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대통령의 막장 ‘셀프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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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우리 집 옷장엔 2002 서울 월드컵 기념 티셔츠 2벌이 새 옷 그대로 10년째 걸려 있습니다. 아직도 그 날의 흥분과 감격이 살아 스멀거리는 새빨간 색깔의 ‘붉은 악마’ 티셔츠입니다. 그 티셔츠 앞부분에 선명하게 새겨있는 로고가 ‘be the Reds!’ 입니다. ‘함께 붉은 악마 응원단이 됩시다’ 정도의 뜻이겠지요.
영어를 좀 한다는 어떤 네티즌이 이 ‘be the Reds!’ 가 고약한 영어라며 시비를 걸고 나섰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자, 우리 모두 빨갱이가 됩시다” 라는 뜻으로 받아 들일거라고 그는 흥분합니다. ‘컴뮤니스트 노스 코리아’가 핵이니 로켓이니 하며 세상을 정신 사납게 만들고 있는 판에, 함께 모두 빨갱이가 되자고 쓴 티셔츠를 입고 LA 시내에 나가면, 틀림없이 북한에서 온 빨갱이로 오해 받을 판입니다.
영어 red는 빨갛다는 형용사입니다. r을 대문자 R로 써 Red가 되면 공산당원-빨갱이란 뜻의 명사로 바뀌지요. ‘be the Reds’는 의문의 여지없이 ’축구 응원단이 되자‘는 뜻이 아니라 ’빨갱이가 되자‘는 뜻입니다.


한국은 지금‘셀프 시대’


서울에서 친구와 작은 식당엘 갔습니다. 종업원한테 “물 한잔만–” 했더니 “셀프예요”하고 가버렸습니다. 물이 셀프라니 무슨 말인가 하고 잠시 ‘통 빡’을 굴리고 있는데, 저만치 카운터 옆에 하얀 정수기 한 대가 놓여있고, 그 뒷 벽에 “물은 셀프로 갖다 드세요”라고 쓴 안내문이 보였습니다. 그제야 감이 왔습니다.
‘물은 셀프’도, ‘빨갱이가 되자’도, 모두 영어가 잘못 쓰인 브로큰 잉글리쉬입니다. 미국에 몇 십 년을 살면서도 굳세게 엉터리 영어를 쓰는 내가, 브로큰 잉글리쉬를 하는 한국인들을 흉 볼 마음은 없습니다. 온 국민한테 빨갱이가 되자고 외치는  be the Reds 같은 위험천만한 영어만큼은 피해 쓰자는 얘기입니다. 이 티셔츠가 나온 그해, 노무현이 16대 대통령이 되면서 대한민국엔 이른바 친북-종북 세력, 우파진영이 빨갱이라 부르는 ‘the Reds’ 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악마 티셔츠의 엉터리 영어가 ‘말의 씨’가 된 꼴입니다
인건비를 줄여야할 작은 식당에서 물심부름을 없앤 ‘물 셀프’식 영어는, 해외교포들이 처음 들으면 어색하지만, 다용도로 원용해 쓸 수 있는 재미있는 ‘한미 합작’ 영어 같습니다. 하루 종일 거실의 소파에 누워 온갖 심부름을 시켜쌓는 은퇴한 남편을 둔 초로의  할머니들한테 이 ‘셀프 화법’은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습니다. 남편이 물이나 휴지를 가져 오라 시키면 “셀프예요”, 커피나 차를 끓여 달래도 “셀프라니까요”, 술 상 차려 달라면 “제발 술타령은 당신이 셀프로 하슈-”. 셀프 한마디로 은퇴남편의 잔소리와 심부름에서 해방된 할머니들이 달려가는 곳은 찜질방입니다.


