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정운찬 총리 지명 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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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개각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내민 가장 깜짝 카드는 역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국무총리 지명이다. 정운찬 내정자는 충청권 출신에다 그 간 범야권 인사로 꼽혀왔단 점에서 야권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이 대통령이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정국에서 벗어나 지지율이 상승국면에 들어선 시점에서 ‘코드’가 맞지 않는 정 내정자를 총리에 지명하는 ‘모험’을 한 배경에 정치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 후보자는 ‘불도저’ 이 대통령의 약점을 커버해줄 화합형 인물이라는 점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영남발 일방독주’를 끊어줄 충청 출신 주자라는 점에서 여권 핵심부의 기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그리 살갑지 않다. 당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딱 1년 정도 쓸 연탄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일 뿐이다”라며 그의 부상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현 정권이 한때 야권 대권주자의 대안으로 꼽혔던 정 후보자를 구중심처에 데려온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장차 그를 ‘대마’의 초석으로 삼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사석’으로 쓰고 도태시킬 것인가. 정운찬 내정자 지명에 숨어있는 MB의 진의를 추적해봤다.
                                                                                <한국지사 = 박희민 기자>



개각 이전부터 정치권에서는 “청와대가 부쩍 자신감을 회복했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몇몇 여론조사에서 40%를 넘긴 것으로 나온 지지율 때문만도 아니었다. 정국 주도권 자체가 청와대로 넘어왔다는 판단이 바닥에 깔렸다. 개각 발표 이틀 전, 한나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중도 실용 노선이 힘을 받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을 수용하면서 분노가 누그러졌다. 경제 성적표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도 선거구제 개편, 지자체 통합 등 청와대가 주도할 수밖에 없는 카드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집권 이후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했던 청와대가 이제야 판 자체를 짜는 자리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박형준 홍보기획관을 정무수석에 임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청와대 내에서 중도 실용 노선을 강력히 추진해왔다고 알려진 박 수석은 초선 경력이 전부인데도 정무수석으로 전진 배치됐다. 중도 실용 노선에 계속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이 언급했던 정치개혁을 앞장서 추진해보라는 뜻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청와대 조직 개편을 보면, MB가 지금 흐름에 만족하는 것 같다”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그래서일까. 정치권에서는 개각 며칠 전까지도 “이번 개각은 ‘재미’는 없을 거다”라는 말을 적잖이 들을 수 있었다. 총리는 실무형보다는 상징적인 화합형 인사를, 정치인이 입각한다고 해도 ‘정치인’보다는 ‘전문성’에 방점을 찍는 인사가 나올 거라는 얘기였다. 또 다른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은 정부 개각 사흘 전인 8월31일에 나온 청와대 조직개편을 예로 들며 “원래 분위기 좋을 때 인사는 재미없는 거다. 될 사람이 자연스레 되는 거니까. 인사로 ‘깜짝쇼’를 하는 건 안 좋을 때 얘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급박해진 것은 개각 하루 전이었다. “새로 임명될 총리가 차기 대권 주자군에 들 수 있다”라는 말이 청와대발로 돌기 시작하면서다. ‘상징적’ 차원에서 거론되던 인사들의 이름이 쑥 들어가고 ‘박근혜 총리설’ ‘김문수 총리설’로 정치권은 한바탕 홍역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대권 주자군 총리’라는 표현은 정운찬 교수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던 셈이다.




이회창 시나리오


“생각보다 ‘센 카드’가 나오기는 했지만, 분위기 반전용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부담이 있는 정운찬 카드를 청와대가 선뜻 빼들었다는 것이야말로 자신감의 방증이다.” 개각 발표 직후, 친이 직계로 분류되는 수도권 한나라당 의원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무슨 의미일까.
그간 청와대와 각을 세워온 정운찬 교수를 총리로 앉히면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그림은 이른바 ‘이회창 시나리오’다. 문민정부 시절 참신성을 앞세워 총리로 임명된 이회창 현 자유선진당 총재는, 이후 지지율 하락을 겪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입지를 다졌다. 대통령에 항거하다 경질당하는 모양새까지 갖추며 단숨에 대권 주자로 뛰어올랐다. ‘대선 주자 이회창’의 성장과 문민정부의 레임덕이 맞물렸다. “만약 MB 정부가 여론의 외면을 받는다면 정 내정자도 원래 색깔대로 MB와 각을 세우려 할 테고, 그러면 조기 레임덕을 피하기 힘들다. 그럴 위험은 관리할 수 있다고 보니까 청와대도 정운찬 카드를 빼든 것 아니겠나.” 적어도 정운찬 내정자가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에는, 청와대가 원심력보다 구심력을 더 강하게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는 얘기다.
이회창 시나리오’라는 잠재적 위험부담만 논외로 하면, 정운찬 카드는 청와대에 여러 모로 매력적이다. 우선 지지율 반등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중도 실용 색채를 더 선명히 할 수 있다. 지역 구도로 봐도 ‘전략적 요충지’인 충청권에 ‘선물’을 안겨준 셈이 됐다. 충청권은 내년 6월 지자체 선거의 격전지인 데다가, 이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내면 박근혜 전 대표를 영남권 지역 맹주로 고립시킬 수 있다는 계산까지 더해졌다.
무엇보다도 청와대에 매력적인 것은, 정운찬 카드 한 장으로 ‘일타삼피’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세 곳의 직접적·잠재적 경쟁 정파가 정운찬 카드 한 장으로 모두 타격을 입었다.
직접적 ‘피해자’인 민주당은 거의 울상이다. 금융계 출신으로 정 내정자와 친밀한 관계인 한 의원은 “통화는 했는데, 차마 왜 갔느냐고는 못 물어보고 그냥 소신껏 하라고만 했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민주당 의원들은 9월3일 열린 당 워크숍 현장에서 정 교수의 총리 내정 소식을 들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고 한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토론 시간에 공개 발언은 없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의원들끼리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충청권 의원들은 타격이 클 것이라고 걱정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허탈한 민주당


