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 6월 특집2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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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이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 6월로 68주년이 된다. 북한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여 동안 수 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많은 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 국군은 물론 미국 등 16개국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 그 가운데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체포돼 동토의 땅에서 지옥과 같은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미군 포로들도 있다. 한국 전쟁에서 북한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미군 용사와 증손자의 한국 방문 이야기를 그린 ̒돌아오지 않는 다리 너머’(Beyond the Bridge of No Return)다큐멘터리 영화 시사회가 국내외 최초로 지난 3일 LA 미영화배우노조(SAG-AFTRA)빌딩 내 스크린 시사회장에서 열렸다. 영화는 두 사람이 함께 방한해 미군으로 처음 도착한 부산을 포함해 한국의 곳곳을 다니며, 판문점 ̒돌아올 수 없는 다리’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통해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 참전국 장병들의 희생이 의미있는 것임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아덴로울리이날 시사회의 주인공 88세의 노병 아덴 로울리(사진)(Arden Rowley)씨와 증손자 카이든 셔우드(Cayden Sherwood)와 함께 참석했다. 로울리 씨는 북한의 벽동 미군포로수용소 등에서 약 33개월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 시사회에 앞서 로울리 씨를 만났다. 이날 본보 기자를 만난 로울리 씨는 “당신의 나라 대한민국은 기적의 나라이다”(Your Republic of Korea is really miracle country)라고 말했다. 그는 “South Korea(남한)이라고 하지않고 내내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산업화와 민주화 뿐 아니라 거리를 활기차게 다니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기적의 나라”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33개월의 기나긴 포로 생활에 대해 그는 “수용소 생활은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며 “추운 땅 수용소에서 10여명이 한 방에서 지냈는데 땔감도 없어서 방에는 온기가 없었고 항상 이가 득실 거렸다”고 말했다. 포로들은 산에서 나무껍질을 채취해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포로 생활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함께 있던 전우들이 죽는 것을 바라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흔들렸다. 이어 “포로수용 생활에서 거의 300여명이나 되는 전우들의 마지막 순간들을 본다는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로울리 씨가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때는 나이 20세였다. 아리조나주 메사(Messa)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세에 미육군에 징집되어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에 미제 2보병사단 소속으로 일본 오끼나와에서 근무중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부산에 도착했다. 소대장의 지프차 운전병으로 ‘낙동간 전투’에 처음 참가했다. 이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압록강까지 지프를 운전하며 전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미처 퇴각하지 못한 채 그해 12월 1일 청천강 근처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중공군에 의해 포로가 됐다. 로울리 씨는 이후 24일 동안 밤에만 이동하면서 눈보라가 매섭게 부는 산골을 지나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임시 포로수용소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 했다. 하지만 수용소 환경은 너무도 열악했다. 추위와 배고픔, 이질 같은 전염병이 돌면서 불과 몇 주 만에 전우 300여 명이 숨졌다. 숨진 전우들의 시신을 계속 땅에 묻어야 했고 여러 전우들은 동상에 걸려 꽁꽁 얼어붙은 발을 수술 칼도 없이 그저 큰 가위로 잘라내야 했다. 이듬해 두 번째 수용소인 벽동수용소로 이송되면서 정신적인 고통까지 시작됐다.

압록강 근처에 있던 벽동수용소에서 그는 같은 방에 “터틀”(Tuttle)이란 전우와 함께 지냈는데 폐렴에 걸려 몸이 쇠약해져 갔다. 어느날 옆에 누운채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의 눈이 점점 가물어져가 죽음이 가까워 옴을 느꼈다. 로울리 씨는 그의 손을 잡고 “주님! 이 Tuttle의 고통을 더 이상 지니지 않도록 불러 가소서…” 라고 기도했다. 눈을 다시 뜬 터틀은 로울리 씨를 보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Thank…(고맙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한편 그 수용소에서는 중동군이 영어를 구사하는 강사를 데려와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세뇌교육’을 시작했다. 이런 세뇌교육은 무려 16개월 간 거의 매일 반복돼 포로들의 심신을 지치게 했다. 그는 당시 세뇌 교육을 잘 따르면 중공군이 식량과 담

배 등을 더 지급했기 때문에 많은 전우들이 생존을 위해 계속 참여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치열한 생존싸움을 하며 5개 수용소를 전전한 뒤에야 로울리 씨는 휴전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18일 드디어 자유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었다. 로울리 씨는 문산 ̒자유의 집’에 도착해 처음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죽어가는 동료에게 기도를

33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 풀려나 1953년 9월 1일 고향 아리조나 메사에 돌아온 로울리 씨는 전쟁의 참상이 끔찍해 한국전 참전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돌아온지 2주 후 주말 댄스 파티에서 만난 루스 마틴(Ruth Martin)이란 여성을 만나 그해 11월에 결혼했다. 그리고 아리조나에서 조용히 소학교 선생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지냈다. 그의 기억에 한반도는 폐허와 굶주림에 찌든 한국인들의 모습 만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발전상이 뉴스로 조금씩 나타나자 로울리 씨는 궁금했다. 전쟁 중 오랜 포로생활과 동료 전우들의 죽음, 폐허로 변한 한반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까지 겪어 자신과 가족 주위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면서도 미국경수비대에 재입대 해 1974년 소령으로 제대했지만 그는 다른 참전군인 들처럼 6․25전쟁 미참전용사협회(KWVA)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내의 권유로 1983년 우연히 아리조나참전용사협회에 참석한 뒤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 그리고 한국의 발전상을 들으며 직접 그 땅에 다시 가 보고는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된다.

