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LA시 선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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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코리아타운 이민 역사상 최초로 LA시의원 선거에 도전했던 한인 존 최 후보의 선전은 아직도 미주류사회에서 인종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케 했으나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해야 하는 과제를 한인사회에 주었다. 비록 존 최 후보는 지난 21일 LA시의회 제13지구 시의원 결선투표에서 패배했으나  LA 시 163년 역사에서 최초의 한인계 시의원의 꿈을 심었던 그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편 한인사회의 또다른 관심을 모았던 LA시장 선거에서 한인 커뮤니티와 함께 일하겠다고 공약한 유태계 출신 에릭 가세티(42) 시의원이 당선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성진(취재부 기자)

“새로운 인물, 새로운 역사”의 기치를 내걸고 최초의 한인계 LA 시의회 입성이라는 도전에 나선 젊은 차세대의 기수 존 최 후보의 도전은 지난 1년 동안 한인사회의 기대를 모아왔으며, 그의 당선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를 위해 한인사회는 언론, 시민단체 등이 한마음으로 공동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최 후보는 선거 막판 오패럴 후보측의 인종차별적인 네가티브 캠페인으로 역풍을 맞아 분패했다. 앞으로 이 네가티브 캠페인은 시민들의 새로운 지탄으로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의원 선거는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임은 물론 LA 한인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될 사안들이 많아 그 어느 때보다 한인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한 표 행사가 요구되어 왔었다.












 ▲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존 최 후보.
존 최 후보는 이번 LA시장 선거에 출마한 가세티가 자리를 비운 제13지구 시의원 자리에 출사표를 던져 지난 3월 예비선거에서 경쟁자인 미치 오파렐 후보에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라 이번 결선투표에 나서 한인들의 초미의 관심을 모았으나 가세티 시장 당선자의 보좌관이었던 오파렐 후보에게 분패했다.
존 최 후보가 노조와 한인 뿐 아니라 아시아계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 결선투표에서 역전 드라마를 기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1살 때 이민 온 최 후보는 UCLA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찌감치 지역 정치에 뛰어들어 로스앤젤레스 시장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LA 시의원은 15명으로 시장과 함께 사실상 시정을 이끄는 집행부 역할도 하고 있다. 연봉도 15만 달러에 연간 200만 달러의 의원실 운영비도 책정된 시의원은 캘리포니아주 지역 정계에서는 LA 시의원은 연방 하원의원 못지않은 위상과 권력을 지니고 있다.
LA 시의원 배출은 미연방하원 의원을 배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이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하원이나 주상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보다 더 힘든 작업이다. 많은 경우를 보면 주 상하원에서 활동했던 의원들이 나중에 LA시의원에 도전하곤 한다.

한편 재외동포사회의 최대 한인타운을 이룬 도시이며, 미국의 제2의 도시인 LA시 결선 투표에서 LA시장에 당선된 가세티 당선자는 한인사회와 약속한 공약대로 LA시정부에 한인 등용 등 “주민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는 LA시정부를 운영하겠다”고 시정 방침을 내놓았다.
지난 21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지난 3월 예비 선거에서 1, 2위를 차지한 에릭 가세티 시의원, 웬디 그루얼(51) 시 회계감사관이 맞대결로 접전을 벌였으나 에릭 가세티 후보가 신승했다.
에릭 가세티 후보는  LA시 역사상 첫 여성 시장의 꿈을 지닌 웬디 그루얼 후보를 물리치고 유대계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됐다.



LA시장 3선 금지 조항에 걸려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진하는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 시장 후임 자리를 놓고 벌인 이번 시장 선거전은 캠페인 비용만 3천3백만 달러로 역사상 최대 비용이었다.
두 후보는 모두 민주당 당적으로 각각 LA시정에 경험을 풍부히 지녀 공통점이 많아 선거전은 정책 대결 대신 인물 대결로 전개됐다. 그리고 가세티와 그루얼 모두 한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두텁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사실상 한인 커뮤니티는 누가 당선되어도 무난한 시장 선거였다.
멕시코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인 후손인 가세티 후보는 이번에  라티노와 한인을 포함, 아시아인 등 주로 이민자 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부친이 과거 LA 시 검사장으로 유명했던 가세티는 컬럼비아대, 런던정경대, 옥스퍼드대 등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그는 LA의 사립 명문 USC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를 하다 2001년부터 13년 동안 LA 시의원으로 활약하며 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구축해왔다.