누가 봐도 ‘우리 선수’라고 생각했던 정운찬 카드를 여권에 넘겨준 탓이다. 실제로 2007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일각에서 정 내정자 영입을 위해 공을 들였고,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하자는 목소리도 최근까지 끊이지 않았다. 각종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에서도 정 내정자는 어김없이 ‘범야권 후보군’으로 분류됐다. 민주당의 한 참모는 “우리가 못나서 저쪽(여권)으로 갔는데 누굴 탓하겠나”라며 허탈해했다. 여권의 구심력과 민주당의 원심력이 맞물려서 당분간 속수무책이라는 좌절감이 읽힌다.
대차대조표상 최대 손실을 본 곳은 민주당이라는 시각이 많지만, 정작 속이 더 쓰린 것은 선진당 이회창 총재다. 심대평 전 대표의 사퇴를 둘러싼 청와대와의 공방에서 이미 적잖이 상처를 입었던 차에 충청 출신의 정운찬 카드로 뒤통수까지 맞으며 망신을 당한 탓이다.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은 “이 총재가 그동안 ‘경박한 MB’와 대비되는 ‘대쪽’ 이미지로 버텨온 건데, 심대평 대표 건을 처리하면서 고집불통에다 뒷거래나 시도하는 이미지로 비쳐 상처를 많이 입었다. 거기에 난데없이 정운찬 카드가 등장하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라고 말했다. 원칙주의자라는 명분도, 충청권 대표주자라는 실리도 모두 놓친 셈이다. 이 총재가 대선 주자로 떠오를 때의 방식인 ‘참신한 인사의 총리 발탁’이라는 카드에 이번에는 이 총재 자신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친박계는 겉으로는 표정관리 중이지만 내심 당황하는 기색이다. MB의 조기 레임덕과 박근혜 전 대표로의 ‘쏠림현상’을 기본 시나리오로 그려뒀던 친박계로서는, 박 전 대표에 대항할 유력 주자의 부상이 반가울 리 없다. ‘현상유지’라는 친박계의 대전제가 흔들린다. 수적으로 다수지만 구심점이 없어서 지지부진하던 친이계에 ‘대표선수감’이 생기면 그 파괴력을 예측하기 힘들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신경 쓰이는 변수임이 틀림없다.
한 부산 지역 친박계 의원은 “한나라당에 유력 후보가 등장해 서로 경쟁하면 좋은 일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운찬 교수 주위 얘기를 들어보면 리더 타입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더라. 리더십은 부족한 반면 ‘대장’을 하고 싶어하는 스타일이라고 들었다. 그런 거라면 MJ(정몽준 최고위원)랑 별 차이 없는 스타일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은근한 견제 심리가 읽힌다.
청와대 처지에서야 정 내정자와의 정면충돌만 없도록 관리한다면 꽃놀이패나 다름없는 수지만, ‘정치인 정운찬’의 선택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예측 가능한 길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이회창의 길’이다. 야권과 개혁 성향 인사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시나리오지만 당장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 청와대는 ‘변수 관리’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고, 정 내정자로서도 총리로 지명되는 와중에 벌써 ‘출구전략’부터 고민한다는 것도 그럴 법한 그림으로 보기는 힘들다.
둘째는 상생의 길이다. 정 내정자가 청와대와 교감 속에 중도 실용 노선을 실제 정책으로 구현해낸다면 총리 퇴임과 동시에 중량급 대선 주자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YS가 교수 출신인 이홍구·이수성 두 사람을 총리로 끌어들여 ‘차기 후보군’으로 밀어줬던 전례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정 내정자가 가장 원하는 그림이자, 청와대의 지지율 역시 안정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상생의 길이다.


정치인 정운찬


그러나 정 내정자가 짧게는 10월 재·보선, 길게 봐야 내년 6월 지자체 선거를 대비한 민심 제고용 카드에 그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토목사업과 공격적 감세라는 ‘MB노믹스’의 양대 축을 정 내정자가 바꿔내리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정 내정자는 “양극화를 해소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지만, 정작 나라 곳간에 실탄이 없다. 4대강 사업이 3년간 22조원(정부 발표), 감세정책이 5년간 90조원(국회 예산정책처 추산)의 예산을 비워낼 예정이다. 정 내정자가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MB노믹스를 뿌리부터 흔들어야 한다는 결론인데, 대통령제 하의 총리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졌던 선례는 없다.
“뉴딜은 제도를 바꾸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둔 것이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뉴딜한다고 잠수돼 있던 대운하가 나올까 걱정이다.”(2008년 12월10일 뉴욕 초청강연) “감세가 실제 경제효과 없이 소수 부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 지 오래다.”(2008년 12월15일, 학술지 <지식의 지평> 기고문) 모두 고작 9개월 전인 지난해 12월에 나온 정 내정자의 공식 발언이다. 토목사업과 감세라는 MB노믹스의 양대 축에 대한 근본적 회의론이다. MB와 정운찬, 누가 생각을 바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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