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파리 공관 지하실 살해說… 가능성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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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욱 씨와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
장을 지낸 바 있는 방준모 씨. 사진은 지난 93년 경 모습.

‘김형욱 실종사건’ 중간발표와 관련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김형욱 실종사건’에 있어 증언자로 자주 등장하는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미국 거주, 김형욱 씨와 육사 8기 동기생)이 ‘국정원 중간발표’와 관련 이색적인 주장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방준모 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형욱 암살계획에 내가 포함될 뻔 했던 일이 있었다(이 부분은 추후 기사화하기로 함)”고 전제한 뒤 “이 모든 것은 이상열 공사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입을 열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박상균<취재부 기자> [email protected]


기자 :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중간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어느 정도 내가 그 동안 말해왔던 얘기와 일치했고(방준모 씨는 중정 훈련생들이 개입되었다는 주장을 해 옴), 의미는 다소 다르지만(국정원 중간발표에 중정 연수생이라는 표현을 의식한 듯)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다 맞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약간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기자 : 구체적으로 미심쩍은 부분은 무엇인가.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일단 나는 오래 전부터 중정의 연수생(훈련생)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해 누차 말해 왔다. 그 부분은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는가(반문). 하지만 외국인 2명을 고용해 10만 달러를 주고 살해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오래 전에 자신이 ‘김형욱 암살조 대장’이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공군 대위 출신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다른 1명과 함께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하는 고백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기자 : 다른 1명은 누구인가.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너무 오래 되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김정일’이라는 이름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 등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도중 나를 직접 찾아와 맥주를 같이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기자 : 최근 나돌고 있는 ‘파리공관 지하실 살해說’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설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엔 프랑스 경찰과 정보기관이 그토록 수사했는데도 단 하나의 단서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번 발표로 이상열 공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확인되었고, 그렇다면 치외법권 지역인 공관에서 살해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기자 :  평소 이상열 공사가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 해오셨는데…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이번 국정원의 중간발표에도 나타나듯 그 사람(이상열 공사)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 또한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일부 언론들의 ‘흥미성 보도’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국가가 벌인 실책’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說들만을 무수히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니냐. 언론의 본분을 지켜줬으면 한다.


기자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라도…

방준모 前 중정 감찰실장 : 그간 갖가지 추측과 가설이 난무하게 된 배경에 ‘언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취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개입되어 1명의 국민을 말 그대로 ‘조용히 죽여버린’ 엄청난 사건이 ‘김형욱 실종사건’의 요체가 아닌가.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국가적으로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흥미’ 위주의 접근은 금물이다.







김형욱 실종사건… “국정원 중간발표가 미심쩍다”                                      


김재규 살해지시 외국인 청부살해 등 정황에 ‘의구심’


유인·납치·살해지시 중간발표 ‘시나리오’ 가능성


앞뒤 정황 맞지 않은 국정원 중간 발표로 의혹 증폭                            
그 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이야기 종합·정리해 발표한 꼴


국정원 과거사 진상위 중간발표로 오히려 혼선가중                    
“침묵일관 이상열 공사가 입 열어야 한다”여론확산

진실위 민간위원들 “겉치레성 사건조사 참여” 논란                      
국정원 발표 의문투성이… “성급한 발표 속셈있나”


김재규 변호인 강신옥 변호사 “김재규 지시 아니다”
김형욱 씨 육사동기 방준모 씨 “미심쩍은 부분 많다”
김형욱 살해되기 前 이상열 공사와 시내 카페 및 카지노 등지에 동행


김형욱 회고록 집필 김경재 前 의원 “국정원 조사 문제있다” 반론 제기
“참여 민간 위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나” 국정원 중간 발표 비난 고조

