행이 합병했는지는 미스테리에 가깝다. 당시 나라은행과 아시아나 은행의 합병은 토마스 정 이사장, 벤자민 홍 행장과 아시아나 은행의 이종문 이사장과의 개인적 친분관계에 의한 모종의 결탁이 있었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나돌면서 각본에 의한 시나리오로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나라은행이 아시아나 은행을 인수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우선 당시 양 은행의 자산을 분석해 보아도 나라은행은 10억 1507만 달러인데 반해 아시아나 은행은 나라은행의 24분의 1 정도인 4,337만 달러에 불과했고, 대출면에서도 나라은행이 7억5,934만 달러이고 아시아나 은행은 $2,702만 달러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 아시아나 은행은 부실대출이 많고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마당에 장부가(BOOK VALUE)에 1.3배의 프리미엄을 주고 산다는 것부터가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었다.
당시 합병은 납득이 가지 않은 면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아시아나 은행이 점포를 갖고 있는 지역에 나라은행 지점도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시아나 지점이 돈벌이를 잘하고 있었다면 문제가 다르다. 나라은행의 지점 망 확장의 일환도 아니다. 나라은행의 지점이 없는 지역에 아시아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점 망 확장의 일환으로 합병 이유도 될 수 있다.
당시 북가주 지역에 한인계 은행은 모두 6개에다 지점이 9개가 있었다. 나라은행, 아시아나 은행, 퍼시픽유니언뱅크, 윌셔은행, 한미신용조합과 한국신용조합 등이다. 이 중 나라은행과 아시아나 은행은 공교롭게도 2개 지점이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지점은 불과 한 블록 사이로 가까이 있으며 또다른 한 지점은 오클랜드시에 서로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 벤자민 홍 행장은 “합병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종문 아시아나은행 이사장과 벤자민 홍 행장은 합병을 밀어부쳤다. 합병 후 최대 수혜자는 벤자민 홍 행장과 이종문 이사장이었다.
나라은행과 아시아나 은행이 합병계획을 발표하자 이 소식은 미 전국일간지 USA투데이를 포함해 LA비즈니스 저널 등 경제관련 매체에 보도됐다. 이들 보도에 따르면 벤자민 홍 행장이 실질적으로 최고경영자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후 한인 금융계에서는 벤자민 홍 행장이 “욕심을 많이 부리고 있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라은행 내부에서 조차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대치되고 있다. 일부 직원들은 현재 은행이 상한가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선장이 도중하차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그러나 한때 건강문제로 은퇴설까지 비추던 홍 행장이 나라은행의 실질적 의결기관인 이사회의 장이 되어 총체적으로 은행의 경영과 집행까지 관여하는 파워를 지니고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합병과정에서 자신을 후원하던 토마스 정 이사장을 교묘하게 2선으로 후퇴시키고 자신이 전면으로 부상했다. 이종문 이사장도 합병된 나라은행 이사장으로 취임해 실질적인 최고주주로 부상했다. 북가주의 조그만 은행 이사장에서 미주한인사회의 제2의 은행의 총수가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종문은 누구인가?


이종문 나라은행 이사장은 은행가이기 보다는 컴퓨터 베처기업인 암벡스(AmBex) 회장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미주한인들에게는 1994년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아미술관이 재정난에 빠지자 개인 기부로는 최고액인 1500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미국 언론과 한국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중앙대 법대를 졸업하고 종근당제약 전무까지 지낸 뒤 1970년 도미해 1982년 54세의 나이에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 시스템스’를 설립해 애플컴퓨터와 IBM의 호환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실리콘밸리의 성공신화를 창조해 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당시 50대 중반 나이로 컴퓨터에 대한 특별한 지식도 없이 실리콘 밸리의 하이테크 벤처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처절한 실패, 배신, 좌절, 절망을 거듭한 끝에 “원숭이 열 마리 중 아홉 마리는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실리콘 밸리의 경쟁에서 유태인 인도인 중국인 두뇌를 따돌리고 사업의 대반전을 가져왔을 때가 60대 후반이었다. 그의 재산은 엄청났다.
이같은 이 회장은 1995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 전부를 출연해 ‘이종문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장학, 문화 지원 등 사회사업 활동을 활발히 해 오고 있다. 당시 이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평가액은 4000만 달러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문재단’이 지원하는 돈은 한인 학생 장학금이나 ‘북한 사람들에게 세계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에도 사용되고 있다고 재단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그는 지난해 뉴욕의 아시아 소사이어티로부터 ‘올해의 인물’ 로 선정 수상했으며, 그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재단일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시상식이 끝난 뒤 동포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 전 재산을 공익재단이나 사회에 환원하고 아내와 함께 보통 시민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자녀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재단 일에도 관여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번 돈의 사회환원에 신념이 강했고 그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재산의 사회환원을 광범위하게 실천해왔다. 그의 기부 활동을 보면, 돈이 벌려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미주한인사회의 일각에서는 그의 사회환원에는 미주동포사회가 가려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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