로울리 씨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1994년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에 정말 놀랐다”(“There was tremendous changes. I was absolutely amazed…”). 그리고 수많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과 한국이 어떻게 40년 만에 그처럼 엄청난 변화를 했는지 그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20세의 미보병사단 소속으로 그가 처음 본 한반도는 부산항이었다.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기

 ▲ 시사회에서 로울리씨(오른편)가 전쟁경험을 말하고 있다. 옆에는 증손자 셔우드, 한종우 재단이사장, 샤리프 감독

▲ 시사회에서 로울리씨(오른편)가 전쟁경험을 말하고 있다. 옆에는 증손자 셔우드, 한종우 재단이사장, 샤리프 감독

위해 미군함으로 도착했을때 보았던 황폐했던 그 부둣가는 없어지고 해운대의 멋진 해수욕장 그리고 고층빌딩이 연이어 뉴욕과 같은 마천루를 연상케하여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가 숨기고 살았던 한국전참전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니게 됐다. 자신과 동료전우들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서 구하는 데 일조를 했을 뿐아니라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보면서 한국전 참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로울리 씨는 이후 한국전쟁 전도사가 됐다. 학교 교사와 한국전쟁 역사가로 활동하며 한국전쟁과 자신의 포로생활을 담은 책을 여러편 집필했다. 또 6․25참전미군포로용사협회(Korean War Ex-POW Association’s)의 활동을 주도하며 전우들과 한국을 9차례나 방문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고등학교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남북한이 전쟁 뒤 어떻게 확연하게 달라졌는지 한반도를 촬영한 야간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한다고 말했다. 남북한의 달라진 모습과 자신의 포로체험을 통해 느낀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다음 세대가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을 변화시킨 한국발전상

이날 시사회를 가진 ̒돌아오지 않는 다리 너머’(Beyond the Bridge of No Return )라는 제목의 다큐멘타리 영화(부제-‘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유업’(Legacy of a Korean War Veteran)는 비영리 재단인 ̒한국전쟁유업재단’ (Korean War Legacy Foundation이사장 한종우)이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후원을 받아 제작했다. 감독은 슐탄 샤리프 (Sultan Sharrief)이다. 러닝타임 38분의 이 영화를 제작한 한국전쟁유업재단은 이 영화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와 부산국제 영화제 등에도 출품할 예정이다. 또 이번 시사회를 시작으로 미국 내 한국전참전용사 관련 단체와 역사 교육 교사 모임 등에서 계속 영화를 상영하고, 한국전 교육 교재로도 배포할 계획이다. 재단은 6․25 한국전쟁의 의미와 한국의 발전상을 디지털 교과서로 만들어 미 전역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6․25전쟁은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통해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승리한 전쟁’임을 다음 세대에 가르친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유업재단과 미국 최대 사회․역사 과목 교원단체 가운데 하나인 전미사회학협의회(NCSS)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이날 약 100여명의 참관자들이 참가한 시사회에 미국 중고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많았다. 영화 상영에 앞서 한종우 재단 이사장(미 시라큐스대 교수)은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참전국 청소년 들에게 한국을 홍보하고 한국전의 세계사적 의미를 교육할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서 “이 영화제작에 후원한 보훈처와 국제교류재단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 제작을 후원한 국제교류재단의 최현선 LA사무소장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공헌과 희생을 알리는 작품을 교육용으로 제작하는데 후원했음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LA총영사관의 민재훈 보훈담당 영사는 축사를 통해 “이 작품이 ‘잊혀진 전쟁’으로 알려진 한국 전쟁을 가치의 유산으로 보존하는데 기여할 것이며 특히 한미우호와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로울리 씨와 증손자 그리고 샤리프 감독과 이 영화를 제작한 한국전유업재단 한종우 이사장 등이 패널 토의를 가졌다. 이날 노병 로울리 씨는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아니라 분명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로울리 씨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지키다 전사한 전우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 옆에 있던 전우는 숨졌고 나는 살았다. 왜 그는 죽고 나는 살았나요? 내가 만약 포로수용소에서 숨져간 전우들을 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매순간 전우들을 기억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그러길 원한다” 그리고 로울리 씨는 워싱턴의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새겨진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Freedom is not free)는 교훈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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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또다른 역사

크리스토퍼 리 감독 ‘페딩 어웨이’(Fading Away)를 사집첩으로 제작

6․25전쟁, ‘위안부’ 등 한국 현대사를 조명해 온 크리스토퍼 리 감독이 지난 2013년에 제작 발표한 다큐멘타리 영크리스토퍼리화 ‘페이딩 어웨이’(Fading Away)를 토대로 사진 도록 ‘페이딩 어웨이’를 6.25 전쟁 68주년을 앞두고 출간해 의미를 두고 있다. 그가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의 진짜 6․25 이야기 담고 싶어 제작한 다큐멘타리 ‘페이딩 어웨이’는 외국인이 바라 본 6․25 전쟁, 교수․학자가 이야기 하는 6․25 전쟁, 높은 계급의 참전 군인이 겪은 6․25 전쟁보다는 보통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가 겪었던 6․25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제작한 크리스토퍼 리 감독은 “그 동안 6․25 전쟁과 관련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지만 모두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들 뿐인 것 같았다”면서 “어린 학생이나 나 같은 재미동포처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사진 도록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다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어록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어록도 담았다. 특히 미군정 당시 군사고문단으로 1948년 부터 1953년 휴전까지 6․25 관련 기록 영화와 사진, 항공 사진 등을 촬영한 ̒프랭크 윈슬로우̓(86) 예비역 미군 중령은 ‘페이딩 어웨이’ 영화를 위해 본인이 직접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미공개 자료를 크리스토퍼 감독에게 공개했는데 이 책에는 그의 귀중한 미공개 사진들도 소개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감독은 이번의 사진첩이 6․25 전쟁 후 70년이 가까워오는데 역사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 가는 전쟁의 의미를 동포들이나 미국의 어린 학생들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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