국정원 중간 발표 통해 오히려 이상열 공사에 사건전모 밝혀주기를 기대해 「주목」


















▲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씨를 변론한바 있는 강신옥 변호사(사진
우측)는 국정원의 중간발표 내용인 ‘김재규 지시에 따른 살해’에 대
해 이견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 26일 오전(한국시각)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가 갖가지 추측과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 이를 ‘잠재우자’는 의미에서 중간발표를 했는데, 이러한 발표내용이 공개되자 오히려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은 ‘중간발표’ 내용 중 ‘김재규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부분과 ‘외국인을 고용해 청부 살해했다’는 정황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는 상태다. 우선 ‘김재규 前 중정부장의 지시’와 관련한 부분과 관련 과거 10,26 사건 당시 김 씨를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씨로부터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해 ‘나는 연관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를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지난달 31일(한국시각) 1979년 ‘10·26사건’에서 김재규 前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변론 당시 김 前 부장을 면담한 내용이 담긴 ‘변호 접견록’을 공개하고 진실위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강 변호사가 소장 중인 66페이지 분량의 ‘접견록’에는 김재규 前 부장의 최후진술과 검찰 수사기록, 합수부 조사기록, 김재규 前 부장의 자필 자작시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와 관련 강 변호사는 “1979년 11월 29일부터 이듬해 5월 15일까지 일주일에 두세 차례 접견했지만 검찰 수사기록과 접견기록 어디에도 김형욱과 관련된 조사내용이 없다”면서 “당사자인 김 前 부장도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나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무 연관 없다’며 오히려 지인을 통해 (이 사건을) 알아봐 달라고 할 정도로 강력히 부인했었다”고 밝혔다.

김형욱 씨의 회고록을 집필한 바 있는 김경재 前 민주당 의원은 지난 29일(한국시각) CBS 라디오에 출연해 “김재규 부장과 김형욱 前 부장은 둘 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며 “김재규 부장이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같은 김형욱을 살해하라는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명령을 내릴 리 만무하다”고 말하는 등 ‘국정원 진실위’의 중간발표 내용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김형욱 씨와 육사 8기 동기생으로 김형욱 씨가 중앙정보부를 이끌던 시절 중정 감찰실장을 지낸 바 있는 방준모 씨(미 시민권자로 미국거주)는 이번 국정원 중간발표와 관련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알기로는 외국인 2명을 10만 달러로 고용해 살해했다는 부분은 미심쩍은 부분이다”라고 전제한 뒤 “공군대위 출신 김정일이 권총으로 직접 살해했다는 고백을 직접 당사자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했다. 최근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 측 또한 직접 미국을 방문해 ‘방준모 씨와의 면담‘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지난 26일 오전(한국시각) 발표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소개키로 한다.








▲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6일 오전(한국시각)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손호철 위원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동안 오충일 위원장(왼쪽)과 김만복 위원(국정원 기조실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건 개요


김형욱 前 중앙정보부장은 63년 7월 이래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69년 10월 박정희 前 대통령이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전격 해임하고 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하자, 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

김형욱은 77년 6월 `뉴욕 타임즈’ 기자회견 및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前 대통령을 강력 비난한데 이어, 박정희 정부의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을 추진.

박정희 정부는 77년 6월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김형욱을 설득-회유하는 한편,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개최한데 이어 김형욱을 실질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77년 12월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반국가 행위자의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김형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하였으며, 동 과정에서 김형욱은 79년 10월 1일 단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 10월 7일 저녁 파리 시내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

그간 각종 언론보도 등을 통해 국제 범죄조직 또는 정치적 보복에 의한 프랑스 현지 살해, 국내 압송 살해 등 각종 의혹들이 유포되어 왔고, 그 배후에는 당시 박정희 정부와 그 예하에 있는 중정이 이를 주도하거나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왔음


조사내용 : 관련인물 면담조사 : 총 33명


사건당시 중정 주불 거점 요원 및 연수생 : 8명


1) 이상열 공사(76세, 당시 주불 중정 거점장 / 3차례 면담조사) : 김형욱 실종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건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진술 거부 의사를 표명.

2) 신현진(가명, 당시 주불 중정 연수생 / 7차례 면담조사) : 김형욱 살해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음을 시인하면서, 동 살해 진행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 다만, 사체 유기 장소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 회피.

3) 이만수(가명, 당시 주불 중정 연수생 / 6차례 면담조사) : 김형욱 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하급자로서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시인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회피.
4) 김철진 및 이일만(가명, 당시 중정 주불 거점 요원 / 김철진은 1차례, 이일만은 3차례 면담조사) : 상기 양인은 사건 당시 파리 현지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연수생 등 일부 김형욱 살해사건 가담자들은 이일만이 동 사건의 기획 임무를 담당하였다고 진술.

5) 여타 연수생 3명(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연수생 6명중 사건 가담자인 신현진, 이만수와 사망자 1명을 제외한 생존자 3명에 대해 각각 면담조사) : 연수생 1명은 김형욱 실종사건에 이상열 공사, 공관원 이일만, 연수생인 신현진과 이만수가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하였으며, 다른 연수생 2명은 사건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답변.

