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스토리> 김영삼은 왜 그 숨겨진 자식들을 마지막까지 외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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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가 입수한 YS의 숨겨진 딸 「가오리」의 사진. 90년대초 뉴욕의 루이비통 가방 판매점에서 근무할 당시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김대중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펼쳤고, 1990년 3당 합당에 의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88세의 일기로 끝내 눈을 감았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죽기 전에 반드시 정치인이 아닌 인간적으로 숨겨진 가족사와 버려진 자식들 문제에 대해 한번쯤은 아버지로써 짚고 넘어갔어야할 사안들이였다. 민주화의 대부이자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지낸 사람이 천륜과 인륜을 저 버린 것에 대해 그는 끝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장으로 치러진 그의 화려하고도 엄숙한 주검을 바라보는 버려진 자식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마지막까지 그들의 존재를 거부했을까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선데이저널>은 지난 25년 동안 끈질기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가오리 부녀를 추적 끝에 지난 2005년 YS의 숨겨진 여인 이경선씨 인터뷰 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해 공개해 보았다.
<정리: 리차드 윤 취재부기자>

<선데이저널>은 지난 90년 3당 합당으로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던 김영삼씨의 숨겨진 사생활을 폭로해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15년 후인 2005년 3월 김영삼의 숨겨진 여인 이경선씨를 인터뷰하는데 성공, 그녀의 입을 통해 김영삼과의 만남부터 딸 가오리 출생,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 수차례에 결처 23억원을 전달받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급기야 상도동측은 기존의 입장 표명과는 달리 “딸을 앞세워 돈을 요구하는 이경선 씨가 측은하다”는 식의 한발 물러선 반응을 보여 간접적으로 숨겨진 딸 가오리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김영삼 씨는 안기부 김기섭 前 기조실장을 통해 이들 모녀에게 대통령 재직 및 퇴임시절을 합해 지난 9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총 23억원을 건넸다는 이경선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절 대꾸하지 않아 자금조달 과정에 해외비자금 의혹도 제기 됐었다. 같은 해인 200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낸 가네코 가오리(43·한국명 주현희) 씨의 어머니 이경선(70) 씨는 본지 보도직후 무슨 영문이지 소송을 취하하고 지금까지 종적을 감췄다.

선데이저널의 25년의 끈질긴 추적

지난 92년 2월 제14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시 본보의 자매 일간지였던 LA 매일신문이 3회에 걸쳐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표였던 김영삼 씨에게 30년 전 버려진 딸이 있다’고 기사화할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사실무근이며 자신을 음해하려는 무리들의 공작”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LA 매일신문 기사를 인용 전재한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손충무 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전격 구속시켰다가 20여일 만에 풀어주고 고소를 취하하는 등 큰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15년 후 <선데이저널>은 ‘김영삼 前 대통령의 버려진 딸 가오리 모녀의 통한의 편지’를 공개하고 급기야 같은 해 5월 이경선씨가 미국으로 건너와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한국의 많은 주요 언론들마저 인용 보도하고 월간조선 3월호에 보도돼 한국 내에서도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비화(秘話)로 번졌던 것이다.

이 씨는 지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60년 YS와 만났던 처음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YS의 숨겨놓은 딸’에 대한 사실 여부 공방전에 종지부를 찍는 파란만장의 인생역전을 털어 놓았다. 이날 이뤄진 이 씨와의 단독 인터뷰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본보가 처음으로 이뤄낸 개가다.
이경선 씨와 인터뷰는 2005년 1월 16일 <선데이저널> 사무실에서 진행됐었다.

