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인질들을 위해 정부와 국민이 할 수 있는 무엇이던지 해야 성급함이 화 자초
두려움 없는 선교활동 최근 인질사건과 관련해 인터넷 등에서 단기선교나 봉사팀을 매도하는 글을 보고 마음이 아프다는 김 목사는 “비난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못한 일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비난만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위험지역 선교에 대해서 “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선교를 두려워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니다”면서 “두려움 없이 다시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초대교회 교인들이 로마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죽음 위에 영광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며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어떻게 했는가를 오늘의 선교팀들이 되새겨봐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선교지에 있을 때의 경험도 들려줬다. “지난 86년 처음 아프리카 케냐 지역 단기선교에 나섰을 때 느닷없이 멧돼지 떼들이 나타나 선교 차량과 충돌하는 바람에 제가 크게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때 현지 전문가의 조언에 귀기울였다면 그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는 지난 2003년 아프리카 감비아의 브리카마라는 작은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 곳은 그가 89년 감비아 선교 여행 당시 원주민들과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찾아간 곳. 전체 인구의 98%가 이슬람인 감비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현지 목회자들의 선교 신앙은 독특했다. 이들에겐 성경보다도 기독교인의 삶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한다. 당시 김 목사는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과 영어교육을 실시했는데 함께 동행한 김목사의 딸 헬렌 김씨와 아들 에드워드 김이 맡았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에선 주민들에게 가르쳐준다기보다 번번히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며 “아들, 딸을 동행한 것도 이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에서 활동한 후 은행의 고위 간부로서 민족복음화 운동에 앞장섰던 김목사(한국에서는 평신도였음)는 당시 한국에서 해외선교를 하려면 어려가지 제약이 많아 이민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미국에 와서 찾아간 곳이 바로 LACC 커뮤니티 대학이었다. 우선 그곳의 한인학생을 중심으로 성경반을 만들었고 이듬해 한인사회에 처음으로 선교단체를 설립했다. WMC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단기선교팀을 파송한 것은 82년 한국. 그후 86년 케냐, 감비아, 중국, 러시아, 파나마 등으로 선교지를 확대해 나갔고 현재 12개국에서 WMC출신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213) 500-0962 |
LA한인교계 최초 선교단체 WMC 김정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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