6) 중정 본부 지휘계통 간부 및 직원(5명) : 중정 본부 차원의 조직적 가담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79년 10월 당시 그 직위에 있던 윤일균 해외담당 차장, 김○○ 해외담당 국장, 이○○ 해외담당 부국장, 조○○ 유럽담당 과장, 황○○ 유럽담당과 주무관 등을 각각 면담 조사. 상기명 모두 사건 당시 중정 차원에서는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열 공사는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 상기명들은 김형욱 실종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인 79년 10월 16일 경 사건 진상파악 노력을 시작한 점으로 보아 사건 개입 가능성 희박.

7) 지원업무 담당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중정 직원(4명) : 사건 당시 해외통신 등 지원업무 담당자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직원 4명에 대한 면담 조사한 결과, 김형욱 실종사건 개입 정황 미발견.

8) 합수부 관계자 및 특파원 등 사건 주변인물(16명) : 79년 10.26 사건 직후 김재규 前 중정부장을 조사했던 전두환 前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이학봉 前 합수부 수사국장은 각각 면담 시 10.26 사건 당시 김형욱 사건을 조사하거나 보고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 신○○(조선), 주○○(중앙), 박○○(동아) 등 사건 당시 파리주재 특파원 등 언론인 8명을 면담한 결과, 그간 제기된 의혹 이상의 구체적 정황이나 진술은 없었음. 김경재 前 민주당 의원(2회), 송진섭 안산 시장(1회)을 면담하여 청와대 경호실 개입설 진위 여부 등을 문의하였으나, 사건 진상 규명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음.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된 연예인 최○○, 정○○ 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 정황 미발견.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김형욱 사건의 진상을 직접 득문 하였다고 주장하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김재규 부장 감시 헌병 박○○을 2차례 면담 조사하였으나, 사건 실체를 알고 있진 못한 것으로 평가.


조사 결과


김형욱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의해 중정 주불 거점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짐.


1. 살해 동기 
 
73년 4월 김형욱의 미국 망명 이후 박정희 前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하였으나, 김형욱은 계속 불응. 김형욱은 77년 6월 2일 `뉴욕 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 이어 6월 22일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김대중 납치사건 등 박정희 정부의 내부비리 폭로 계획을 추진. 이어 박 대통령은 77년 6월 16일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형욱의 미 하원 청문회 출석 저지를 위해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특사로 파견하여 김형욱이 자제토록 설득-회유하라”고 지시. 한편, 박정희 정부는 77년 6월 말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개최한데 이어, 77년 12월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윤일균 前 중정 해외담당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 김형욱이 김경재(필명: 박사월)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을 추진하자 – 박 대통령은 78년 12월 김형욱과 동향으로 친분관계에 있던 자신(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과 회고록 관련 협상을 추진토록 지시하였으며 – 이에 따라 자신이 방미, 김형욱에게 미화 50만 불을 주고 회고록 원고를 받아내었으나 – 79년 4월경 일본의 한 군소 출판사가 동 회고록 문고판을 출간함으로써 박정희 정부의 김형욱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음.   

한편, 김형욱은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중정부장 재직시 지득한 중정의 대미 공작활동 등 각종 국가기밀을 폭로하였는 바, 이 같은 행동이 박정희 정부와 중정의 입장에서는 정부 내부의 치부와 국가기밀이 누설되어 국익을 해치고, 정부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게다가 김형욱 자신이 상기 국가기밀 사업들을 기획-집행-감독한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심한 배신감마저 느꼈을 것임.

이 밖에 김형욱의 개인적 비리와 부도덕한 행적은 김형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심화 시켰을 것임. 김형욱은 미국 망명 당시 재산이 15만 불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 결과 1,500∼2,000만불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 미국 생활 시 8만불 상당의 호화 카펫이 장식된 30만불 이상의 고급 주택에 살면서 자식들에게 대당 3만 불이 넘는 벤츠 자동차를 사주는 등 호화 사치 생활을 즐겼고(출처: 문일석, `비록 중앙정보부Ⅲ’. 1993), 도박에 탐닉, 카지노에서 한번에 수 만불 이상의 돈을 날리는가 하면, 78년 1월 18일 파리에서 뉴욕 입국시 7만 5천불 상당의 현금을 밀반입하려다 적발되어 미국 관세법 위반으로 보호감시 1년을 선고(78.3.15) 받은 적이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 온 회고록 출판조차 박정희 정부와의 돈 거래에 활용하는 등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행적을 보였음.