운명적인 만남과 부적절한 관계

(중략) 드디어 김영삼 前 대통령의 버려진 딸 <가오리(42) 한국 명 주현희> 양의 모친 <이경선(70)> 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43년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경선 씨는 YS와의 첫 만남과정에 대해 묻자 침착한 어조로 “내가 김영삼 씨를 처음 만난 시기가 5.16 직후였습니다.
평소 저와 친하게 지내던 ‘미스 김’이라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애인(조병옥 박사의 조카 조승만 씨)하고 절친한 아주 똑똑하고 젊은 정치인이 있는데 5.16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너도 애기 아빠(이경선 씨는 前 독립산업 함창희 사장의 후처였음)하고 헤어져 쓸쓸하고 하니 내가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길래 네 사람이 함께 자리를 하게 된 것이 첫 대면이었죠”라고 운을 떼었다.
이어 이 씨는 “그 이후 친구 집에서 몇 번 만나 수 차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 급기야 연인으로 발전되었죠”라며 “차츰 시간이 지나자 젊은 그에게 호감이 생기게 되었고 그 뒤 내가 살고 있는 익선동 집을 매일 같이 드나들면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죠”라고 만남 당시를 말했다. 또 이 씨는 “사실 그 전에 나이 먹은 사람의 후처로 있다가 3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우리는 쉽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정에 정이 없던 그 사람은 집을 나오기 무섭게 제 집으로 찾아 왔으며 하루종일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귀가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하루도 자고 가는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집에서만 만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 볼까 두려워 밖에서 데이트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흔한 극장 구경 한 번 가지 못할 정도로 집에서만 만났지요. 그리고 나가서 밥을 먹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당시 김영삼 씨는 궁핍했지요”라고 이 씨는 말을 이어갔다.

“금전적으로 어려웠으나 미안했는지 매일 집에 도착해서 20-30분 씩 전화를 해주는 자상하고 친절한 남자였다”고 젊은 YS를 떠올리며 연애시절 뒷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YS가 당시 때로는 집에서 몰래 전화를 하다가 부인에게 들켜 대판 부부싸움을 하는 소리를 잘못 놓여진 수화기를 통해 엿듣기도 했으며, 어쩌다가 이경선 씨가 부인에 관한 질문을 하면 “그는 ‘부친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결혼을 했지만 보기도 싫고 아이들이 있으니 살고 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라며 “물론 제 기분을 맞추려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당시 부부의 정이 없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 YS와의 부적절했던 관계를 고백했다.

비극의 씨앗 가오리의 출산

이경선 씨는 “YS와의 만남이 약 2년 정도 되었을 무렵인 지난 62년 10월 16일(음력) 서울 종로에 위치한 <김호태 산부인과>에서 ‘가오리’를 출산했죠”라며 “그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와 상의를 하니 유산을 하지 말라는 한마디(이는 이경선 씨가 인터뷰 과정에서 ‘임신 중절하라’는 의미를 착각한 답변으로 사료됨)의 소리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왕이면 나 닮은 아들 하나를 낳아 달라’는 말까지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었습니다”라며 가오리의 출생 과정을 설명했다.

“가오리를 출산한 지 불과 2시간 후인 오후 7시 그는 친구인 조승만 씨와 병원으로 찾아왔었죠. 딸이라는 소리에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약간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다가 조승만 씨가 ‘자네 딸이 아니라고 할까봐 꼭 닮았네’라고 농을 던지자 그제서야 ‘닮지 않으면 내 딸이 아니지’라고 멋쩍어 했죠”라며 이 씨는 가오리가 출생한 날의 상황을 소상히 기억해 냈다.
약 1시간 정도 머물면서 농담조로 ‘딸 자식은 3명이나 되는데 또 딸이니 딸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왕이면 이 사람아 아들을 낳아야지 계집애가 뭐냐’고 해 제가 ‘아들은 내 맘대로 낳느냐 당신 탓이지’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딸 아이를 한번 안아주며 한참을 쳐다보더니 ‘잘 키우라’는 한마디를 하고 돌아갔다.
‘가오리’가 태어난 이후 YS는 매일같이 삼선동 집(익선동에서 이사를 함)으로 찾아와 딸 아이를 안아주고 귀여워했으며 고집을 피우는 딸아이를 보고 “고집이 나를 닮아 유난하다”며 대견해 했던 일화에 대해서도 이 씨는 전했다. 그 동안 가오리의 출생 논란이 불거지자 YS는 “자신은 당시 정관 수술을 했다고 주장하며 사생아 논쟁은 음해다”라고 주장했었다. 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경선 씨는 “정관 수술을 한 것은 가오리가 태어나고 2년 뒤로 알고 있으며 수술 후 자신에게 이 같은 사실을 말하기도 했죠”라고 덧붙였다.