이명박은 셀프 훈장
김대중은 묻지마 훈장


셀프가 이럴 때 쓰일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상상을 못했습니다. 퇴임하는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장을 받고 싶은데 주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부부가 스스로 만들어 ‘셀프 훈장’을 가슴에 달기로 했습니다. 대통령이 “훈장 주세요” 하니까 국민들이 “셀프로 하세요” 라고 동의 한 걸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은 최측근과 친인척등 각종 부정 비리에 관련된 55명의 범법자들에게 특별 사면복권 조치를 내렸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을 비롯한 정치권과 대부분의 국민여론이 특사에 반대했지만, 그는 움쩍 않고 밀어붙였습니다. 여론은 ‘셀프 사면’이 웬 말이냐고 이죽댔지요.
청와대는 자기자랑 일색의 ‘이명박 정부 국정성과’ 라는 자료집을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19일에는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고별연설에 나서, 자기의 ‘치세’에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됐다고 자랑했습니다. 국민과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중소기업인, 소상공인, 금융관계자들을 불러 145회나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화자찬, ‘셀프 자랑’이 하늘을 찌릅니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이런 일련의 ‘셀프 쇼’중 가장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훈장 쇼입니다. MB 부부가 받기로 한 무궁화 대훈장은 금 190돈, 은 110돈에 자수정과 루비 장식까지 들어간 제작원가 4800만원 짜리입니다. 서민경제가 파탄지경인데 대통령 부부는 1억여원의 국가예산으로 ‘셀프 훈장’을 만들어 가졌습니다.
 셀프훈장의 원조는 노무현 대통령이라지요. 헌정사상 가장 실패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그가, 임기 중의 업적을 기리는 무궁화 대훈장을 스스로 만들어 가진 것은, 한편의 코미디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하자마자 한 일도 없이 훈장을 가슴에 달았습니다. 노무현이 셀프 훈장을 달았다면 김대중은 ‘묻지마 훈장’을 단 셈입니다.
오늘(20일) 국무회의는 신임 박근혜 대통령에게 무궁화 훈장을 수여키로 의결했습니다. MB의 셀프 훈장을 질타하는 여론이 일자, 이를 희석시키는 일종의 물타기 작전으로, 후임 대통령에게 묻지마 훈장을 주기로 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받지 말아야지요. 훈장을 정중히 사양하고 훈장제작비 1억원을 불우 이웃돕기 같은데에 쓰면, 박근혜는 업적과는 상관없이, 국민을 위해 스스로를 낮춘 썩 괜찮은 대통령으로 역사와 국민들에 기억될 겁니다.


착한 대통령과 몹쓸 대통령 사이


이명박 대통령은 다음 주 5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납니다. 재임 동안 부지런함과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역대 어느 대통령 보다 치열했습니다. OECD 국가 중 글로벌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가장 잘 극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찬사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저성장과 양극화등 서민경제가 어렵지만, 그래도 한국경제는 MB의 지도력 아래 금융위기를 어느 정도 선방했고, 세계 주요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국가신용등급도 올랐습니다. G20과 20-50 클럽 가입, 녹색기후기금과 녹색성장기구 유치, 핵안보 정상회의등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괄목할 외교업적을 이뤘습니다. 그는 재임중 49차례 84개국을 방문해 정상외교를 펼쳤습니다. 이들 정상과 함께 다진 신뢰와 우의가 경제위기와 안보위기 극복에 큰 보탬이 됐음은 물론입니다.
이 대통령은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하루 20 시간을 일에 묻혀 산 ‘얼리 버드형’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도 월급은 한 푼도 받지 않았고, 300백억원의 사재도 모두 공익재단에 출연했습니다.
이런 ‘착한 대통령’이 존경과 칭찬은 커녕 5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온갖 ‘멸시천대’만 받고 물러나는 ‘몹쓸 대통령’이 됐습니다. 엊그제 발표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58%가 그의 치세를 부정했고, 24%만이 긍정했습니다. 어떤 고약한 야당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퇴임 후 감옥 들어가 참회록이나 쓰라”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나름대로 이룬 업적도 많은 대통령의 물러나는 뒷모습이 이렇게 을씨년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정권을 실패한 정권이라 가정했을 때 떠오르는 ‘마이너스의 이미지’는 인사 실패, 고소영 내각, 형님 권세, 측근 비리, 불통 리더십, CEO형- 토목 대통령 같은 것들입니다. 대부분 다른 대통령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지만,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 대통령이 갖는 한계- 누가 뭐라든 열심히 일해 업적만 올리면 된다는 불통의 리더십과 “내가 해봐서 아는데–”식의 ‘꼴통 리더십’은, MB가 5년 내내 짊어지고 끙끙댄 시지프스의 바윗돌 같은 정치 업보였습니다. 그의 정치엔 도무지 감동이란게 없었습니다.  월급도 안 받은 돈 많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을 짓는다고 아들 이름으로 대지를 구입하면서 경호실 경비를 끌어 쓰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이 일로 임기 종반의 인기는 곤두박질 쳤고, 퇴임 후 까지도 그를 괴롭힐 악재가 됐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측근인사들에 대한 셀프 사면, 대통령 부부의 셀프 훈장도, 아무리 전례가 있다 해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은 했지만 나는 안한다며 여론에 순응 했더라면, 국민은 감동하면서 떠나는 대통령을 향한 아쉬움과 연민과 마음을 달랬을 겁니다.
19일 고별연설 말미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후 자전거를 타고 4대강 자전거 길을 일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이 가장 실패한 정책 사업으로 꼽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자기 확신과 애정을 그는 이렇게 우회적으로 나타냈습니다. 부디 4대강 사업이라도 성공해 이것으로 그가 역사에 기록되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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