이에 따라 당시 박정희 정부 내에서는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막대한 외화를 해외로 빼돌려 도박 등으로 탕진하고 국가기밀을 무차별 폭로하는데 대해 대단한 증오감과 배신감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이 중정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前 수장을 살해하는 엄청난 일에 조직적으로 쉽게 참여하게 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임.


2. 살해지시


김형욱 실종 사건이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의해 이상열 공사 주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래 이유로 확실시 됨. 79년 9월말 이상열 공사가 신현진에게 김형욱 살해 임무 부여시 김재규 부장의 지시임을 분명히 밝힌 점(신현진 진술). 신현진이 사건 후 귀국하여 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처리 결과를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이 크게 칭찬, 격려하고 포상한 점(신현진 진술).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 실종사건 발생 직전 79년 10월 1일 경 비밀리에 귀국하여 김재규 부장을 2차례 만난 점(10.26 사건 당시 김일곤(가명, 사망) 중정 차장보가 합수부 조사 시 진술).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 사건 발생 직후 79년 10월 18일 은밀 귀국하여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하고, 10월 19일 파리로 귀환한 점(국정원 존안 문서 및 조○○ 당시 중정 유럽담당 과장 진술) ※ 김재규 부장은 79년 9월 말 이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상열 공사가 79년 10월 1일 경 귀국 시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한 후 뒤에 기술되는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판단됨.

김재규 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현지 중정 연수생 2명 등에게 김형욱 살해 관련 임무를 부여하고, 동 연수생들이 준비를 진행. 다만, 김재규 부장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살해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 부재와 당사자들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 관계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77년 6월 16일 박 대통령이 김형욱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77.6.22)을 앞두고 민병권 당시 무임소장관을 급히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청문회 출석을 저지하라는 지시를 직접 내린 바 있고, 윤일균 前 중정 해외담당 차장도 “78.12월 박 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저지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박 대통령이 김재규 부장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박정희 前 대통령이 김형욱의 박 정권 비난 활동에 대해 분개하고 김형욱의 미 하원 청문회 출석 및 회고록 출간 저지를 지시한 사실은 분명하나,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형욱 살해를 직접 지시하였는지 여부는 추가 확인 필요.


3. 살해 준비


가. 살해 가담자 물색 : 김재규 부장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79년 9월경 김형욱 납치 및 살해 임무를 연수생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신현진 등 당시 파리 연수 중이던 중정 연수생 5∼6명을 자택으로 초대하여 대화 도중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다”라는 등으로 질책, 젊은 연수생들의 정의감을 부추기면서 반응을 타진. 연수생들에게 파리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의 현황과 실태 등에 대한 관찰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토록 하여 그 내용 검토를 통해 적극성.과단성 등 개개인의 자질을 검증한 후 최종적으로 신현진, 이만수(모두 가명) 등 2명을 적임자로 선정. 79년 9월 경 이상열 공사는 신현진과 이만수를 파리 시내 미상 카페로 불러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 등에서 탕진하고 있으며,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라면서, 상부의 지시로 김형욱을 처치해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 암시하면서, 신현진과 이만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지시. ※ 당시 중정 직원들은 김형욱을 국가를 배신한 역적으로 인식.

79년 9월말 경 이상열 공사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푸께’ 카페로 신현진을 별도 호출.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다. 일단 임무를 전달 받고 나면 자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라며 살해 임무를 암시한 후 “김재규 부장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적으로 해 주었으면 좋겠다”면서 임무를 부여. 신현진은 임무 내용을 직감하고 “어려움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김형욱이죠?”라고 반문하자, 이상열 공사가 고개를 끄덕여 확인.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에게 “보내겠습니다(처치하겠다는 의미로 사용) 그 대신 모든 것은 나의 주도로 하겠습니다”라며 김형욱 살해를 자신이 책임지고 추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 ※ 신현진은 당시 중정 연수생들이 어렵게 생활하던 상황에서 중정 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하룻밤에 수십만 불을 날리고 다니며, 개인영달을 위해 국가기밀을 무차별 폭로한다는 등의 얘기를 듣고 극도의 증오심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적극 실행할 것을 결심했다고 진술.


