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보상과 명예회복은 한인사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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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폭동 특집 기획연재
(1) 잊혀진 4.29폭동’의 진실
(2) 4.29 폭동성금의 진실(상?중?하)
(3) 한인정체성 확립과 4.29
(4) 4.29와 흑인민권운동
(5) 4.29와 미주한인사회


4월 29일이 다가온다. 올해는 4.29폭동 18주년이 되는 해다. 폭동이 발생한지 2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잊혀진 4.29’는 여전히 우리 앞에 초라한 모습이다. 엄청난 피해는 망각의 시대에 묻혔고 한인사회는 4.29를 기억하는데 인색하다.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 내부에서는 “우리도 미국 주류층에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인식이 불 붙었지만 지난 세월 대부분 ‘작심삼일’로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거액의 피해 성금을 둘러싼 진실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채다. 폭동으로 인한 한인사회의 피해보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더 중요한 것은 폭동 당시 왜 한인사회가 미 정부나 언론 등 제도권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흑 갈등의 주모자로 인식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인사회는 4.29폭동으로 당한 고통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미 정부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이 4.29폭동에 대한 우리 한인사회의 지상 과제다.
                                                                                                    <성진 취재부기자>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각기 고난의 역사가 있다. 이민자 커뮤니티는 고난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동양계 이민자들은 ‘황색인종’으로 차별을 받아왔다.
동양인 중에서 제일 먼저 미국 땅에 들어 온 중국인들은 엄청난 차별을 견뎠다. 중국인들은 미국 대륙을 연결하는 철도 공사에 투입되어 미국 개척에도 큰 기여를 했으나 극심한 차별로 마치 남부에서 흑인들이 당한 것 이상의 억압을 당했다. 1920년대엔 아예 중국인들을 미국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법까지 제정됐을 정도다. 이는 중국인들의 미주이민 역사에서 가장 큰 고통의 시절이었다.
두 번째로 미국 땅에 이민한 일본인 역시 차별과 억압을 당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발생하자 미국정부는 미국 땅의 일본 이민자들을 ‘적대국민’으로 간주해 수용소에 몰아넣었다. 미국 땅에서 갓 태어난 일본계 시민권자인 유아도 부모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는 일본인들의 미주이민 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건이다.
한국인들은 1800년대 후반부부터 중국 이민자와 일본 이민자들과 함께 광부, 철도노동자, 인삼장수, 유학생, 정치망명자 등의 신분으로 소수가 미국 땅에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13일 최초로 대한제국 여권(집조)으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이민자 신분으로 102명의 미주이민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래 본격적인 이민 역사가 시작됐다.
한인의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이민은 1905년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이래 중단됐으며, 그 후 1910년 일제의 강제합방으로 한인들은 일본 여권으로 미국에 들어오게 됐다.
또 다른 방법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 중국 땅이나 러시아 와 유럽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가, 유민으로 살면서 중국여권이나 무국적자로 미국 땅에 입국했다. 1900년대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본토인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면서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됐다.


망국의 설움 달랜 국민회

이들 초기 이민자들은 망국의 설움을 안고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애국단체인 공립협회가 나중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면서 을사보호조약 폐기운동, 국권회복 및 동포의 안녕과 복리신장을 목적으로 미주에서 최초의 한인 연합체가 됐다.
국민회는 신한민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당시 미국, 멕시코, 중국,유럽 및 러시아 등지의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애국심 고취시켰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아침 9시 30분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빌딩에서는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바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더함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는 조국의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때 미주에서의 최초의 항일의거였다. 이 같은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의거는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이어졌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미주 땅에서 ‘임시정부’ 역할로 인정을 받을 만큼 신임을 획득했다.
1913년 남가주 지방 헤밑(Hemit)의 미국인 농장에 한인 11명이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중 일본인 노동자로 오해를 받아 현지 주민들에 의해 축출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영사는 추방당한 한인을 심방하고 “이 사건을 미국 정부에 교섭해 배상을 받아 주겠다”며 간섭하려하자 한인 노동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후 국민회가 나서 현지 주민들과 교섭을 진행서 협상을 마무리했고 국민회 총회장 이대위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미국정부에 발송해 한인과 일본인간의 대우를 달리 해줄 것을 요구한 일이다. 다음은 당시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이 보낸 전보의 전문이다.



