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칠푼이 대통령’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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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요즘 단단히 뿔이 났습니다. 같은 보수색깔의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연일 거친 독설을 퍼부어대고 있습니다. 지난주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후보에게 ,YS는 “박근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엊그제 자택에 찾아온 임태희 새누리당 경선 후보에게는 좀 더 분명하고 단호하게 ‘박근혜 대통령 불가론’을 역설했습니다.
“박근혜는 (박정희)유신시절의 제2인자였다.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 (5.16 등에 대한) 역사인식에 결함이 있는 정치인이 국가지도자가 돼서는 안된다…”
요 며칠새 ‘칠푼이’란 말은 신종 유행어가 됐습니다. 여야는 서로 상대방을 칠푼이당이라 공격하고, 인터넷과 SNS에서도 때 아닌 칠푼이 공방이 뜨겁습니다.
같은당 출신에다 같은 보수정치인인 전직 대통령이 유력한 차기권력인 여당의 대선 후보를 칠푼이라 폄하하며 공격하고 나선 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YS는 많은 보수층과 특히 이번 대선의 격전지가 될 부산 경남지역에서 아직도 무시못할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박근혜로서는 예기치 않은 싸움 상대를 적군이 아닌 아군 진영에서 만난 셈이지요.
작심하고 박근혜 손보기에 나선 YS의 속셈이 궁금합니다. 박근혜가 단순히 대통령감이 못되는 칠푼이이고, 유신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토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수원로이며 전직 대통령인 자신을 예우해주지 않고, 아들인 김현철의 정계진출을 훼방하는 세력이 바로 박근혜 세력이라고 믿는 사사로운 감정이 일정부분 작용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YS는 60여년의 장치인생을 화끈한 소통의 리더십으로 갈무리한 사람입니다. 그의 소통방식, 특히 언론과의 소통 노하우는 거의 ‘달인’ 수준이지요.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맞붙은 지난 87년 92년 대선에서 한국의 언론들은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거의 YS편에 섰습니다. YS는 특유의 친화력과 소통력으로 언론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런 김영삼에게 박근혜의 불통 리더십과 측근 인물들의 ‘집단 칠푼이 정치’는 마뜩찮을겁니다. 박근혜가 누구보다 먼저 상도동을 찾아 넙죽 엎드려 도움을 청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헌데 타이밍을 그만 놓쳤습니다.


내가 만난 YS…20년전 이야기


20년 전 일입니다. 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때 나는 YS와 단독 인터뷰를 하기위해 한국 출장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라디오 코리아>에서 두 시간짜리 아침뉴스 앵커를 하던 때였지요. 4.29 폭동으로 한인 타운이 불타고 약탈을 당하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을 때, 라디오 코리아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24시간 뉴스 방송만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내방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민자당 대선후보 김영삼의 전화였지요. 그는 폭동피해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LA한인사회가 하루빨리 폭동의 악몽을 딛고 일어나 정상을 되찾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 달러의 폭동성금을 약정했습니다. YS의 인사말은 모두 녹음이 돼 며칠 동안 반복 방송이 됐지요.
전화통화 말미에 YS는 나에게 단독인터뷰를 제의했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를 서울에서 만난건 두어 달 후 롯데호텔 38층 특실에서입니다. 1분1초가 아쉬울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약속시간 10분전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더군요. YS는 이 호텔의 점심메뉴로는 양고기가 좋다며 내 의사를 물었습니다. 미국서 20년을 살면서 한번도 먹어보자 못한 양고기 스테이크를 그날 처음 먹었습니다. 그는 내 접시에 소스와 양념을 쳐주며 양고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설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그가 하고 싶었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대충 짐작하고 있던 얘기였지요.
“임동지, 좀 살살, 아프지 않게 때려주소…” 당시 라디오코리아의 아침뉴스는 한국의 대선후보인 YS와 DJ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 논조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87년 대선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바람에, 온 민주세력의 염원은 배반당하고 대권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넘어갔지요. 그때부터 쌓인 감정 탓인지 DJ와 YS가 모두 나에겐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YS는 LA에 사는 지인들로부터 자신을 호되게 때리는 라디오 코리아의 보도 행태를 접해들은 모양입니다.
타고난 인파이터형 정치인인 YS는 “사자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즐겨합니다. 지난 주 김문수 경기지사와의 대화에서도 이말을 하며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칠푼이다. (경선이 열리면)박근혜는 별것 아닐 것”이라고 김문수를 격려했습니다.
한국 선거에는 투표권이 없는 재미교포만을 상대하는 방송의 비판 보도에까지 신경을 쓰며 “살살 좀 아프지 않게 때려주소..”하고 숨넘어가는 시늉을 하는 YS에게 그날 나는 이미 심정적으로 ‘백기투항’을 해 버렸습니다. 그가 대선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몇 달 후 김영삼은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에 당선 됐습니다.


