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방송계의 산 증인… “끝없는 정열은 계속되고 있다”

이 뉴스를 공유하기
갑신년 새해를 꿈꾸는 사람들 2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는 영원한 방송인 김영우

한인방송계의 산 증인… “끝없는 정열은 계속되고 있다”
65년 한인사회 최초의 방송국 설립한 원로 방송인
40년 경험·기술 바탕으로 DVD·CD 제작사 설립

갑신년 새해들어 ‘라디오코리아’의 방송이 중단되고 새로운 방송국이 설립되는 등 한인방송계의 지각변동이 이어지고 있다. ‘라디오코리아’라는 명칭은 원래 40년 전에 이미 LA에서 원로방송인 金영우 씨에 의해 방송됐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역사를 모르고 있다.

1965년 7월12일 오전 7시. 잉글우드에 있는 KTYM FM 103.9 MC 방송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나왔다. 이어 金영우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라디오 코리아’ 방송의 개국을 알리면서 당시 안광수 LA총영사의 축사와 조영삼 남가주 한인회장의 인사말이 방송됐다. 그리고 한국의 민요와 가곡들이 축사 사이사이에 삽입되면서 30분간 계속됐다. 이것이 LA지역 한인사회 역사상 최초의 한국어 방송이었다.

당시 이 방송의 전파료는 30 달러였다. 이 전파료는 남가주 한인회의 홍보이사였던 소니아 석 여사(작고)가 부담했다. 그녀는 부동산 브로커로 활약하고 있었다. 한인 최초의 라디오 방송의 주역은 도미 전 한국에서 MBC문화방송에서 활약한 金영우 아나운서와 전 KBS 아나운서였던 서정자(현 시애틀 ‘라디오 한국’사장) 씨 그리고 엔지니어로 이순재(전 미8군 AFKN-TV엔지니어) 씨 등이다.

이 방송이 처음 전파를 타고 나갈 때는 LA지역에 오늘 날처럼 한국어 일간신문이 없어 많은 동포들이 청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식을 듣고 다이알을 맞춘 일부 동포들은 미국 땅에서 생전 처음 듣는 한국어 방송에 감탄했다. 또 이들은 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아리랑 민요 가락에 향수를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같은 최초의 한인 라디오 방송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채 개국 11개월 만에 중단됐다. 지금처럼 많은 청취자도 없었고 광고주들도 없었으며 후원자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번 방송에 실패한 金 씨는 홍익대학에서 전공한 미술실력으로 미국만화영화제작으로 유명한 ‘하나 바베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해 당시 인기 절정인 “yoggi Bear” “Scoobi Doobi Doo” “Sinbad” “Tom Sawyer” 등의 만화배경을 그려 인정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ABC, CBS, NBC 등 3대 네트워크에 방영되는 관계로 金 씨도 자연히 방송국과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으며 활동했다.

金 씨는 69년에 창간한 한국일보와 협력해 74년에 제2의 라디오 방송 시대를 열었다. 1974년 4월11일 토요일 오전 11시30분 KTYM 방송을 타고 한국어 라디오 방송이 울렸다. 金 씨는 마이크앞에서 “교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KTYM AM 1460 kc로 방송되는 한국일보 제공 라디오 코리아의 첫 방송 순서입니다”라는 오프닝 멘트에 이어 뉴스를 소개했다. 당시 이 방송은 한국일보 매체를 통해 동포사회에 알려졌다. 이후 토요일의 한시간 방송이 매일 2시간으로 확장됐다. 한국일보는 TV 방송에도 진출해 76년부터 UFF 방송의 Ch-98에서 30분간 방송했다. 그 당시 金영우 아나운서와 맹경원 아나운서는 한인 TV방송 사상 최초로 생방송 뉴스를 진행했다. 현재까지도 한인 TV방송에서는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곳이 없다. 金 씨가 1981년 7월 한국일보 방송국장 자리를 떠나면서 한국일보 TV와 라디오도 중단됐다.

한국일보를 떠난 金 씨는 그 해 코리아타운에 ‘K-Productions’을 설립해 오디오 녹음과 비디오(TV 광고) 제작을 시작했다. 사업을 하면서 라디오 방송을 잊을 수 없던 金 씨는 84-85년에 KIEV라는 TV 방송과 그리고 방송인 정진철 씨(현 라디오서울 부사장)와 함께 KCB-TV를 시도했다. 다시 방송계를 떠난 金 씨는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맡지 않는 일이었다.

90년에 들어서 한국일보가 다시 TV방송을 구상하면서 金 씨를 부사장으로 영입해 오늘의 KTAN-TV를 설립했다. 金 씨는 TV전파를 찾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노력으로 개국하게 됐는데 처음은 MDS라는 특수 안테나와 트랜스미터를 각 가정에 설치해야만 시청할 수 있었다. 당시 KTAN은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를 위성으로 중계해 한인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렇게 KTAN 방송의 뿌리를 내리게 한 金 씨를 한국일보는 감원선풍 제1호로 찍었다. 金 씨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KTAN 방송의 최초를 시작한 나는 최초로 KTAN 방송국을 걸어 나왔다. 생각하면 섭섭하고 허무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시작했던 이 방송이 계속되는 한 金 영우가 심어놓은 그 뿌리와 밑거름은 아마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일보 사장들은 내가 뿌려놓은 KTAN 방송의 씨를 알아 주려고 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을 지 모르나 이 방송이 탄생하게 된 동기와 그 실록의 과정은 지우지 못 할 것이다”

갑신년 새해를 맞아 방송인 金영우 씨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방송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하이-미디어 프로덕션(Hi-Media Productions)’을 설립했다. 첨단장비로 DVD와 CD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특히 지나간 각종 영상자료나 음향자료를 CD나 DVD로 재생시켜 영원히 보존할 수 있게 한다. 지난동안 일반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비디오 카세트 등 S-VHS, VHS, HI-S, U-MATIC, Betamax, DV, DVCAM, Data 파일이나 자료들을 DVD나 CD로 재생하여 준다. 또 음향 자료인 카세트 테이프, 릴테이프(Reel Tape), 8-Track, LP레코드, SP 레코드판 등을 포함한 일체의 뮤직파일도 CD로 재생하여 준다.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40년의 TV와 라디오 방송경험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金영우 씨의 프로덕션에서는 기업 등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회사의 이미지 창출이나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작품도 신선한 아이디어와 축적된 기술로 제작해준다. 또한 개인의 자서전이나 활동 사항들도 DVD로 영상화해 영원히 보존하게 만들어 후세에 남길 수 있게 한다. 물론 가족사나 단체들의 활동역사도 담아 준다. 金씨는 지난 40년 동안 한인사회 행사를 포함해 각종 자료를 모아왔기에 영상작품이나 음향작품에 긴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의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영원히 보존케 하며 비전을 남길 수 있는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전해주는 것이다.

문의전화 : (818)505-0197
셀룰러폰 (213) 700-9522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