“상항 발 전보”
수신: 미국정부 국무장관 Bryan귀하
<근일 한인 11명이 Hemit지방에 일하러 갔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축출 당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본영사가 간섭하려고 하나 우리가 일본관리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귀국의 법률 밑에 사는 한인들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합방을 반대하며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니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 사회에 교섭하기 바랍니다. 1913년 6월 30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이대위 >


이에 미국무부에서 윌리엄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아래와 같은 회신을 보내왔다.


“미국 국무성 성명”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 말하기를 재미 한인은 대개 한일 합방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고 한일 합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 하니 이제부터 재미한인에게 관계되는 일은 공이나 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말고 한인 사회를 통하여 교섭 할 것이다.
1913년 7월 13일 미국 국무장관 William J. Bryan >


미 국무장관의 성명으로 인해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에서 재미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많은 우국인사들 중 541명이 여권도 없이 국민회의 보증만으로 망명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으로 입국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19년 3월 1일 조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한인들도 대한인국민회가 중심하여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대한인국민회는 조국이 독립된 1945년까지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독립 후 미주한인사회는 1948년 선포된 신생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에는 미주 한인들이 원동력이 될 정도로 인적자원의 바탕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 땅에는 입양아들과 국제결혼 여성들이 이민하게 되었으며, 1965년 이민법개혁법으로 본격적으로 대규모 이민 행렬이 이어지면서 LA코리아타운이 형성되고 미 중요 도시를 거점으로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됐다.
1992년 4월29일에 발생한 LA폭동은 미주한인 이민사에서 최대 수난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4.29폭동으로 미주한인사회는 “우리가 힘이 없었다” “우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없었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게 됐다.
미주한인 이민사를 연구해 온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는 4.29를 바라보는 한인사회에 대해 “과거는 우리의 유산, 현재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 미래는 도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4.29폭동의 진상 규명과 한인커뮤니티의 명예회복은 우리 한인들의 숙원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끝)










“한인 대변 영문지 창립 시급”

깨닫지 못한 4.29의 교훈

다음은 이경원 재미 원로언론인이 지난해 4.29폭동 17주년을 기념하면서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의 요점은 미국사회에서 우리를 대변해 줄 언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매체는 우리말이 아닌 미국사회가 이해하는 영문지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대로 된 영문지 창간을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미 주류사회에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편집자 주 –