YS, 생활비 한 푼 안줘 일본으로

이경선 씨는 가오리 출산 후 YS와의 관계에 대해 “가오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5.16혁명 정치해금으로 한국 정치가 재개되었고 그는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바쁜 일정을 지내면서도 변함없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집으로 찾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상스럽게도 점점 그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라며 “유부남인 그와의 만남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되자 과연 이러한 맹목적인 만남이 가능할까라는 인간적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그는 수년간 단 한 푼의 생활비도 주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데 다소 화가 났으며 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그에게 마음이 떠나고 있음을 제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이경선 씨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처음 YS와는 서로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였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건이 허락치 않아 헤어질 운명으로 담담하게 받아 들였으며, 가오리를 호적에 올려주지 않을 것 같아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데려가 아들 영준이는 윤 단장의 양자로 입적 시켰으며 가오리는 대만인의 자식으로 입적 시켜 67년 여름 일본으로 오게 했다”고 일본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했다.
“어찌 보면 그제야 비로소 이성의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니 그가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줄 수 없었고, 제 표정부터가 일단 냉랭해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생활태도에 불만을 표시하고 헤어질 결심으로 어느 날 그에게 ‘당신은 돈이 없고 나는 식구도 많으니 일본에 가서 돈을 벌은 후 다시 만나자’고 말하자 ‘정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해 64년 2월 경에 가수로 취직해 일본으로 건너갔죠”라며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에 대해 이 씨는 설명했다.
이 무렵 우연히 재일 민간단체의 모임에 나갔다가 저보다 14살 연상인 당시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후일 단장이 됨)인 윤달용 씨를 만나게 되었죠”라고 윤 씨와의 관계와 가오리양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배경을 소상하게 말했다.

YS가 아버지 존재사실 알아

 ▲ 가오리 양의 소녀시절       ▲ 숨겨진 여인 이경선 씨

가오리는 친부로 알고 있던 윤 단장의 사랑을 받으면서 소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쯤에 이르러 윤 단장이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때마침 미국 워싱턴에서 잘 알고 지내던 스님의 도움으로  미국 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생활 자체가 어려워지자 ‘차라리 생부인 YS에게 부탁을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며 이에 이경선 씨의 모친인 가오리의 외할머니가 가오리를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갔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만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YS지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이경선 씨의 두 눈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미국 유학을 보내는데 비행기표와 경비 등 당시로선 거액인 약 5,000 달러 정도의 큰 경비가 필요해 하는 수 없이 YS에게 생전 처음으로 부탁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에 가오리를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 보내게 되었습니다”며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회고했다.
그리고는 YS의 여자관계에 대한 소문을 언급하면서 영화배우 이 모 씨와의 염문설과 여러 여자들과의 스캔들 등 무수히 많았지만 그래도 저는 부인 이외에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설마 딸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데 어떤 방법으로라도 도와줄 것을 기대했지만 고작 비행기표와 경비 3,000 달러를 YS로부터 직접 건네받았다고 털어 놓았다.

가오리가 YS를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YS가 돌아간 뒤 가오리가 할머니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저 아저씨가 무슨 이유로 나를 도와주느냐”고 묻더랍니다. 어린 나이에도 느끼는 게 있는지 YS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기와 모습이 너무나 흡사한 YS에게 본능적으로 혈육에 대해 끌리는 감정이 생겨났는지 떠나가는 YS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할머니에게 물어보더랍니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오리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는 판단 아래 가오리에게 “사실은 네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 네 친 아버지다”라고 말하자 의외로 침착한 가오리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너무나 반가워 하며 할머니에게 “미국에 가기 전에 한번만 더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하지만 가오리 씨는 그 뒤 마지막까지 YS를 만나지 못했다.