나.살해 계획 수립 : 신현진은 김형욱을 살해하기 위해 –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사건을 청부키로 하고 동인들을 접촉하면서 미화 10만 불 제공 조건으로 살해를 의뢰, 승낙을 받고, 2∼3천평 규모의 파리 근교 `샤또’(農園이 딸린 옛날 城)를 빌려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샤또’ 내 적당한 곳에 땅을 깊이 파고 매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샤또’ 임대 계약금 명목으로 3천 프랑을 제공(실제 김형욱 살해 당시까지 `샤또’를 임차한 바는 없었음). 또한, 평소 기질이 맞아 친근하게 지내던 후배 연수생 이만수가 임무 수행 시 보조역할을 맡기로 한 후 상기 제3국인 친구 2명을 이만수와 함께 수차 접촉, 상호 친분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파리 시내 소재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김형욱 살해에 사용할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고, 79년 10월 초 경 이상열 공사를 다시 접촉, 임무수행에 필요하다면 미화 10만 불과 권총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살해 준비를 진행


 


4. 살해과정


가. 살해 기회 포착 : 79년 10월 7일 오후 늦게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열 공사 집에 도착하자,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는데 돈이 없다고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2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이 나오기로 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다.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불러라”라고 지시. ※ 김형욱 처 신영순은 김형욱이 79년 10월 1일 파리 방문시 이상열 공사를 믿고 혼자간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이상열 공사는 김형욱이 살해되기 전에 김형욱과 함께 파리 시내 카페 및 카지노 등지를 동행한 사실이 있었던 바, 이로 보아 김형욱과 이상열 공사는 상당 수준의 신뢰가 형성된 관계로 평가.

신현진은 인근 공중전화를 이용,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에게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리도 극장’ 앞으로 급히 나오도록 연락한 후, 이상열 공사를 조수석에 태운 채 자신이 이상열 공사 관용차(푸조 604)를 직접 운전하여 `리도 극장’ 앞에서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를 접촉, 동인들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설명하였으며, 이만수에게는 미화 10만 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개선문 근처 `빨레 데꽁그레’ 빌딩과 인접해 있는 `콩코드 라파예트’ 호텔 34층 `르 플랭시엘’ 바에서 대기하도록 지시. 이만수를 먼저 보낸 후 조수석에는 이상열 공사, 뒷좌석에는 제3국인 친구 2명을 태운 채 신현진이 운전하여 `리도 극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형욱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차내에서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미리 받아 지니고 있던 소음권총 1정과 독침 중 권총을 뒷좌석의 제3국인 친구에게 제공.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김형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상열 공사가 차에서 내려 김형욱에게 인사를 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제가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제가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한 전주(錢主)들입니다”라고 설명한 후, “이 분들과 어디 가까운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겠습니다”라면서 김형욱을 승용차 조수석에 앉게 하고, 자신은 현장을 이탈. 김형욱은 카지노 도박 자금을 빌릴 목적으로 연수생 신현진이 운전하는 이상열 공사 관용차 조수석에 앉아 뒷좌석의 제3국인 2명과 돈 빌리는 문제를 협의할 카페로 가는 줄 알고 출발 ※ 신현진은 김형욱이 카지노에서 며칠간 밤을 세웠는지 초췌한 얼굴로 술에 어느 정도 취해 있었던 상태였으며, `알콜 중독자’ 같은 느낌이 들어 “어찌 이런 자가 중정부장을 지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

김형욱의 파리 유인과 관련 79년 10월 1일 김형욱이 부인 등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떠나간 이유에 대해서는 미상 연예인의 유혹설, 회고록 출판포기 대가 잔금 수령설 등이 있으며, 김재규 중정부장과 이용운 前 해군 참모총장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하나, 이들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이상열 공사 등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조사 필요.

나. 살해 결행 및 사체 처리 : 신현진이 김형욱을 이상열 공사 차량에 태운 시각은 날이 어느 정도 어두워져 전조등을 켰을 때이며, 신현진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제3국인 친구들이 지시하는 대로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가던 중 김형욱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3국인 친구가 갑자기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주먹으로 수 차례 가격, 실신케 함. 승용차는 파리 시내를 이탈, 파리 교외로 이동하였으며, 길가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 인적이 드물고 작은 숲이 내리막 방향으로 이어진 장소에 도착하여제3국인 친구 2명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서 실신해 있는 김형욱을 양쪽에서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내려 도로 우측 숲속으로 끌고 내려간 후 약 30분쯤 지나 돌아왔으며, 제3국인 친구 2명은 신현진이 U턴 시켜놓고 기다리던 승용차에 탑승하여 김형욱의 바바리 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 등의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네주면서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였으며, 시체는 땅을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있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고 보고. 당시 신현진은 제3국인들이 김형욱을 살해한 후 권총을 분실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신속한 현장 이탈을 위해 권총 회수를 포기하였으며, 계속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낙엽들에 의해 사체가 두껍게 덮여질 것이라고 판단. 살해 당시 총성은 들리지 않았으나 제3국인들은 권총 실탄 7발을 모두 쐈다고 언급하였으며, 신현진은 이들에게 불어로 “잘 했어”라고 격려하고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여 이만수로부터 미화 10만 불이 든 가방을 받아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전달하면서, “내일 중으로 프랑스를 떠나라”고 지시.