“용의자들을 모두 잡아와.”
고전명화 ‘카사블랑카’에서 부패한 비시 프랑스 정부의 르노 경찰국장은 릭의 도박장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4.29폭동 17주년이 다가오면서 나는 그의 조소하는 듯 한 명령이 자신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불타는 LA코리아타운에서도 울려 펴졌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언론이 조장한 대학살(*4.29폭동을 의미)로 인해 LA에서만 2000개 이상의 한인 비즈니스가 피해를 입고, 약 1만 명의 한인의 삶이 피폐해지고, 약 4억 달러의 재산손실을 입은 그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었는가?
“희생양을 찾아와.”
또 다른 불똥(*폭동을 의미)이 튈 때, 우리는 아마도 또 다시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도시지역의 희생양으로 선택될 것이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는 200여 만 동포를 자랑하지만 단 한 개의 영어 신문이나 주간지, 방송도 갖고 있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영문지로 힘을 쌓아온 중국계나 일본계 커뮤니티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를 대변해 줄 영문 매체가 없는 우리는 결국 한인사회에 적대적인 루머나 인종갈등, 또는 폭동사태와 같은 일이 발생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없어 큰 피해를 당할 운명이다. 심지어 한인고등학생들조차 학교 교실이나 교정에서 불량한 학생들을 상대해야 할 때 영어로 말해야만 그 것이 무기임을 알고 있다.
나는 영어가 서툰 한인 이민1세와 이제는 20-40대가 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들의 자녀들 사이의 크나큰 세대 간 단절이 매우 걱정스럽다. 이 두 집단은 한 밤중에 신호도 교환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항해하는 두 척의 배와 같다.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토론도 없고, 합의도 없고, 방향성도 없다. 영어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반 벙어리, 반 장님, 반 귀머거리들로 가득한 미국 전역의 한인타운은 이 나라에서 위태롭게 생존해나가고 있다.
미 주류언론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라티노와 흑인 같은 타민족 이웃들에게 한인사회를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주류언론들은 우리의 미주이민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인을 포함한 아시안을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인종으로 묘사해왔다.
사회 각 분야에서 긴장이 확산되는 요즘은 위험한 시기다. 잘못 알려지고 잘못 인식돼 있는 여러 소수민족 중에서도 겉으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변자가 없는 우리 한인사회는 인종간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요즘 같은 시대에 큰 취약성을 갖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왜 그럴까, 왜 우리일까?
나는 그 답을 알 수밖에 없다. 나는 과거 두 종류의 영문 주간지를 창간하고 편집했었다.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 발행된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전미 영문판 주간지인 ‘코리아타운 위클리’와 한-흑 갈등이 심화되던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인쇄된 한국일보 영문판이 그 매체다.
다민족 직원이 힘을 모았던 작은 조직인 첫 번째 타블로이드는 3,000명의 구독자를 확보했지만 광고수입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 2세 기자와 인턴으로 구성됐던 저명한 한국일보의 영문판은 4.29폭동을 전후한 시기에 한인사회의 유일한 영어 목소리로 활약했지만, 폭동의 후 폭풍 때문에 사라졌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학문분야와 사업과 IT벤처분야에서 우리처럼 큰 성장을 기록한 민족은 드물다. 우리에게는 수만 명의 변호사와 의사, 교수, 기술자, 과학자, 사업가, 금융인, 공무원이 있다.
언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한인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다루지만 훌륭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런 성공한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외면해 한인사회는 큰 리더십 부재현상을 겪고 있다. 언론과 정치 분야는 물론 커뮤니티 연합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절실하다.
한인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아래와 같은 문제 해결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10여 년 전 사회와 인종 차별로 인해 사우스센트럴 LA지역에서 발생한 혼란의 희생양으로 100개가 넘는 소수민족 중 왜 한인이 희생양으로 선택돼야 했는가?
한국어를 사용하는 1세와 영어권인 2세, 도시지역 저소득층과 교외지역 중산층, 입양인과 혼혈인, 미군과 결혼한 여성과 그 자녀들, 초기 이민자의 후손들 등 점점 다양해지는 한인사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개의 수준 높고 혈기 왕성한 두 영문 잡지인 코리암저널(Koream Journal)과 코리안 쿼터리(Korean Quarterly *동부에서 발간되는 영문계간지)가 역경과 희생, 육체적 소모를 극복하고 잘 성장한 것은 정말 작은 기적이다. 그들이 나의 대변자다. 여러분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두 녀석(*두개의 영문잡지)의 뻔뻔스런 추종자인 나는 이 두 간행물이 인종, 지리적, 이념, 국경을 초월해 급변하는 정치적 시대에 우리를 대표하는 소중한 창문의 역할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아버지(발행인 유종식)와 아들(편집장 제임스 류)에 의해 18년 전에 창간된 영문지 코리암저널은 LA를 벗어나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내 소수계 언론을 대표할 정도로 성장했다. 코리암저널은 소수계 언론의 퓰리처로 불리는 ‘뉴아메리카 미디어 언론상’을 거의 매년 수상하고 있다.
코리암저널과 마찬가지로 10년 전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독립미디어로 출범한 코리안 쿼터리도 그 분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잡지는 특이하게도 한인 자녀를 입양한 미국 부모가 이끌고 있는데,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내 생각에 코리안 쿼터리는 그 잡지의 비전과 통찰력, 깊이, 식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실로 전 세계의 한인을 위한 출판물이다. 상당수 기고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입양인들인데, 한국과 미주한인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크고 작은 다른 종이언론사와 마찬가지로 코리암저널도 코리안 아메리칸을 위한 유일한 월간지로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LA에서 영어로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코리암저널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투자해서 성장시켜온 코리암저널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이 천사의 도시에서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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