YS와 전화통화 밤새 대성통곡

그러던 어느 날 YS가 워싱턴을 방문, 한 모임 석상에서 아들 영준이가 다가가 인사를 하자 YS는 영준이를 알아보고 “어른이 되었네”라고 대견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 오빠 영준이는 동생 가오리의 전화번호를 YS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가오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놀란 가오리는 한참 동안을 목이 메어 말을 못했다고 한다.

‘아빠’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자 YS는 특유의 퉁명한 목소리로 “공부 열심히 해라”는 외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날 가오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수화기를 들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울었다고 할머니가 어머니 이경선 씨에게 전했다. 당시 학비 문제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던 가오리는 “친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불쑥 전화를 해 아무런 말도 없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매정하고 비정한 말 한마디에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던 것 같아 통곡을 한 것 같다”고 이경선 씨는 말했다.

생부 YS와는 그것이 마지막 전화 통화였으며 지금까지 30년 세월 동안 단 한번의 만남이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전화통화 이후 가오리와 YS는 단 한번의 전화통화도 한 적이 없으며, 가오리도 친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고 살았다. 워싱턴에서의 아픈 기억때문인지 이경선 씨의 말을 빌리자면 “친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한 사람인지 알고 난 이후부터는 YS의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기섭 통해 수회 걸쳐 23억원 받아

 그리고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경선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불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야 남은 여생 그나마 팔자가 필 수 있다는 생각도 솔직히 있었지만 딸 가오리 장래에 그나마 희망을 기대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 당시의 심정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김덕룡의원을 비롯해 측근들을 만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지 한 남자로부터 “중요한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와 만났는데 이 사람이 김기섭 인기부 기조실장은 자신을 중소기업 사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제가 “대통령이 보내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말도 묻지 말라”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가방을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주고간 돈을 들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열어 보니 현금 3억원이었습니다. 생전처음 만져보는 현금 3억원을 들고 얼굴이 상기되었고 ‘사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밤새 돈 다발을 껴안고 잠을 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씨는 모두 합쳐서 총 23억 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맨 처음에 3억. 다음에 2억. 그리고 1억, 3억, 2억, 2억 이런 식으로 대통령 재임시 총 13억을 받았고, 대통령 퇴임 후 김기섭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5억원은 현금 5억원은 수표로 합계 10억원을 주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이니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그러나 받은 돈 모두 부채와 이자를 갚는데 쓰고 아들 사업 자금을 대줬다가 사기를 당하고 망하는 바람에 받은 돈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은 YS가 도와준 23억원을 모두 탕진하고 이제 ‘또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한심했던 탓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기도 했다. (중략)

YS 버려진 딸 가오리 종지부

<선데이저널>이 ‘YS의 버려진 딸’에 대한 마지막 보도는 고인 김영삼 씨에 대한 명예를 훼손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직성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국가의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모든 사생활까지도 국민들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참다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까지 부정하는 도덕성이 상실된 부정직한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자기 자신의 과거부터 속이려 드는 사람이 무엇을 속이지 못하겠는가?
현재 나이 50 중반의 나이에도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가오리씨는 이제 YS의 타계로 영원히 숨겨진 딸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오리뿐 아니라 지난 친자소송에서 승소한 아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이들에게 있어 천륜을 나눈 아버지였기 때문에 생부의 주검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YS지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이경선 씨의 두 눈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미국 유학을 보내는데 비행기표와 경비 등 당시로선 거액인 약 5,000 달러 정도의 큰 경비가 필요해 하는 수 없이 YS에게 생전 처음으로 부탁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에 가오리를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 보내게 되었습니다”며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회고했다.

