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고국에서 새인생 도전하는 ‘벤자민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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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은행가의 챔피언’‘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알려진 벤자민 홍 전 행장이 2012년 새해부터는 활동 무대를 한국으로 옮긴다. 미국에서 40여년간 뱅커로서의 경륜을 살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기업이나 기관 단체 등에서도 초청연사로 강연 활동을 하게됐다. 이미 지난해 한국에서 거주할 실버타운 룸도 마련했다.
특히 한미간 FTA협정도 조만간 발효되어 양국간의 인적교류와 교역도 증대될 것으로 예상 돼 한국의 여러 기업 등에서도 홍 전 행장에게 자문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최근 코리아타운에서 만난 홍 전 행장은 “새해부터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라면서“추운 겨울 동안은 남가주에 있으면서 대부분 시간은 한국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국내에서 지낼 거처도 마련했다”면서 “그동안 미국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통해 글로벌 코리아를 위해 돕고 싶다”고 밝혔다. <성진 취재부 기자>



홍 행장은 2012년 새해를 맞아 특히 4.29폭동을 잊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가 20년전  4.29폭동을 만날 때는 미국 은행에서 활동하다가 처음으로 한미은행장으로 영입되어 온지 4년째였다.

당시 4.29폭동은 벤자민 홍 행장에게도 크나큰 경험이었다. 하필 그날이 한미은행 1992년도 주주총회의 날이었다. 당시 세라턴 유니버설 호텔에서 주주총회를 끝내고, 코리아타운의 한국회관에서 식사를 하던 홍 행장은 폭동의 불길한 소식을 듣는다. 어둠이 내리면서 폭동의 불길은 코리아타운으로 번져 당시 본점 건물이 있는 올림픽 거리 앞 주유소도 전소됐다.

한미은행은 폭동 2일째인 4월30일과 5월1일은 은행을 폐쇄했다. 코리아타운 전체가 위험했을 뿐만 아니라 은행감독국에서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버몬트 지점이 융자한 아파트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홍 행장은 위험을 무릎쓰고 그 현장으로 나갔다.

그는 말로만 듣던 폭동을 직접 목격하고 보니 잠이 안 올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다. 언젠가 그가 책에서 읽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현재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전신인 뱅크 오브 이탤리의 지아니니 행장이 직원들에게 인력거를 가지고 길가에 나가 은행업무를 보게 했다는 귀절이 떠올랐다. 은행에 올 수 없는 형편인 고객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홍 행장은 단안을 내렸다. 5월 4일 폭동이 일단 멈추자 LA지역의 한국계 은행장들이 회합을 갖고 피해 한인들에게 모든 면에서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 홍 행장은 한미은행의 4.29폭동 피해 고객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겠다는 생각에 직접 80여개에 달하는 피해 고객업소를 돌며 위로하는 한편, 피해상황이 파악되는대로 피해고객과 상의해서 최대 지원책을 마련했다.

그는 약탈 등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아 금방 비즈니스를 복구할 수 있는 고객에게는 무조건 10만 달러까지 신용대출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미은행은 피해동포를 위한 성금도 기탁했다. 홍 행장은 피해자들이 재난복구융자 신청을 돕도록 은행의 대출담당 오피서들을 현장에 파견시켰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속담처럼 당시 도움을 받았던 고객들은 한미은행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1988년부터 어드밴스 푸드 마켓을 경영해 온 이흥룡 사장은 사업체를 구입할 때 한미은행에서 35만 달러를 융자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물도 아예 구입했다. 그런데 2년후 폭동에서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대신 한미은행과 다른 은행들에게 갚아야 할 융자금이 남았다. 한미은행 측에서는 대출 원금 및 이자 상환을 자진해서 연기해줬다. 당시 이 사장은 “우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은행이라 달랐다”고  말했다.



한인은행계의 신화창조


1988년 4월 한미은행장으로 취임한 홍 행장은 미국은행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한인은행 체질개선에 일대 개혁을 단행해 성공시킨다. 당시 미국은행에서는 성과 위주의 경영이 정착된 상태였다. 실적이 좋은 직원은 과감하게 승진시켰다. 그러나 한인은행들은 아직도 한국문화에 젖어있을 때였다.
그는 한미은행을 한국식 은행에서 미국식 은행으로의 경영방식 전환을 추진했다. 은행의 주요업무인 여신심사 및 관리를 미국식으로 하기위해 미국인 직원을 기용해 교육시켰다. SBA 융자도 한인은행 중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미국식 무담보 신용대출도 과감하게 추진했다. 융자뿐만 아니라 세일즈 기법도 외부강사를 초청해 직원들을 훈련시켰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케이스 스터디도 실시하고 M&A(합병) 공부도 시켰다. 매년 6명 정도의 대학 졸업생을 채용하는 등 자체 인재양성도 도모했다. 최초의 여성 지점장을 배출시키면서 나중에 최초의 여성 행장 시대까지 열어갔다.

그는 무엇보다 한인은행 내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상의하달식 의사결정 방식을 거꾸로 뒤집었다. 일선 책임자에게 대폭 권한을 이양해 한미은행에 가면 먼저 일선 직원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고객들 에게 심어 주었다. 운영의 묘를 위해 회의를 통해 토의를 거쳐 합의점을 유출하는 운영방식도 심어 주었다.
미국식 마케팅문화도 심었다. “은행 문턱이 높다”라는 인식을 깨트리는데 앞장 섰다. 행장이 스스로 탑 세일즈맨으로 나섰다. 신문에 기고도 열심히 하여 은행 이름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은행직원이 고객을 찾아 가도록 만들었다. 고객이 은행직원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이 고객을 대접하고 그 비용을 은행에 청구하도록 했다.

홍 행장 시절 그는 이같은 접대비의 청구비용을 따지지 않았다. 홍 행장이 취임하면서 한국학교에 2만 달러를 기탁하고, 미국 자선단체 유나이트 웨이에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사회환원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 같은 그의 경영방식은 한인은행들이 모두 따라 오도록 변화시켰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당시 그가 운영한 한미은행은 코리아타운의 ‘넘버 원’ 은행으로 성장했다. 한미은행을 떠나 나라은행장에서 10년을 지내면서 역시 초창기 부도직전의 은행을 한미은행 다음의 ‘넘버 투’ 은행으로 키웠다. 이제 나라은행은 BBCN으로 탈바꿈하면서 코리아타운에서 실질적인 ‘넘버 원’ 은행이 됐다.
2012년 새해부터 국내에서 새인생에 도전하는 홍 전 행장은 한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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