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1949년 숙군당시 박정희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주장과는 달리 5.16 직후 박정희와 혁명주체세력을 빨갱이로 의심, 미국 측에 이들의 사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 국무부 비밀문서가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전문의 발신일시는 1961년 5월 24일 오후 4시, 미 국무부 수신일시는 1961년 5월 24일 오전 7시 23분이며 이 시간은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소재함을 감안하면 미 동부시간으로 추정된다. 박정희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 백선엽은 이날 미국대사에게 자신이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신문에 보도된 정도로 제한적이라고 말했고 미국대사는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쿠데타 진전 상황에 대해 백선엽에게 설명했다. 백선엽은 자신은 박정희의 재판을 관할한 군법회의의 멤버가 아니었다며 자신은 박정희가 어떻게 한국육군에 복직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며 그저 박정희의 경력정도만 안다고 밝혔다.
朴-北, 특급 커넥션 가능성 주장
또 백선엽이 박정희를 문관으로 채용하도록 한 것은 물론 6.25가 발발하자 육군에 복직되도록 강력히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국 측에는 이 같은 사실을 전면부인하고 자신은 복직과정을 잘 모른다고 주장한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백선엽의 기회주의적 행동 또는 기존 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백선엽은 박정희는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으며 자신이 보기에는 박정희가 혁명의 발화점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박정희가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과 커넥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같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미국정부가 이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고 미국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백선엽은 군사정부는 쉽게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적, 개인적 자유는 앞으로 오랜 기간동안 심각하게 축소될 것이라며 미국정부가 방향을 바꾸게 하지 않거나 혁명적 모멘텀을 중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돼 있다. 즉 미국정부가 나서더라도 군사정부의 도래한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 살려준 백선엽은 이중인격자 백선엽은 또 당시 참모총장인 장도영에 대해 영리하고 능력도 있지만 때때로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따라서 장도영이 혁명을 이끌거나 컨트롤하거나 또 쿠데타그룹을 장악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김홍일장군은 애국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지력과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고 미국대사도 이 같은 평가에 동의했다고 전문은 기록하고 있다. 이 전문을 살펴보면 백선엽이 미국대사에서 말한 내용 중 여러 부분에서 진실성이 의심된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의 숙군과정에서 좌익행위가 발각된 박정희를 자신과 장도영 등이 나서서 미 군사고문단 등에 사면을 건의, 목숨을 살려줬다는 것이 백선엽 자신의 최근 주장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된 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백선엽은 5.16혁명직후 미국이 이를 진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적 순간에 ‘나는 박정희 숙군과정과 사면, 복직과정에 대해 잘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이 공산당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들의 사상적 백그라운드에 대해 미국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이중적인 행동이다.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은 실제로 박정희를 빨갱이로 의심하면서도 숙군과정에서 살려준 셈이 된다.
신변위협 귀국거부 8년 해외생활 백선엽은 5.16 쿠데타 박생 8일 뒤인 1961년 5월 24일 주중화민국 미국대사를 만난데 이어 쿠데타발생 약 16일 뒤인 6월 2일 다시 미국대사와 만났음이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난다. 이날 그는 자신이 미국대사로 발령 났음을 알린 뒤 중대한 결심을 털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야말로 깜짝 놀랄 정도의 내용이었다. 백선엽은 이날 미국대사에게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났지만 군사정부가 자신을 체포할 것을 우려, 만약 프랑스 부임 전 업무협의를 위해 귀국하라고 명령한다면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5.16 직후 미국대사에게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의 사상을 의심한데 이어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났음에도 다시 한번 이들의 사상을 의심한 것이다.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 중화민국 미국대사는 5.16 쿠데타 발생 보름여가 지난 1961년 6월 2일 미국무부에 백선엽과의 면담내용을 담은 비밀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의 발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후 5시, 미 국무부 수신일시는 1961년 6월 2일 오전 9시 41분이며 이 시간은 국무부가 워싱턴DC에 소재함을 감안하면 미 동부시간으로 추정된다. 2페이지의 이 비밀전문에서 미국대사는 백선엽이 프랑스 대사로 발령이 났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며 이에 대한 백선엽의 견해를 정리했다. 백선엽은 프랑스대사로 발령받았으며 이는 새 정부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새 정부를 실망시킨데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프랑스 대사 발령을 좌천으로 생각한 것이다. 즉 중화민국정부를 설득해 군사정부지지성명을 발표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좌천됐다는 것이다.
박정희, 백선엽 군부 내 영향력 경계
백선엽은 군사정부가 백선엽이 한국의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로 그를 보낸 것이라고 미국대사에게 말했다. 한마디로 자신을 귀양 보냈다는 것이다. 백선엽의 말대로 백선엽은 유일하게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인물이며 특히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총장이었기 때문에 군부 내 영향력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박정희 등 혁명주체세력도 이 같은 상황을 고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선엽은 또 그가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다면 자신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거나 또는 도저히 새 정부의 향후 진로에 동의하지 못할 정도라면 새 정부에 대한 반대활동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에 대항하는 반정부활동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였다. 백선엽은 어제 뉴욕헤럴드트리분의 클라크특파원과의 장시간 대화를 통해 군사정부가 실질적으로 청년장교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고 전했다. 군사정부 좌익 반미경향 예의주시 경고 백선엽은 시니어장교들과 주니어장교들 간의 다툼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60년 선거 때 이승만이 부통령 이기붕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요청하자 군 기강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 뒤 15명의 청년장교들이 공개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사태는 더욱 확산됐고 군법회의가 15명의 장교들의 옷을 벗김으로써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며 또 매그루더장군이 엄격한 군법적용을 요청하면서 개입함으로써 청년장교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더욱 커지게 됐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청년장교 15명의 명단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이들 15명이 쿠데타에 주동적으로 가담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아직도 상황이 폭발위험성이 높고 미국의 입장은 미묘하면서도 위험한 상황이라며 장도영이나 김홍일은 우두머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백-박, 그들의 물고 물리는 갈등의 골 백선엽의 속마음을 박정희가 알아챘기 때문인지 백선엽은 오랫동안 국내로 돌아오지 못했다. 백선엽은 1961년 프랑스대사로 발령이 나서 1965년까지 파리에서 생활한 뒤 곧바로 캐나다대사로 부임, 1969년까지 캐다나 대사로 활동했다. 5.16혁명직후 8년간 해외로만 돈 것이다. 이는 백선엽이 박정희를 의심한 만큼 박정희 또한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백선엽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행동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은 낱낱이 기록돼 문서로 남아 있으며 이 문서는 당사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그의 행적을 증언하고 있다. 이같은 문서가 5.16혁명이후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그가 왜 해외로만 돌다가 장관을 지낸 뒤 다시 국영기업체 사장을 전전했는지 그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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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무부 비밀문서 단독입수> 백선엽, 516직후 박정희 ‘빨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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