김형욱 살해 및 사체 처리 등 사건 결행 부분은 전적으로 신현진의 진술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여타 가담자인 이상열, 이일만, 이만수의 진술을 통해 신현진 진술의 진실성을 검증하고, 신현진이 진술해 주지 않은 사항 등을 보완할 필요. ※ 신현진은 최초 면담 시 김형욱 살해 후 이만수가 이태리 밀라노로 가서 제3국인 2명을 만나 미화 10만 불을 전달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이만수가 밀라노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실을 2차 면담 시 지적하자 진술을 번복한 바 있음. 특히, 신현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체 유기 장소를 진술치 않고 있는데 대해 추가 조사 필요.


다. 사후 조치 및 보고 : 신현진은 제3국인 친구들을 보낸 후 곧바로 이상열 공사 관저로 가서 이 공사에게 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이상열 공사는 “수고했다”며, 여권-지갑은 자신(이상열)이 가지고 다른 소지품들은 신현진에게 주면선 “철저히 인멸한 후 즉시 파리를 떠나 귀국하라”고 지시.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 집을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김형욱의 시계는 세느 강에 던져 버렸으며, 바바리 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자신이 이전에 살던 하숙집 근처 쓰리기통에 버림. ※ 동 쓰레기통은 매일 청소차가 수거, 내용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분쇄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

한편, 신현진은 이만수에게 즉시 파리를 떠나 귀국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사건직후 프랑스를 떠나면 오히려 주변 친구 등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사건 발생 3일 후에 귀국하였으며, 출국 전 이상열 공사는 “그림(살해 경과)에 대해서는 `신’군한테 들으십시오”라는 내용의 밀봉되지 않은 서신을 김재규 부장에게 전달하라고 지시. 신현진이 귀국후 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처리결과를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은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 하는 곳이야?”라며 격려하였으며,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하였다고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은 “괜찮아, 소련제 권총이니 발견되어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 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달. 이어 김재규 부장은 신현진에게 “근무하고 싶은 데가 어디냐?”라고 물어 “저는 이미 해외담당국 구주과로 발령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러나 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면 어떻겠나? 내 직속기관이야”라고 하며, 즉석에서 비서실장을 불러 “신 군을 정책연구실로 발령 내라”고 지시한 후 “집은 어디야?”라고 물어 “여동생 집에서 다닙니다”라고 하자, “앞으로 장가도 가야 하고 집이 하나 있어야 되겠네. 신혼 살림을 하려면 한 4∼50평 정도면 안되겠나?”라고 하면서 “집을 알아보고(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이리로 전화해. 내 비서가 받으면 `부장님과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해. 내가 알고 있는 `신’ 군은 자네밖에 없어”라고 언급.

한편, 연수생 이만수도 사건 직후 귀국하여 김일곤 차장보에게 살해결과를 보고하고, 김 차장보로부터 액수 미상의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으며, 김재규 부장이 준 돈도 신현진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진술.


향후계획 


금번 중간조사 결과 발표 시 미흡한 부분은 계속적은 조사를 통해 구체화 시켜나가겠으며, 이를 위해 사건 가담자들로 확인된 이상열, 신현진, 이만수 등을 계속 설득하여 사체 유기 장소 파악에 협조토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계획이며, 특히 김 前 부장의 유골을 수습하여 유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임. 동 사건의 완전한 진상 규명을 위해 살해 지시 수령, 가담자 물색 및 모의, 권총-독침 등 사전 준비, 사후 처리, 사건 후 일시 귀국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 등 사건 전모를 소상하게 알고 있을 이상열 공사가 사건 전모를 더욱 소상하게 고백해 주기를 기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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