미주한인 이민사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LA시의원 선거에 도전한 존 최 후보의 낙선은 아직도 소수민족에게 미주류사회의 벽이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 후보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 벽을 넘을 새로운 변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길거리 소년에서 상원의원”


이제는 많은 미주 동포들도 이 말이 신호범 (미국명 폴 신) 전 워싱턴주 상원의원을 가리켜 부르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올해(2013년)는 한국전쟁이 휴전이 된지 60년이 되는 해다. 신 전 의원은 전쟁고아에서 미주류정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한국인이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한국)전쟁중 너무 배가 고파서 볏단 속에서 아직 털도 안 난 쥐새끼를 꺼내 튀겨 먹었다”는 부분도 있다. 그 당시 미군을 따라 다니며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다 미군의관 레이 폴 대위를 만난 신 전 의원은 휴전 무렵 그로부터 ‘같이 미국에서 살자’는 제의를 받는다. 아직 전쟁의 상혼이 남아있던 1955년 9월 부산에서 미국행 화물선을 탄 그는 고국을 떠나면서 ‘거지와 이가 득실거리는 전쟁의 나라, 부정부패와 인간차별이 만연한 무정의의 나라’에 침을 뱉었다고 회고한다.












 ▲ 폴 신 전 워싱턴주 상원의원.
양아버지가 살고 있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 도착한 한인 청소년은 학교를 가보지 못한 설음을 풀기 위해 미국에서 꿈을 이뤄보겠다고 결심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그는 정규학교도 갈 수가 없어 오기를 품고 대입 검정고시(GED)를 위해 하루 3시간만 자고 공부하고 일하는 억척스런 생활을 이어 나갔다.
드디어 1978년 워싱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동양사)를 획득할 때까지 23년간을 하루 평균 3시간만 자며 공부하고, 더군다나 파트타임으로 일까지 했다. 처음에는 코피 나고 입술이 까지고 몸이 말이 아니었지만 오갈 데 없는 그를 보살펴주는 양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교수까지 지냈다. 백인 양부모에 백인 부인(다나 여사)을 만났고, 그는 주위 에서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고 말을 듣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는 동양인들이 영어를 잘해도 ‘영어 잘하는 동양인’으로 인식되며,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피부색이 장벽이었다고 회상한다.

1958년 군복무를 하게 된 그는 텍사스주 포트 훗에서 훈련을 받았다. 어느 주말 친구들과 시내에 나갔다가 ‘유색인종 출입금지’ 식당에 멋모르고 들어간 그는 매니저에게 멱살을 잡혀 거리로 내동댕이쳐졌다. 훈련소 동기들(백인)이 그를 위로했지만, 뜨거운 눈물이 눈에서 쏟아졌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은 그를 받아준 풍요의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군복무를 하던 유색인종인 그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때 어렴풋이 정치를 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지만, 꿈을 실현 시키는 데는 그로부터 무려 34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폴 신 박사는 ‘한인들의 정계 진출’이 주류사회와의 벽을 허무는 대안이 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사회 현상의 배후에는 정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신 박사는 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워싱턴 주내 학교에서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배울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부스 가드너 당시 주지사가 정계 진출 제의를 했을 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상원 지역구가 백인 비율이 93%에 달하는 지역임에도 그는 하루 11시간씩 지역구내 2만7000가구를 모두 방문하는 맨투맨 작전에는 상대후보의 네거티브 캠페인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나중 자신의 선거 캠페인을 강석희 전 어바인 시장에게 전수해 강 전 시장이 처음 시의원 선거에서 실제로 가가호호를 방문해 승리했다.

그는 1997년 주한미국대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워싱턴 D.C에서 최초 26명의 후보에 올랐으며 최종 3명 후보에까지 올랐었다. 최종 탈락한 이유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면접관이 ‘주한미국대사로서 한미간에 갈등이 생기면 누구 편을 들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보살펴준 아버지 (미국)와 낳아준 어머니(한국)가 싸우면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니 면접관은 아래만 쳐다보았다. 결국 최종 후보였던 스티븐 보스워스에게 주한대사 자리가 돌아갔다. 나중에 워싱턴 D.C의 지인이 ‘이민 1세를 출신국 대사로 보낸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백악관이 크게 부담을 느낀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지난해 한국계 성 김 대사가 최초로 주한대사로 임명됐다. 폴 신 박사의 전력이 이런 역사를 만든 것이다.  백인의 도움으로 미정계에 진출한 폴 신 박사는 지금1.5세와 2세 후배들의 정계진출에 손발을 가리지 않고 뛰어 간다.
폴 신 박사는 미국 50개 주에 한인 정치인이 모두 나오게 한다는 취지로 1999년 9월 한인 2세 정치인 후원장학회를 설립했다. 호범정치연구회도 발족시켰다. 그의 꿈은 한인이 미정계에 많이 진출할 수록 미국은 더 많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꿈은 한인2세와 3세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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