그리고는 YS의 여자관계에 대한 소문을 언급하면서 영화배우 이 모 씨와의 염문설과 여러 여자들과의 스캔들 등 무수히 많았지만 그래도 저는 부인 이외에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설마 딸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데 어떤 방법으로라도 도와줄 것을 기대했지만 YS는 할머니를 찾아와 고작 비행기표와 경비 3,000 달러를 주고 돌아갔다고 털어 놓았다.
가오리가 YS를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YS가 돌아간 뒤 가오리가 할머니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저 아저씨가 무슨 이유로 나를 도와주느냐”고 묻더랍니다. 어린 나이에도 느끼는 게 있는지 YS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기와 모습이 너무나 흡사한 YS에게 본능적으로 혈육에 대해 끌리는 감정이 생겨났는지 떠나가는 YS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할머니에게 물어보더랍니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오리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는 판단 아래 가오리에게 “사실은 네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 네 친 아버지다”라고 말하자 의외로 침착한 가오리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너무나 반가워 하며 할머니에게 “미국에 가기 전에 한번만 더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하지만 가오리는 그 뒤 마지막까지 YS를 만나지 못했다.

YS와 전화통화 밤새 대성통곡

그리고 5년후 YS가 워싱턴을 방문, 한 모임 석상에서 아들 영준이가 다가가 인사를 하자 YS는 영준이를 알아보고
“어른이 되었네”라고 대견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 오빠 영준이는 동생 가오리의 전화번호를 YS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가오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놀란 가오리는 한참 동안을 목이 메어 말을 못했다고 한다.
‘아빠’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자 YS는 특유의 퉁명한 목소리로 “공부 열심히 해라”는 외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날 가오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수화기를 들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울었다고 할머니가 어머니 이경선 씨에게 전했다. 당시 학비 문제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던 가오리는 “친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불쑥 전화를 걸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매정하고 비정한 말 한마디에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던 것 같아 통곡을 한 것 같다”고 이경선 씨는 말했다.

생부 YS와는 그것이 마지막 전화 통화였으며 지금까지 30년 세월 동안 단 한번의 만남이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통화 이후 가오리와 YS는 단 한번의 전화통화도 한 적이 없으며, 가오리도 친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고 살았다. 워싱턴에서의 아픈 기억때문인지 이경선 씨의 말을 빌리자면 “친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한 사람인지 알고 난 이후부터는 YS의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기섭 통해 수회 걸쳐 23억원 받아

 그리고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경선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불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야 남은 여생 그나마 팔자가 필 수 있다는 생각도 솔직히 있었지만 딸 가오리 장래에 그나마 희망을 기대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 당시의 심정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김덕룡의원을 비롯해 측근들을 만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지 어느날 한 남자로부터 “중요한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와 만났는데 이 사람이 바로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이였다. 처음엔 자신을 중소기업 사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제가 “대통령이 보내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말도 묻지 말라”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가방을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주고간 돈을 들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열어 보니 현금 3억원이었습니다. 생전처음 만져보는 현금 3억원을 들고 얼굴이 상기되었고 ‘사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밤새 돈 다발을 껴안고 잠을 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씨는 모두 합쳐서 총 23억 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맨 처음에 3억. 다음에 2억. 그리고 1억, 3억, 2억, 2억 이런 식으로 대통령 재임시 총 13억을 받았고, 대통령 퇴임 후 김기섭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5억원은 현금 5억원은 수표로 합계 10억원을 주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이니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그러나 받은 돈 모두 부채와 이자를 갚는데 쓰고 아들 사업 자금을 대줬다가 사기를 당하고 망하는 바람에 받은 돈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은 YS가 도와준 23억원을 모두 탕진하고 이제 ‘또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한심했던 탓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기도 했다. (중략)

YS 버려진 딸 가오리 종지부

<선데이저널>이 ‘YS의 버려진 딸’에 대한 이번 보도는 고인 김영삼 씨에 대한 명예를 훼손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직성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국가의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의 모든 사생활까지도 국민들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참다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까지 부정하는 도덕성이 상실된 부정직한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자기 자신의 과거부터 속이려 드는 사람이 무엇을 속이지 못하겠는가?
현재 나이 50 중반의 나이에도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가오리씨는 이제 YS의 타계로 영원히 숨겨진 딸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오리뿐 아니라 지난 친자소송에서 승소한 아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이들에게 있어 천륜을 나눈 아버지였기 때문에 생부의 주검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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