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책임 묻지 않아
김정일은 잔인무도한 그답지 않게 《봉화진료소》 이락빈 소장은 죄가 없다는 상식 밖의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주체혁명위업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끼친’ 김일성의 뜻밖의 급사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은 죽은 김일성의 피가 채 식기도전인 8월 중순 《모든 인민들이 김일성에 대한 슬픔을 혁명적 락관으로 전환하여 명절같은 분위기로 살며 일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죽은 김일성을 억지로 ‘잊지 못해’(물론 김정일의 지시로!) 일도 안하고 마냥 울기만 하고 있는 주민들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 김정일의 이런 조치로해서 북한의 중앙기관은 물론 각계층 주민들이나 중고등 학생들까지도 뒤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을 것》이라고 《쉬! 쉬!》하면서 말들을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해서 북한노동당 고위간부들과 호위관계자들만이 알고 있는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한다. 김일성이 죽기 전인 1994년 5월초 어느날 김일성은 평양시 모란봉구역의 호위총국을 현지 지도하게 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현지도착시간을 앞두고 의례히 호위국청사구내 에 대한 3차에 걸친 대대적인 검색이 진행되었는데 1차, 2차 검색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폭발물이 김일성 도착직전에 진행한 제3차 검색시에 발견되었다. 결국 김일성은 호위 국청사로 향하던 도중 급보를 받고 되돌아갔다. 그런데 김일성에 대한 이런 엄중한 테러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위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그 죄는 고스란히 호위국 청사주변의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던 재일동포들에게로 돌아갔다. 사실 그들은 북새거리 건설당시 막대한 일본 돈을 김정일에게 바치고 그 아파트에 들어 살게 된 사람들이였다. 김정일은 그런 재일귀국 동포들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 하루아침에 광복거리에 있는 호위국아파트에 내몰고 그곳에서 살던 호위국 가족들은 재일귀국동포들이 살던 아파트에 끌어들이도록 조치하였다.
중학생도 암살설 알아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에 대한 암살음모가 이미 김일성이 급사하기 몇 달 전부터 김일성의 가장 가까이에서 암암리에 준비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은 이미 70년대에 《충신도 곁에 있고 간신도 곁에 있다》는 ‘명언’같지도 않는 명언을 즐겨 쓰면서 ‘음모군, 간신배’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을 해왔는데, 김일성은 ‘애석하게도’ 그 자신이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칭송하던 김정일이라는 ‘효자’의 손에 죽은 것이다. 그러면 왜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겠는가.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우선 그가 인민생활에 대해 김일성에게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거짓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그 자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1980년 초부터 북한경제가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1989년부터는 지방 주민들에게 여러 달째 식량배급을 주지 못해 주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수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철저히 김일성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김정일의 거짓보고 덕에 김일성은 죽기 직전까지 주민들이 ‘수령님의 은덕으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식석상에 나올 때마다 《김정일 조직비서가 모든 국사를 맡아서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고 듣기에도 거북한 자랑을 계속 해댔다고 한다. 그런 김일성이 1994년 7월초 묘향산 특각에 머무르던 어느날 저녁 차를 타고 향산군 일대를 돌아보다가 묘향산 일대 지하갱도건설에 동원된 인민군 군인들이 다해진 군복을 걸치고 길게 늘어져서 무질서하게 주둔지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그날 밤 김일성은 수행 부관들에게 그 광경에 대해 《어떤 군인은 상의를 입지 않고, 또 어떤 군인은 바지를 벗어 던지고, 삽자루를 질질 끌며 길게 늘어져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꼭 거지떼 같았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김일성은 ‘우리인민의 행복한 생활’에 대해 직접 알아보기 위해 김정일과 상의도 없이 자기의 수행 부관들을 ‘암행어사’격으로 평안북도와 함경도 일대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1994년 7월7일 오후에야 묘향산 특각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가져온 기막힌 소식들은 김일성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당시 김일성의 놀라움과 책임추궁은 7일 오후에 진행되었던 경제부문 일군회의에서 한 그의 ‘교시’들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은 김정일 의심
그때 김일성은 쌀이 없어서 인민군 군인들에게 통 강냉이를 삶아서 먹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나는 빨찌산 때에도 대원들에게 통 강냉이를 먹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어려운 속에서도 통 강냉이를 꼭 갈아서 강냉이 밥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먹였다.》고 추궁하였으며, 지방 주민들이 식량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방 인민들이 여러 달째 식량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나는 믿지 못하겠으니 다시 구체적으로 료해하라》고 다그쳐 댔다. 그리고 천이 없어서 인민군 군인들에게 군복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보고 받고는 회의에 참가한 경공업담당 부총리 김복신을 불러 세우고 《무슨 대책이 없는가?》고 안타깝게 물어보았다. 김정일 같은 것을 믿고 《국내사업은 다 그에게 맡기고 나는 대외사업만 하면서 조직비서를 돕겠다》고 했던 김일성은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김정일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을 다소나마 알아 차렸으며, 그것을 간파한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7월7일 밤 다시 한번 큰 충격을 가하여 심장발작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설이 떠돌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다른 하나의 이유는 ‘남조선 혁명의 승승장구’ 에 대한 김정일의 기막힌 거짓말 때문이었다. 김일성 사후 모든 강연들에서 선전되었던 교양자료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김일성은 급사하기 전에 8월초 서울에서 진행하게 되어 있는 북남 최고위급회담 준비 때문에 기쁨 속에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서울에 가게 되면 서울 시민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수령님, 남조선 인민들은 지금 수령님께서 서울에 개선하시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수령님께서 서울에 나가시면 남조선 인민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백두산 호랑이가 서울에 왔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통일은 다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수령님의 위대성에 의한 남조선 혁명의 승승장구’ 거짓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김정일은 이렇게 제 아버지를 철저히 속였다.김정일이 그런 남조선에 대해, 북남 최고위급 회담이 코앞에 다가온 마당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으니 김일성을 살려둘 수 있었겠는가. 김정일은 ‘충신, 효자’ 행세를 하면서 김일성을 《귀머거리에 소경》으로 만들고, 주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조국통일의 구성’이 되려고 한 김일성의 ‘평생념원’을 우롱한 대역죄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낳아 키워주고 나라의 모든 권력과 부를 대물림 해주고, 팔십 평생 온갖 기만술책과 철권통치로 노예처럼 부려먹은 주민까지도 아들(김정일)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김일성을 암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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