‘YS 키즈’는 김문수


김영삼 대통령의 기행 아닌 기행(奇行)중에 이런 얘기가 전해집니다. 새벽에 친한 정치부 기자집에 전화를 걸어 “내가 오늘 정책발표를 하는데 당신이 조언을 좀 해주소”하더라는 겁니다. 전화를 받은 기자는 대통령한테 나름대로 조언을 해주는데, 놀라운건 잠결에 해준 이 조언들이 거의 그대로 국정에 반영되더라는 겁니다.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에다 심지어 ‘무뇌형’ 대통령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YS 특유의 소통 정치는 이런식으로 임기 5년 내내 꽃을 피웠습니다. YS식 정치와 박근혜식 정치가 상호 긴장하며 갈등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서 엿보입니다.
한국의 대선정국이 박정희와 5.16, 그리고 유신에 대한 평가를 놓고 초반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박근혜가 한국신문방송 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한 발언이 논란의 불씨가 됐지요. 박근혜는 5.16을 “부친인 박정희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댁‘이라 했고, 유신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라고 했습니다.
문재인 김두관 손학규 등 야당 대선후보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유신공주’ 박근혜의 역사인식을 맹공하며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강도는 조금 낮았지만 같은 새누리당의 경쟁자인 김문수 임태희 등도 박근혜의 그릇된 역사관을 비판했습니다. 여야의 대선 후보들이 가장 앞서 달리고 있는 박근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헌데 원조보수 인사인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박근혜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대통령 불가론을 펼치자 박근혜 캠프는 아연 당황하고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YS의 박근혜 비토는 유신의 당사자로써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자격자체가 없다는 존재론적 거부감에다 개인적인 약점이 많고 소통능력에 문제가 있는 박근혜로는 보수 세력의 재집권이 어렵다는 나름의 현실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는 모범적인 ‘YS 키즈’인 김문수를 보수 세력의 대선후보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기호 12번을 달고 출마해 총 355만표, 득표율 15.1%라는 만만찮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회창은 아직도 충청권과 PIC 지역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과 중도보수층에 강한 김문수가 이회창을 끌어들여 연합전선을 형성하면 박근혜의 1인 독주 양상이던 새누리당의 경선판은 박진감이 더해지며 뜻밖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김문수 측 대변인인 김동성은 엊그제 “이회창 전 총재가 (김문수 후보의)선대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아직 아이디어 차원이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보좌파 신문인 한겨례는 이번 주부터 ‘박근혜 벗기기’에 나섰습니다. 18일자 인터넷판 탑기사 제목은 <박근혜와 16년 동거동락 ‘최태민 미스터리’>였습니다. 부인 6명, 이름 7개의 가짜 목사로 알려진 최태민과 그의 딸, 사위가 16년 동안이나 박근혜와 ‘수상쩍은 동행’을 해오며 남긴 여러 사건과 의혹들이 생생히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경선때와는 비교도 안될 엄혹한 강도의 검증을 앞으로 다섯달 동안 받게 될 겁니다.
<2012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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